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교수들이 대학원에 유학 온 한국학생을 보고 세 번 놀란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우선 유학 온 한국 학생의 토플(TOEFL) 영어성적이 너무 높아서 놀라고, 두 번째는 영어 점수에 비해 영어를 너무 못해서 놀라고, 마지막으로 유학 마치고 돌아갈 때도 영어가 늘지 않아서 놀란다는.
몇 해 전 결과이긴 하지만 토플시험을 관장하는 ETS의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 영어 말하기 성적은 IBT 시험 결과 157개국 중 121위였다고 한다. 영어교육에 투입하는 개인적, 사회적 비용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국가인 우리나라는 초등학교부터 대학 졸업까지 거의 12년 이상 영어를 공부하게 된다. 그럼에도 영어 말하기 능력은 하위권 수준이다. 외국인 친구들이 필자에게 왜 한국은 아파트 단지 이름이 모두 영어냐고, 그리고 왠 유럽식 별장(빌라, Villa)이 이렇게 많냐고 물을 정도로 한국은 영어 과잉 사용 국가이다.
심지어 몇몇 지방자치단체는 영어공용화를 선거 공약으로 내걸거나 실제 정책으로 시도한 바 있다. 서울시가 2003년에 모든 공문서를 영문으로 만들고 영어 회의를 하는 등 영어공용화를 추진했으나 실패했고 파주, 안산 등 수많은 도시의 영어마을도 모두 문을 닫았다. 부산시도 2030년 세계박람회와 외국기업 유치를 위해 영어상용도시 정책을 2022년 8월부터 추진 중이다.
영어를 한국어와 함께 또 다른 공식 언어로 사용하자는 ‘영어 공용화’ 주장의 원조는 1998년 출간된 소설가 복거일의 책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문학과 지성사)'이다. 복거일은 당시 민족주의의 폐쇄성을 비판하며 세계화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 국제어인 영어를 공용어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 최초의 문부대신 모리 아리노리(1847~1889)는 지금으로부터 무려 150여년전 “일본이 서구와 대등해지려면 영어를 국어로 채용해야 한다”라는 영어공용화론을 펼친 바 있다. 그는 사무라이 집안에서 출생해 1865년 19세의 나이로 영국 유학을 다녀왔으며 이토 히로부미의 강력한 지지 아래 군대식 교육을 학교에 도입해 학교에 천황 사진을 걸어놓고 배례의식을 거행하도록 한 장본인이다.
모리는 당시 출간된 '일본의 교육'이라는 저서에서 일본어는 영토 밖에서 통용될 수 없는 빈약한 언어이며 한자에 지배당한 일본어에 녹아 있는 중국어의 요소가 근대화에 장애가 된다고 주장했다. 역설적으로 모리는 1889년 2월 12일 일본제국 헌법이 선포되던 날, 영어공용화 주장을 펼친 이유로 한 국수주의자의 칼에 살해당했다.
이러한 오랜 역사를 가진 영어공용화론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더 영어를 못하는 나라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 영어는 전 세계 75개 국가에서 모국어 또는 공용어로 사용되고 있으며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인구는 3억8000만 명, 공용어로 쓰는 인구도 3억7000만 명에 이른다. 캐나다나 스위스, 룩셈부르크처럼 여러 민족이 공존하는 국가에서는 영어와 프랑스어, 독일어 등 2개 이상의 언어를 공용어로 채택하고 있다.
17세기 섬나라 영국에서 고작 500만 명 정도가 사용하던 지역 민족어였던 영어가 세계어로 성장하게 된 계기는 식민지 개척을 통한 제국주의의 번성이다. 이제 전 세계 우편물의 4분의 3이 영어로 쓰여져 있고 디지털 세상에 저장된 정보의 80%가 영어로 되어 있으니 새로운 디지털 제국주의가 생겨난 셈이다. 신화로만 전해지던 언어공동체인 바벨탑의 전설이 부활하게 되는 징조가 아닌지 우려된다. 이런 연유에서 1989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카밀로 호세 셀라는 앞으로 전 세계에 영어와 중국어, 스페인어, 아랍어만 살아남을 것이며 6000여 개에 달하는 민족어는 소멸할 것이라고 탄식한 바 있다.
100년 안에 현존하는 수 천개의 민족어 가운데 절반 이상이 사라질 것이며 심지어 300년이 지나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어도 언어 박물관으로 갈 것으로 보는 극단적 예측도 있다. 이러한 추세는 단기적으로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영어 사용에 가장 강한 반발감을 가지고 있던 프랑스조차도 이제 영어를 장려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싱가포르나 필리핀, 인도처럼 오랫동안 타 민족의 지배를 받은 역사를 가진 국가들이 이중언어(Bi-lingual)로 전환한 사례는 이들 국가와 다르다. 인도만 하더라도 16억에 달하는 인구가 18개의 공용어와 840여 개에 이르는 민족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3세기가 넘는 식민지배 등으로 영어라는 하나의 공용어가 필요해서 도입했기 때문이다. 또한 홍콩이나 싱가포르는 수십년 혹은 백년 이상을 영미 식민지로서 통치를 받는 동안 영어가 공용어 지위를 획득한 경우이다.
앞으로도 국제어인 영어 사용자가 계속 늘 것이라는 추세는 틀리지 않다. 또한 영어를 첫 언어로 배운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의 불이익도 있을 것임이 분명하다. 사람의 뇌는 첫 언어인 모국어를 배우는 영역과 태어나서 두번째 언어로 영어를 배우는 영역이 다르다. 따라서 영어를 첫 번째 언어인 모국어로 배우지 않는 한 아무리 열심히 배워도 영어를 모국어처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는 없다. 영어공용화가 되어도 우리가 영어를 모국어로 쓸 수는 없을 것이다. 영어를 공용어로 쓰든 상용어로 쓰든 혹은 영어 사용하기 편한 도시가 되든 우리의 모국어는 한국어이며, 외국어로서의 영어교육은 체계적이며 효율적인 방향으로 훨씬 강화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아이를 낳지 않아 인구가 줄고 있는데 영어의 본거지인 미국에서는 스페인어 사용자들인 히스패닉 인구가 나날이 증가하여 50년 뒤면 미국 전체 인구의 30%에 달할 것이라고 한다. 이에 따라 미국에서는 1999년 연방대법원이 영어 공용어는 위헌이라고 판결한 바 있다. 즉 미국에서 영어는 공용어가 아니며 어떤 언어도 공용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미국 교포들이 아이를 많이 낳아서 전체 인구의 절반이 한국 교포가 되면 한국어가 지배 언어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흔히 5000년간 단일 민족으로 살아왔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데 그런 이유 때문인지 우리 것에 대한 자부심이 크고 다문화를 잘 수용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인구증가율이 제로에 가까워지고 다문화권에서 온 인력들이 노동시장을 좌지우지하는 현 시점에서 세계화에 역행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영어공용화라는 것이 다민족 다문화를 포용할 수 있는 개방적 문화를 갖추는 대안이라고는 할 수 없다. 장기적으로는 영어가 가장 강력한 국제어로 자리 잡겠지만 영어공용화가 된다고 해서 우리가 싱가포르처럼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시빅뉴스는 모든 시민의 작은 목소리를 크게 생각하는 시민언론이다. 이때 시민은 일차적으로 한국의 시민이자 학생이자 독자이다. 그러나 갈수록 다문화권 시민들이 주변에 자꾸 늘고 있어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시빅뉴스도 필요하다. 이에 시빅뉴스는 이러한 다민족 다문화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글로벌 페이지를 고려중이다. 지구촌의 다양한 목소리를 다언어로 들려주는 매체의 시작은 물론 영어가 될 것이다. 가장 지역적이고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 될 수 있는 가치를 보여주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