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10-28 17:07 (월)
[차용범 칼럼] 이어령 선생 2주기, 그의 명작을 읽으며
상태바
[차용범 칼럼] 이어령 선생 2주기, 그의 명작을 읽으며
  • CIVIC뉴스
  • 승인 2024.03.04 06: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 대표 지성(知性)’ 이어령 선생이 우리 곁을 떠난 지 2년이다. 선생이 평생 천착한 ‘한국인 시리즈’의 위대한 기여를 생각하며, 한국의 명문명작 몇 편을 읽었다. ‘명문장은 깊이 생각하고 끝없이 상상하는 힘에서 나온다’, 이어령 선생이 추구한 ‘명문론’도 새삼스럽다. ‘명문을 읽으면 가슴은 뜨거워지고 머리는 맑아진다’고 하지 않나. 명문이란 시공을 초월해 누가 읽어도 감동하는 글이다. 수필 논설 선언문 시 소설…. 각 장르에서 두루 명문은 많다.

그 명문을 읽는 느낌은 늘 새롭다. 정말 가슴이 뜨거워지는 감흥, 온몸을 저릴 듯한 감동…, 그만큼 명문의 세계는 넓고 깊다. 그저 문법이 완벽하고 어휘가 적확하다고 해서 명문은 아니다. 내용도 좋아야 하며, 특히 글쓴이의 혼이 담겨 있어야 한다. 장지연 선생의 논설 ‘시일야방성대곡’, 최석채 선생의 논설 ‘일부 군인들의 탈선행동에 경고한다’가 그랬다. 그 글에 담긴 선생들의 결기와 골기(骨氣, 뼈대와 기질)는 가슴이 뜨겁다 못해 서늘하다.

“(…)사랑하는 것은/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사랑하는 이에게 바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헌사(獻辭), 청마 유치환의 시 <행복>은 시구(詩句)를 넘는 불변의 경구(警句)다.

그가 연인 이영도의 마음을 열고자 보낸 편지 중 “당신은 어찌하여 이 세상에 있습니까? 나와 같은 세상에 있게 됩니까…” 같은 가슴앓이 고백은 그저 처절하다. 과연 당신을 이렇게 사랑하는 내가 미련한 것인가를 묻는 표현은 연애 속의 단순한 역설과 아이러니에 그칠 수 없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사랑 시, 그것은 그 순수히고 애달픈 사랑과 운명 앞에 속수무책인 ‘진실’ 자체이리.

‘청년문화의 아이콘’ 최인호의 소설 <겨울나그네>의 종장(終章) ‘겨울나그네’의 한 문단 역시 숨이 턱 막힌다. “그때 그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 그때 그 젊고 아름답던 청년은 어디에 갔는가?(…) 옛날을 말하던 기쁜 우리들의 젊은 날은 어디로 갔는가. 이제는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기쁜 우리들의 젊은 날은 저녁놀 속에 사라지는 굴뚝 위의 흰 연기와도 같았나니.” 과연 ‘가슴 아픈 청춘의 방황과 참혹한 젊은 날의 슬픔’을 노래한 고전이라 할 만하다.

김성우 선생의 ‘돌아가는 배’, 법정 스님의 ‘무소유’도 좋다. 문장도 그러려니와, 특히 그분들의 깊은 생각, 끝없는 상상이 새롭고도 신선하다. 그중에는 평범한 소재로 빼어난 교훈을 주는 글도 있다. 미술사학자 최순우 선생의 수필 ‘바둑이와 나’다. 6.25 난리 속에서 일어났던 한 인간과 의리 깊은 바둑이의 이야기는 읽는 이의 가슴을 적시는 차원을 뛰어넘는다.

“사람들의 욕 중에 개 같은 놈이니 개만도 못한 놈이니 하고 개 욕을 도매금으로 해 넘기는 경우가 많지만 개는 그렇게 부도덕한 짐승이 아닌 것만 같다”-우리는 나쁜 이의 대명사로 ‘개보다 못한 놈’, 하찮은 물건을 ‘개값’, 혼란스런 정황을 ‘진흙탕 개싸움’으로 빗대고들 한다. 그럼에도 ‘개만도 못한 짓거리’를 저지르는 동물은 정작 ‘사람’이라는 깨우침이다. 그 명문들은 그저 미문(美文)보다, 시대와 공간을 극복하는 ‘진실’ 그 자체다.

《땅속의 용이 울 때》, 새해 읽은 이어령 선생의 유고작이다. 한국문화론의 효시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의 관점을 직접 수정·보완한 ‘한국인 이야기’ 시리즈의 특별판이다. 책은 한국인의 피와 땀, 눈물과 영혼이 스민 땅의 이야기를 새삼 곱씹고 있다. 제2부 ‘다시 쓰는 흙과 바람의 이야기’-3장 ‘다시 만난 한국인의 뒷모습’을 읽은 감동을 컸다. 특히, 오늘 한국인의 귀한 본성(本性)을 일깨운 경계의 울림은 컸다.

‘한국인이 뒷모습’에는 6·25전쟁 당시 피난 행렬 이야기가 있다. 전쟁 발발 나흘째 새벽, 서울의 남북을 잇는 유일한 통로 한강 인도교 폭파 후의 광경이다. 한국 근대문학 개척자 김동인의 아들이 중풍에 걸린 아버지(김동인)를 업고 피난길에 올랐을 때다. 인민군이 탱크를 앞세워 달려드는데 피난민은 나룻배를 타려고 밤새 줄을 섰다, 피란가도(街道) 양쪽으로 국군이 새끼줄을 쳐놓아, 피난민은 그 안쪽을 걸으며 하루 만에 경기도 수원까지 피난 갈 수 있었다….

선생은 이 일화와 함께, 한 장의 사진을 떠올린다. 서울 남쪽 피란가도에서, 왼쪽 길가의 군대는 전장을 찾아 북상하는 유엔 군대, 오른쪽 길가의 피난민은 무거운 짐을 이고 들고선, 일렬로 질서 정연하게 남쪽으로 내려가는 장면이다. 선생은 일깨운다, “세상 어느 나라, 어느 전쟁에서 피란민이 이렇게 질서 정연하게 가는 거 본 적이 있는가? 프랑스 같은 나라에서도 서로 도망가느라 길을 막아서 군대가 전장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탱크가 가는 길 앞을 피란민이 막아서 아수라장을 빚곤 했다.”

6·25전쟁 초기, 서울 남쪽 도로에서, 왼쪽 전장을 하는 유엔군과, 오른쪽 무거운 짐을 이고 일렬로 질서 정연하게 피난 중인 피난민의 모습. 세계 사람들이 한국인을 ‘대단한 민족’으로 감탄한 장면이다(사진: 구글이미지)
6·25전쟁 초기, 서울 남쪽 도로에서, 왼쪽 전장을 하는 유엔군과, 오른쪽 무거운 짐을 이고 일렬로 질서 정연하게 피난 중인 피난민의 모습. 세계 사람들이 한국인을 ‘대단한 민족’으로 감탄한 장면이다(사진: 구글이미지)

“이 기적 같은 사진 한 장에 세계 사람들이 놀랐다. ‘한국인은 대단한 민족이구나’ 감탄했다. 저 피란민 무리에 무슨 리더가 있었겠나. 남편 잃고 자식 잃은 여자들이 대부분, 그 경황 없는 순간에, 정처도 없이, 그저 살려고 남쪽으로 갈 뿐, 그 사람들이 이처럼 질서 정연하고 의연하다. 이 사진 한 장이 한국은 야만의 국가가 아니라고 알려준 거다. 봤나? 이게 바로 한국인의 뒷모습인 거다….”

이어령 선생이 유고작 ‘땅속의 용이 울 때’ 표지(사진; 출판사 제공).
이어령 선생이 유고작 ‘땅속의 용이 울 때’ 표지(사진; 출판사 제공).

‘한국인은 누구인가’, 이어령 선생은 한국인과 한국문화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살펴왔다. 그는 젊었을 적, 우리 전통을 대체로 비판하다 후기 들어 그 전통의 창조적 계승을 탐구했다. 우리 문화를 예리하게 관찰하며 설득력 있게 해석했다. 우리는 찢어지게 가난한 삶, 어지럽고 암울한 시대를 살아오기도 했지만, 피나는 노력과 의지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민의 긍지를 갖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는 증언한다, 6·25전쟁 초기 미군도 한국인의 무질서를 경멸했으나, 얼마 후 그 경멸은 존경으로 바뀌었다고.

'창조적 상상력' 이어령의 말년, 고고한 품격 속의 수척한 풍모. 지상(地上) 마지막 인터뷰에 나타난 선생의 눈빛은 형형하되 표정은 창백했다(사진: 구글이미지).
'창조적 상상력' 이어령의 말년, 고고한 품격 속의 수척한 풍모. 지상(地上) 마지막 인터뷰에 나타난 선생의 눈빛은 형형하되 표정은 창백했다(사진: 구글이미지).

그 한국인의 우뚝한 긍지는 오늘 어디로 갔는가. 오늘 한국 사회는 가히 ‘천하대란(大亂) 시대’다. 우리에게 당연해야 할 사회적 질서며 이성적 합리성은 날로 그 권위를 잃고 있다. 지난 한 해 역시, ‘심리적 내전’을 방불케 할 혐오·극단의 정치, 침체의 수렁에 빠진 경제, 국가 안위에까지 국론분열에 시달린 사회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연상케 할 정도였다. ‘교수신문’이 2023년 ‘올해의 사자성어’로 '견리망의(見利忘義)', ‘이로움을 보고 의로움을 잊다’를 선정하기까지 했으니.

이어령 선생의 독창적 ‘한국문화론’을 새삼 일깨운다. 한국인은 외세에 짓밟히고 가난에 쪼들려도 의연하게 제 길을 걸어왔다는 것, 그건 우리 스스로 자랑해야 할 ’뒷모습‘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우리의 사회적 질서며 이성적 합리성을 되찾아 갈 수 있을까. 한국인의 살아있는 개성과 저력을 치열하게 조명한 역작, 한국 사회의 혼란기에 ‘미래에의 낙관적 희망’과 ‘함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문맥은, 그럴수록, 얼마나 감사한가.

최순우 선생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에서, 무량수전 앞의 풍정(風情)을 한껏 찬탄했다. ”그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고. 선생의 그 표현을 빌려 이어령 선생의 위대한 기여에 새삼 감사함을 전한다. “나는 이어령 선생의 명작을 읽으며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그가 남긴 ’한국인 기질론‘의 귀한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고-.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