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익명형 SNS가 인기를 끌고 있는 가운데 대학가에서도 이같은 익명형 소셜 미디어가 성행하면서 학생간 소통의 가교가 되거나 학내 언론 활성화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OO대학교 대나무 숲,’ ‘OO대학교, 대신 전해드립니다’ 같은 신종 소셜 미디어 페이지가 대표적이다. 이 같은 익명형 미디어는 갖가지 정보를 공유하도록 돕는 한편, 분실물 신고, 사랑의 메신저 기능을 하기도 한다. 나아가 학내의 중요 이슈에 대한 토론의 장으로 활용되기도 하고, 학교 내의 비리를 고발하는 공간의 기능도 하고 있다.
대학 내에 익명형·폐쇄형 소셜 미디어가 성행하는 것은 자신의 신원이나 사생활을 공개하지 않고도 솔직하고 다양한 의견을 올릴 수 있는 데다, 민감한 문제에 대한 토론이나 의견을 공유하기에 편리하기 때문이다. SNS의 대명사인 페이스북은 개인정보나 사생활이 남에게 공개돼 이용자들이 불편함을 느끼면서 친구, 가족, 동창, 동료나 동업자끼리만 만나는 밴드, 카카오 스토리 등 배타적 폐쇄형 소셜 미디어로 옮겨가는 추세. 시빅뉴스는 2015년 9월 28일자 기사를 통해 개방성 소셜 미디어인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떠나, ‘블라인드’와 ‘두리번’과 같은 익명이 보장되는 소셜미디어와 ‘스냅쳇’과 ‘쨉’과 같이 글을 쓰고 일정 기간 후에 사라지는 휘발성 소셜 미디어로 옮겨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페이스북에 ‘OO 대나무 숲’이란 형식의 비공개 그룹이 나타난 지도 오래다. 출판업계의 내부 고발자 역할을 하는 ‘출판사 옆 대나무 숲’이 대표적인 사례. 출판업계 종사자들이 직장 내에서의 부당한 처우를 하소연하고 출판계 사정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는 등 동병상련했던 것. 이를 계기로 같은 일을 하거나 같은 직장에 있는 사람들끼리 모인 ‘대나무 숲’이란 이름이 붙은 SNS 그룹 소통 창구가 급속히 늘어났다. 이를 테면 ‘신문사 옆 대나무 숲,’ ‘디자인회사 옆 대나무 숲,’ ‘촬영장 옆 대나무 숲’ 등 같은 방식이다.
‘대나무 숲’이란 왕의 관을 만드는 복두장이가 왕의 귀가 당나귀의 귀처럼 큰 것을 보고도 발설을 못해 병을 얻었다가 대나무 숲에 홀로 들어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쳤다는 동화에서 유래한 것.
직종별 대나무 숲이 유명세를 타자, 여러 대학교에서도 SNS 대나무 숲이 나타나게 됐다. 대학별 대나무 숲은 관리자도 익명이며 제보도 익명으로 한다. 익명으로 글을 제보할 수 있다는 대나무 숲의 특성 상, 주변에 사람들에게 할 수 없는 자신의 현실적인 고민을 털어놓는 대학생들의 글들이 많이 올라오고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동생들과 단칸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어려운 생활을 꾸려나가던 중, 돈 때문에 대학을 포기하려고 했다가, 집주인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졸업한 사람이 그 고마움을 전하는 감동적인 사연을 한 대학의 대나무 숲에 올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 여러 대학교에서 운영하고 있는 페이스북 페이지 ‘OO 대학교 대나무 숲’의 한 사례(사진: 취재기자 서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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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부터 전국의 대학에는 ‘00대학교, 대신 전해드립니다’라는 또 다른 SNS 페이지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기능은 대나무 숲과 비슷하다. 하지만 대나무 숲과 달리, 이 페이지들은 관리자는 익명으로 운영하지만, 제보는 제보자의 선택에 따라 익명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제보자가 관리자에게 제보 글을 보내면 관리자는 나름의 기준을 세워두고 제보를 받아 글을 게시한다. 이 때 제보자가 익명을 요구하면, 당연히 글은 익명으로 게시된다.
“오늘 1시 도서관 앞에 계셨던 단발머리 여성분을 찾습니다,” “인문대 앞에서 반지 분실했는데 습득하신 분 어디 계신가요?” 같은 글도 대학별 ‘대신 전해드립니다’에 올라오기도 한다. 대학 내 ‘대신 전해드립니다’ 페이지가 분실물 신고 센터나 사랑 고백을 들어주고 알리는 매치 메이커 역할도 하는 것.
▲ 여러 대학교에서 운영하고 있는 페이스북 페이지 ‘00대학교 대신 전해드립니다’의 모습을 보여주는 한 대학의 페이지 모습(사진: 취재기자 서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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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대학의 ‘대나무 숲’과 ‘대신 전해드립니다’는 고민을 털어놓는 글이 많지만, 지성의 전당인 대학 내 SNS답게 학교 내 이슈를 제기하는 공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대신 전해드립니다’가 일종의 대학 토론 광장이 되기도 하고 여론 소통 공간이 되고 있는 것이다. 지난 3월 한 대학의 학과 신입생 환영회에서 후배들에게 군기를 잡는다며 신입생의 몸을 청테이프로 묶고 오물을 섞은 막걸리를 뿌려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빚은 사건도 해당 대학의 ‘대나무 숲’에 제보가 올라오면서 비롯된 것.
본지는 1만 명이 넘는 팔로워를 갖고 있으며 2년 넘게 운영되고 있는 한 대학의 ‘대신 전해드립니다’의 관리자를 만나 운영 시스템을 들어 봤다.
이 페이지를 처음 개설한 사람은 졸업했고, 이를 이어받은 2명의 새 관리자가 관리 중이다. 해당 대학 3학년에 재학 중인 관리자 A씨에 따르면, 제보는 많게는 하루에 100통이 넘는다. 그는 “등하굣길은 물론이고 쉬는 시간, 주말, 개인적인 시간을 보낼 때도 항상 페이지를 관리한다. 현재는 두 명이서 번갈아가며 제보를 받고 검토해 올리는 일을 하고 있다. 재학생 뿐 만 아니라 상업적 홍보도 들어오기 때문에 이를 검토하는 데 드는 시간이 엄청나다”고 말했다.
하루에 몇 백 통의 제보가 쏟아지다 보니 관리자에 대한 불만도 쏟아진다고 한다. 그는 “댓글을 하나하나 다 읽은 후 관리자들끼리 나름의 필터링을 거쳐 게시하는데 ‘이딴 글을 왜 올리냐,’ ‘이 페이지도 이제 한물 갔네’와 같은 도 넘는 비난성 댓글도 가끔 있다”며 “사람마다 기준이 다를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가끔은 상처를 받는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관리자 자신이 익명이다 보니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생기기도 한다. A 씨가 관리자인지 모르는 지인이 제보하는 경우도 있다. 그는 “주변에 비밀로 했더니 주변 친구들도 가끔 제보를 보낸다. 잘 아는 친구가 어떤 남성을 좋아한다는 글을 보내온 적이 있었는데, 그런 걸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고 말했다. 페이지를 통해 맺어진 커플들도 적지 않다. 그는 “한번은 한 여성을 찾고 있다는 남성의 사연이 올라왔다. 결국 두 사람이 사귀게 됐고, 두 사람을 이어줘서 고맙다는 글이 다시 왔다. 이런 맛에 페이지를 관리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연인과 헤어진 후 슬픈 심정을 익명으로 보내오는 경우도 많다. A 씨는 “한 남학생이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가 전 여자 친구의 친구와 만남을 시작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그런 제보자 중의 한 사람이 학과 학생인 것을 알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기 했다”고 전했다. 그는 졸업하기 전까지는 대신 전해드립니다 페이지를 계속 관리할 생각이다. A 씨는 ‘대신 전해드립니다’ 페이지를 관리하는 일은 아무나 겪을 수 없는 색다른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 페이지를 운영하면서 힘든 일도 많지만 다양한 인생사를 토로하는 제보 덕분에 활력을 얻는다. 앞으로도 사랑을 전하는 메신저가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