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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여성스럽게 사는 문화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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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여성스럽게 사는 문화 ①
  • 편집위원 박기철
  • 승인 2016.12.26 14: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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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女~文: Amenity, Feminism and Lifeway / 칼럼리스트 박기철

다음 글은 <총균쇠>처럼 서양문명이 동양문명을 정복했던 역사와 달리 
생태문명 차원에서 이제 ‘아름답고 여성스럽게 사는 문화’의 제안이다.

 

뽀실이를 보다듬고 있는 딸 주리(사진: 편집위원 박기철 제공).

일상 속 아름답고 여성스러운 삶의 문화

우리 집에는 뽀실이가 살고 있다. 지인이 기르던 암컷 마르티즈가 새끼를 낳아 우리집에 준 강아지인데 2004년 새끼 때부터 우리집에서 살았으니 벌써 나이가 13세이다. 강아지라고 하기에는 나이가 많은 할아버지다. 그런데도 아직 건강한 강아지처럼 여겨진다. 수컷인데 아주 식탐이 많다. 평소에는 나한테 인사성이 없는데 내가 뭐라도 먹기만 하면 가까이 다가와 자기한테도 달라며 컹컹 짖는다. 그래서 내가 얍삽견이라고 부른다. 그리 얍삽하게 행동하면 안된다며 장난 삼아 아주 가볍게 살짝 머리에 군밤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 내가 그런 행동을 하면 딸 주리는 뽀실이 머리가 나빠지니까 그러지 말라고 한다. 주리가 뽀실이한테 하는 행동을 보면 참으로 애틋하다. 말 한마디 손짓 하나 모두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터치가 배어 있다. 나도 뽀실이를 귀여워하지만 내가 귀여워하는 것에는 주리처럼 다정다감함이 별로 없다. 나는 아무리 귀여워도 개는 개일 뿐이라고 여기지만 주리는 마치 막둥이 남동생처럼 대한다. 아빠 먹을 것은 별로 안 사와도 뽀실이 먹을 것이라면 사료는 물론 간식도 챙긴다. 주리의 이런 모습이 '美 女 文'을 하나의 문장으로 표현한 ‘아름답고(美) 여성스러운(女) 삶의 문화(文)’가 아닐까? 미 녀 문이라는 개념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당장 나와 가장 가까운 내 딸에게 있는 것이다. 주리는 남자인 나와 달리 여성으로서 반려견 뽀실이를 보듬는 것이다. 그 모습이 아름답고 따뜻하다. 주리가 뽀실이에게 하는 것처럼 우리가 세상만물을 대한다면 그것이 바로 이 책의 키워드인 美~女~文을 우리 일상에서 행하는 길이다.

 

 

 

쓰다듬고 보듬는 문화의 시작

개의 학명은 Canis familiaris다. 학명답게 개는 인간과 가장 친근한(familiar) 동물이다. 반면에 인간으로부터 가장 조롱받는 동물이기도 하다. 온갖 욕은 다 개를 동원한다. 개새끼, 개망나니, 개뼉다구, 개코, 개지랄, 개나발, 개소리, 개차반, 개수작, 개구멍, 개털, 개죽음, 개뿔, 개쪽, 개망신, 개고생, 개판, 개똥참외 등… 개가 쓰여진 속담도 대개 나쁜 뜻이다. 개 눈엔 똥만 뵌다, 미친 개에겐 몽둥이가 약이다, 개 같이 벌어 정승 같이 쓴다, 개팔자가 상팔자, 오뉴월 개 패듯 한다, 제 버릇 개 주랴, 개가 웃을 일이다, 개 밥에 도토리다, 개가 똥을 마다하랴 등등등. 인간과 너무 친근하여 생긴 개의 업보일 것이다. 아무튼 늑대를 잡아 인간이 길들이며 인간과 친근해지도록 진화하게 된 개에게는 수많은 돌연변이가 있었을 것이다. 개의 품종 수는 수백여 종이나 되는데 그 다양한 품종은 돌연변이(mutation)에 의한 것이다. 처음에는 거칠기만 한 늑대의 모습이었다가 인간과 친해지도록 개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일어나 점점 더 인간의 사랑을 받도록 진화한 것이다. 그렇게 하여 개는 다정한, 애잔한, 충직한 눈동자로 인간을 또렷하게 응시하는 유일한 동물이 되었다.

교육방송(EBS)이 2013년에 기획 제작하여 방송한 <다섯 개의 열쇠>라는 5부작 프로그램에서는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인류의 문명을 좌우하게 될 다섯 가지 요인으로 0과 1 디지털, 신소재, 종자, 돌연변이, 태양을 꼽았다. 그만큼 돌연변이는 인류가 걸어 왔고 가는 길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우리 인류에게는 앞으로 어떠한 돌연변이가 생기게 될까? 도킨스(Dawkins, 1976)는 생명체라는 하나의 개체가 아니라 생명체를 이루게 하는 정보 단위인 이기적 유전자가 모든 생명체의 진로와 운명을 좌우한다고 했다. 그럴 듯한 가설이다. 하지만 <이타적 유전자(Ridley, 2001)>라는 대항 가설도 있다. 과연 인간은 이기적으로 돌연변이될까? 이타적으로 돌연변이될까? 둘 중에서 하나만은 아닐 것이다. 다만 지금까지 이기적 유전자가 우세하였다면 앞으로는 이타적 유전자가 대세를 좌우할 것만 같다. 이러한 관점에 따라 리프킨(Rifkin, 2009)은 앞으로 분열 갈등 투쟁보다 공감의 시대가 펼쳐질 것임을 전망하였다. 

포르투갈 리스본의 어느 뒷골목. 바닥마저도 아름다운 삼각형 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사진 속 노인이 개를 쓰다듬고 있다. 거친 남성에게도 있는 따뜻한 기운(사진: 편집위원 박기철 제공).

그의 의견에 공감한다. 설령 그 것이 하나의 이상적이며 당위적인 가설이라 하더라도 그 가설에 끌린다. 사진 속의 저 어르신이 말도 못하며 그저 다정하게 바라만 보는 개를 쓰다듬고 보듬는 것처럼 우리 인류도 서로 간에 저렇게 서로를 쓰다듬고 보듬는 쪽으로 유전자에 변이가 일어날 때가 온 것같다. 물론 자신 만을 생각하는 인간의 이기적 본성이 완전히 박멸되는 것은 아니더라도 타인을 배려하며 타인과 협력하는 이타적 본성이 기를 펴는 시대가 올 것만 같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인류는 너무도 싸움질로 연명하여 왔기 때문이다. 지금 그 싸움은 극에 달하고 있다. 지극(至極)하면 그 극성의 기운이 사라지는 것이 순리다. 그래서 이제 강하고 단단한 것이 지배하였던 인류의 마초적 역사가 끝나고 아름답고 여성스러운 삶의 문화가 더 큰 기운으로 우리 인류를 지배할 때가 온 듯하다.

 

 

 

인간이 가꾸고 꾸미어 온 문화

예전에 TV에서 새들이 집을 짓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까치가 나무 위에 둥지를 짓는 정도가 아니라 평지에 보다 정교한 집을 짓는 것이었다. 그냥 몸을 맡길 수 있도록 편안하게 짓는 것이 아니라 뭔가 미적인 구상이나 감각을 가지고 만드는 것이었다. 머리 크기가 작기에 인간으로부터 머리 나쁜 새 대가리라고 조롱받는 새에게도 과연 미적 감각이 있을까? 어느 정도 있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미감의 경지를 한도 끝이 없을 정도로 키워 왔다.

포르투갈 리스본 어느 뒷 골목 바닥은 그 미적 감각의 생생한 사례다. 그냥 다니기 좋을 정도로 평평하게 바닥을 깔면 될 터인데 저리도 삼각형 무늬로 아름답게 꾸몄다. 한자로 무늬는 ‘文’이다. 글을 뜻하는 文은 뭔가 모양이나 형상을 본따서 그리는 무늬에서 시작되었다. 저 바닥 무늬는 삶의 양식(way of life)인 문화의 단면이다. 그 문화인 무늬를 딛고 선 젊은 아가씨들이 아름다운 바닥 무늬와 함께 너무나도 아름답다. 아름다운 느낌인 미감은 자연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게 느껴질 수 있지만 인간의 손길이 아름답게 가미(加美)될 때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다. 거친 남자의 힘센 손길로 저 아름다운 바닥을 깔았을 것이다. 자연미와 어울리는 인공미는 더욱 아름답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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