해방 직후 어느 날, 전형필의 아들 고 전성우(전 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장, 2018년 4월 6일 별세)가 초등학생 시절,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집 분위기가 이상했다. 낯선 사람들이 뭔가를 둘러싸고 격론을 벌이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1943년에 구입해서 보관 중이던 〈훈민정음 해례본〉이었다. 이 책은 훈민정음의 창제 목적과 자모 글자의 내용, 그리고 관련 해설을 담은 것이다. 구입할 당시는 일제의 한글 말살정책이 강력하게 시행되던 시기라 내놓지 못하고 있다가 해방 후 이를 공개한 것이다.
서울 성북동 골목에 위치한 간송미술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사립박물관으로 한국의 국보를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박물관이다.
간송미술관이 세워진 것은 1938년. 간송 전형필에 의해서다. 우리 문화유산을 수집하는 데 헌신했던 그가 찾아낸 최고의 문화유산은 바로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간송 전형필의 아버지 전영기는 중추원 의관으로 종로 일대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방대한 토지를 소유한 대부호였다. 1929년, 아버지는 와세다대학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전형필에게 토지 10만 석의 거대한 재산을 상속했다.
통 큰 아버지에 사려 깊은 아들이었다. 그 재산을 어떻게 사용했을까? 일본의 식민통치하에 있던 당시는 우리의 골동품과 고서화가 마구잡이로 일본으로 밀반출되고 있었다. 우리 문화재가 나라 밖으로 빠져나가는 상황을 두고 볼 수 없었던 전형필은 ‘한남서림’이라는 고서점을 인수했다.
전형필은 민족문화 전통을 단절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문화의 결정체인 미술품이 보호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스승인 오세창을 따라다니며 문화재들을 본격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했다. 전국의 거간꾼과 수장가를 찾아다니며 문화재를 구입했다. 국내 문화재가 일본의 수장가들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몇 배에 해당하는 돈을 지불하기도 했다. 이미 일본으로 건너간 문화재 중에서도 되찾아 와야 할 가치가 있다는 판단이 서면 사들였다.
수집한 문화재를 보존하기 위해 1938년 개인박물관인 보화각을 세웠다. 간송미술관의 전신으로 ‘조선의 보배를 두는 집’이라는 뜻이다. 한남서림으로 들어오는 책 중에서 진서나 희귀본이 있으면 학자들과 함께 살핀 후, 그 가치가 확인되면 보화각에 설치한 ‘간송문고’로 옮겼다. 〈동국정운〉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 등 소중한 자료들이 이곳에 모아졌다.
1943년 6월, 한남서림에 앉아 있던 간송의 눈에 빠른 걸음으로 서점 앞을 지나는 고서중개인이 보였다. 인사를 나누며 무슨 일이냐 물으니 경상북도 안동에 〈훈민정음 해례본〉이 나타났는데, 책 주인이 1000원을 부르기에 돈을 구하러 가는 길이라는 것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당시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때는 일본이 한글 사용을 철저히 금하고 있던 시기다. 만약 이 책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조선총독부 귀에 들어가면 어떻게든 손에 넣으려 할 것이 뻔했다. 한 해 전인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이 터져 한글학자들이 모두 잡혀 들어가고, 한글 탄압정책을 펴던 상황이었다. 책 주인이 불렀다는 돈 1000원은 당시 서울의 큰 기와집 한 채 값이었다.
간송은 중개인에게 즉시 1만 1000원을 건네며 책 주인에게 만 원을 전하고, 1000원은 수고비로 받으라 말했다. “훈민정음 같은 보물은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마침내 전형필의 손에 〈훈민정음 해례본〉이 들어왔다. 귀중본을 손에 넣었지만 그는 비밀에 부쳤다. 1945년 광복 후에야 세상에 공개했다.
또 다시 위기가 닥쳤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전형필은 애써 모아둔 문화재들을 그대로 두고 피난을 가야 했다. 서둘러 떠나야 하는 상황에서 훈민정음은 오동나무 상자에 넣어 챙겨갔다. 혼란스러운 피난길에서도 훈민정음을 지키기 위한 그의 노력은 극진했다. 혹시라도 잃어버릴까 낮에는 품고 다니고 밤에는 베개 삼아 베고 잤다. 한 순간도 몸에서 떼어내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 속에서도 지켜낸 〈훈민정음 해례본〉은 1962년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었다. 199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이름을 올렸다.
‘금수저’라는 말에는 부정, 비아냥, 질시가 깔려 있다. 일부 재벌 2세, 3세들의 행태가 반사회적이기 때문이다. 잘못 사용되는 금수저는 흙수저만도 못하다. 일제 식민지 시절 조선 최고의 금수저였던 청년 전형필이 택한 것은 문화재 수집이었다.
명품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시세의 2~3배를 얹어주니 시중에 나온 명품은 자연스레 그에게 흘러왔다. 일본으로 건너가 영국인 개츠비에게 10만 원을 주고 국보급 청자 10점을 사들인 적도 있다. 서울 시내 번듯한 기와집 한 채에 1000원 하던 시절이었다. 간송은 한번 사들인 문화재는 내다 팔지 않았다. 나라가 할 일을 대신 해냈다. 1962년 1월 26일 세상을 떠난 그가 남긴 문화재의 경제적 가치는 수천억 원을 넘는다.
전형필은 어릴 적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랐다. 성품이 온화하고 학문을 사랑해 책 읽기를 좋아했으며 유년기에 집안 어른들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자랐다. 책 읽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청년 전형필은 일제로부터 우리 문화유산을 지켜냄으로써 자신만의 독립운동을 실천했다. 그는 언젠가 조선이 일제로부터 해방될 것을 확신했다. 우리 문화의 우월성을 증명할 수 있는 위대한 작품들을 지켜내야만 해방 이후 민족정신을 바로 세울 수 있다고 확신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을 그림 몇 점, 도자기 몇 점, 낡은 책 몇 권 사는 데 다 써버린 그를 사람들은 비웃었지만 지금 우리는 위대한 우리 문화의 수호자, 문화 독립운동가로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