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종때 일어난 기묘사화(己卯士禍)는 조작 정치의 전형을 보여준다. 중종이 조광조(1482~1519)를 내세워 개혁을 밀어붙이자, 훈구파는 눈엣가시인 조광조 제거에 나선다. 야사에 따르면, 이들은 나뭇잎에 꿀을 발라 벌레들이 파먹게 해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네 글자를 만든다. 조(走+肖=趙)씨가 왕이 된다는 뜻. 증거 조작으로 역모죄를 뒤집어쓴 조광조는 결국 사약을 받는다.
검찰 수사가 한창인 문재인 대통령 아들의 채용특혜 제보 조작 사건도 유력한 정적을 노렸다는 점에서 기묘사화와 흡사한 면이 있다. 물론 제보 조작은 상대를 쓰러뜨리는데 실패했다는 점이 다르긴 하지만.
선동과 여론 조작의 달인 파울 요제프 괴벨스는 “대중은 큰 거짓말일수록 잘 믿고 거듭하면 진실이 된다”고 설파했다. 거짓말이 처음에는 부정되고 의심받지만 되풀이하면 결국 모든 사람이 믿게 된다는 게 그의 지론. 괴벨스의 이론은 정치인들이 답습해왔다. 대표적 사례가 선거 때마다 등장하는 흑색선전.
“선동은 한 문장으로 가능하지만 이를 반박하려면 수 십장의 문서와 증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반박하려고 할 때에는 이미 사람들은 선동돼 있다.” 괴벨스가 남긴 이 명언(?)은 선거 때 근거 없는 비방전을 펼치는 후보들의 심리를 잘 설명해준다. ‘승리한 자는 진실을 말했느냐 따위를 추궁당하지 않는다’는 믿음 때문일까.
괴벨스 이전에도 '큰 거짓말'로 조작의 달인 면모를 보인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도 유명한 찰스 도슨. 그는 1911년 영국의 필트다운에서 50만년 전 인류 조상의 것으로 보이는 두개골 파편과 턱뼈 등을 발굴하면서 하루 아침에 국민적 스타로 떠오른다. 이른바 필트다운인 화석. 하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뒤 불소 측정법으로 화석을 조사했더니 500년도 안된 오랑우탄의 턱뼈와 침팬지의 치아를 교묘하게 조합한 ‘작품’에 불과했다. 진실이 드러나는데 42년이 걸린 셈.
70만 년 전 구석기 유물을 발굴했다며 일본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인물이 후지무라 신이치였다. 그는 유물을 매장했다가 꺼내는 수법으로 1981년부터 20년 간 희대의 사기극을 벌이다 제보를 받은 마이니치 신문의 잠복 취재에 걸려 덜미가 잡히고 말았다. 괴벨스의 말대로 큰 거짓말을 거듭하면 사람들이 사실로 믿게 되는 걸까.
이 대목에서 조작을 당하는 사람의 심리가 궁금하다. 일본 작가 오카다 다카시는 <심리조작의 비밀>에서 ‘속임수’가 심리조작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심리 조작에 걸리기 쉬운 성격으로 타인의 눈치를 보거나 모든 정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유형 등이 꼽힌다. 주체적으로 결정하지 못하고 상대방의 판단을 살피기 때문에 조작에 쉽게 노출된다는 것이다.
심리 조작을 위한 기법으로 정보 입력 제한, 과다 정보 입력, 생각할 여유 빼앗기 등이 제시된다. 괴벨스가 이런 체계적 이론을 접했는지 알 수 없지만 나치 독일의 국민을 쥐락펴락했던 것을 보면 그 자신이 조작과 선동의 이론가임에 틀림없다. 물론 자살로 비참한 죽음을 맞긴 했지만.
영어 단어 ‘조작(manipulation)’의 ‘mani’는 라틴어 ‘manus(손)’가 어원. 손을 써서 어떤 일을 사실인 것처럼 꾸미는 상황을 암시한다. 뭔가 꾸민다는 것은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래서 초조함이 조작을 유혹하곤 한다.
국민의당 제보 조작 사건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 당 수뇌부가 조작 사실을 몰랐다고 해도 검증을 소홀히 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듯. 눈앞의 승리에 눈이 멀어 곧 닥칠 위험을 깨닫지 못했으니 영락없는 당랑박선(螳螂搏蟬) 형국이다. 공명심과 초조함이 빚은 조작극이 어떻게 막을 내릴지 아직은 속단하기 이르다. 하지만 지난달 30일 발표된 한국갤럽의 정당 지지율 조사에서 국민의당이 꼴찌를 기록한 것만 봐도 이번 사건의 후폭풍을 짐작할 만하다.
만약 지난 대선에서 안철수 후보가 승리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모르긴 해도 제보 조작 사건은 아직 동굴에서 잠자고 있지 않을까 싶다. 승리한 권력이 스스로 치부를 까발릴 턱이 없고, 그렇다고 선거의 일등공신이 잔칫상 앞에서 “사실은 조작극이오”하며 양심선언을 하기는 어려울 터.
돌이켜 보면 지난 대선에서 이런 조작에 흔들리지 않은 유권자들의 분별력이 놀라울 따름이다.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는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하기야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는 노랫말에 익숙해진 국민들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