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나이 조국 한국과의 인연에서 계속
해외연수 온 기자들 중 골프꾼들은 오전 강의가 끝나면 나의 연구실이나 강의실 복도, 저널리즘 스쿨 앞에 있는 맥주집 '하이델베르크'나 패스트푸드점 '웬디스' 등에서 꾼들을 불러 모은 뒤 골프장으로 직행하곤 했습니다.
전체 인구가 10만 명쯤 되는 이곳 콜롬비아 시에는 골프장이 여섯 군데가 있습니다. 이들은 미주리 대학이 소유하고 있는 18홀의 알 거스틴 코스, 콜롬비아 컨트리 클럽과 미드 미주리 컨트리 클럽 등 2개의 사설 컨트리 클럽, 스티븐스 대학의 9홀 코스, 콜롬비아 시에서 운영하는 2개의 퍼블릭 코스 등입니다. 이들 여섯 군데 중에 우리들이 자주 가는 곳은 콜롬비아 시의 퍼블릭 코스였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레이크 오브 우즈(Lake of Woods) 코스이고, 또 하나는 니켈(Nickell) 코스이며, 시에서 시민의 건강을 위하여 운영하는 이 두 코스는 우선 멤버십이 저렴해서 요즘에도 연회비가 300불 정도입니다(2017년 기준으로는 이보다 좀더 올랐을 듯). 이 돈만 내면 일 년 내내 한 푼도 따로 내지 않고 언제나 가고 싶을 때에 가서 골프를 즐길 수가 있으니, 콜럼비아야말로 진실로 '골프 천국'이라 할 만 합니다.
특히 레이크 오브 우즈 코스는 본래 컨트리 클럽이었던 곳을 시청이 1970년대 말에 사들여서 운영하는 코스입니다. 코스가 비교적 어렵고, 레이아웃이 재미있으며, 도심에서 약 15분 정도 자동차로 떨어져 있어서 가깝고, 비교적 붐비지도 않아서 우리들이 자주 찾아 골프를 즐기는 곳입니다. 니켈 코스는 시내에서 5분도 안 걸리는 도심 근처 숲 속에 있기 때문에 근접성이 아주 편리하여 은퇴한 노인들이나 여자들이 항상 붐비는 코스입니다. 이곳은 코스도 비교적 짧고 쉬워서 아침에도 치고 점심 먹고도 또 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최근 해외연수 오는 언론인들 중에는 서울에서 골프를 쳤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 많이 있으나 1980년대에는 서울서 골프를 치다 온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개 이곳에 와서야 처음 골프를 배우고 ‘머리를 올리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곳에 연수 온 언론인들의 골프에 얽힌 일화가 많습니다. 그 중 일부는 미주리대에 연수 오는 후배 연수 언론인들 사이에 ‘전설’처럼 오래 인구에 회자됐습니다.
동아일보의 김차웅 기자가 이곳에 연수온 것은 1982년이었으며, 당시 1982년 가을 저널리즘 스쿨에는 원로 언론인 이인형, 이용승, 은종일과 고려대 임상원 원로 교수 등을 비롯해서 최동우, 김종남, 장정행 등이 연수 중이었습니다. 이들은 바쁜 학교 공부 중에도 주말이 되면 즐거운 모임을 많이 가졌습니다. 당시 김차웅 기자는 30대 중반으로 신문사 입사 후 줄곧 사회부기자로만 일해 오다가 동아일보 식구 중에서는 처음으로 미주리 저널리즘 스쿨로 연수를 왔습니다. 김 기자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이곳에 연수 와서 처음에는 골프에 대해 무관심했습니다.
그는 주위에서 골프를 시작하라고 권유하면 강한 경상도 억양으로 “기자가 무슨 골프를 칩니꺼. 나는 안할랍니더”라고 완강하게 거절하곤 했는데, 나중에 그는 당시 자신이 “골프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고, 골프에 대해 지독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고 웃으면서 털어놓았습니다. 골프장이라고는 한 번도 가본 일도 없고 또 골프가 어떤 스포츠인지도 전혀 모른 채 그저 골프는 나쁜 것이며 특히 기자는 모름지기 골프를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골프가 상당히 대중화된 지금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입니다.
그러던 김 기자가 1년 연수의 절반 이상을 골프를 치지 않은 채 ‘허송세월한 뒤’에야 어느 날 드디어 골프장에 나갔습니다.
레인지에서의 연습 과정도 거치지 않은 채 이날 무작정 컬럼비아 거주 교포인 임승규 씨 일행을 따라 니켈 코스로 나간 김 기자는 임 씨가 가르쳐 주는 대로 온 힘을 다해 채를 휘둘렀으나 공이 제대로 맞을 리가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날아오는 테니스공도 멋지게 쳐 날리는데 가만히 있는 골프공쯤이야’ 하는 생각으로 호기 좋게 7번 아이언을 휘둘렀으나 그때마다 골프채로 땅만 파거나 헛치기를 해댔습니다.
처음에는 ‘이것 봐라’ 하는 생각에서 기를 쓰고 채를 휘둘렀으나, 몇 홀을 돌면서 점차 화도 나고 창피하기도 해서 나중에는 아예 공을 칠 엄두도 내지 않고 시무룩한 표정으로 일행 뒤를 따라 걷기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7번 홀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김 기자는 다른 사람들이 그린 위에서 퍼팅을 하고 있는 동안, 그린 주변에 사과 상자만한 크기의 덫이 놓여 있었고, 그 속에 귀엽게 생긴 웬 짐승 한 마리가 잡혀있는 것을 보게 됐습니다. 나중에 김 기자가 털어놓은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그것이 무슨 짐승인지를 모르고 그저 호기심에서 가까이 갔다는 것입니다. 김 기자가 덫으로 한발한발 다가서자, 덫 안에 갇혀있던 그 짐승이 잔뜩 긴장하더니 몸을 돌려 엉덩이를 슬슬 김 기자를 향해 돌리고는 꼬리를 쳐들더라는 것이다. 김 기자가 ‘저 놈이 왜 나를 향해 엉덩이를 쳐들지?’ 하고 의아하게만 생각하는 순간, 그 짐승의 엉덩이에서 누런 액체가 물총처럼 직사포로 김 기자 전신을 향해 날아왔습니다.
‘어어’ 하는 순간 참기 어려운 냄새가 코를 찔렀고, 지독하기 짝이 없는 냄새는 금방 사방으로 번져갔습니다. 갑작스런 짐승의 독물 기습에 정신이 혼미해진 김 기자가 자신이 쓰고 있던 안경알에서 누런 독물이 줄줄 흘러 내리는 것을 발견한 것은 잠시 뒤였습니다. 그 짐승은 바로 스컹크였습니다. 골프장 측에서 스컹크나 두더지 등이 그린을 파헤치는 것을 막기 위해 설치해 둔 덫에 밤사이에 스컹크가 잡힌 것인데, ‘서울 촌사람’인 김 기자는 그때까지 스컹크를 말로만 들었지 살아있는 스컹크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도 역시 스컹크를 동물원 아닌 곳에서 직접 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김 기자의 첫 골프장 나들이, 즉 ‘머리 올리기’는 이렇게 해서 완전히 망치고 말았으며, 그 자리에 있었던 임 씨 등 일행은 퍼팅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도중에 골프를 중단해야 했습니다.
이 스컹크 사건으로 김 기자는 자신이 골프와는 영 인연이 없다는 미신 비슷한 생각을 갖게 되었으며, 그는 이 사건을 ‘분수에 맞지 않게 골프를 해 보겠다고 나선 나에게 신이 내린 경고’로 받아 들였던 것입니다. 평생 처음 나가본 골프장에서 어이없게 스컹크로터 독물 세례를 받았으니 그가 얼마나 의기소침해졌는지는 말을 안해도 짐작이 갈 것입니다.
그날 이후 골프를 배워보겠다는 마음이 모두 달아났었던 김 기자가 심기일전해서 다시 골프장에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약 한 달 뒤였습니다.
김 기자는 그때부터 나날이 놀라운 실력 향상을 보여주었고, 골프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불과 4개월만에 핸디 18의 실력을 보이면서 기라성 같은 골프 선배들의 기를 죽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당시 김 기자와 같은 시기에 연수 온 분들보다 휠씬 늦게 골프를 배운 김 기자가 이들보다 '로우 핸디'가 된 것입니다.
당시 미주리대학에 재직 중이던 조순승 교수는 그때 핸디 20 정도의 실력이었는데, 김 기자가 자신보다 핸디를 낮게 놓게되자 김 기자를 만날 때마다 "어이, 김 신동"이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이때부터 김 기자는 '김 신동'이란 별명을 얻었습니다. ‘신동’이 아니고선 골프채를 잡은 지 4개월 만에 핸디 18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으나. 이에 대해 김 기자는 “스컹크에게 쏘인 덕분인 모양”이라고 답하곤 해서 주윗사람들을 웃기곤 했습니다.
그후 김 기자는 술자리에서 스컹크 사건이 화제가 될 때마다 “우리나라 5000만 인구 중에서 살아있는 스컹크를 직접 눈으로 본 사람이 있으면 나와 봐. 더더구나 스컹크에 쏘여본 일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라고 자랑스럽게 큰소리를 쳐서 또 한 번 좌중을 즐겁게 했습니다.
골프와 관련된 또 하나의 일화는 레이크 오브 우즈 코스에서 벌여졌던 전설입니다. 그것은 당시 연합통신에서 국장으로 있던 은종일 씨에 관한 것인데, 은 국장은 장신 거구에다 힘이 좋아 체력으로 골프를 치면 아무도 당할 수 없다는 것이 공통의견이었습니다. 그러나 골프가 어디 힘만으로 되는 것이겠습니까? 은 국장의 그 신체로부터 나오는 힘과 패기는 공을 치고 난 뒤 허망하게 허물어지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은 국장, 경향신문의 편집국장이던 이용승 국장, 그리고 내가 함께 골프장에 갔습니다. 은 국장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패기로 힘껏 공을 쳤지만 공은 그날따라 유난스레 은 국장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가지를 않고 엄뚱한 데로만 자꾸 날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은 국장의 번번한 실패를 '맞수' 이 국장이 놓칠 리가 없없었습니다. 이 국장은 은국장이 티샷을 치려고 할 때마다 빙긋이 웃으며 한 마디씩 하기 시작했습니다.
“허 참, 은 국장님. 볼이 자꾸 '롬빠'가 되네요?”
롬빠? 그건 처음 듣는 말이었습니다, 이 국장의 해설인 즉, '로마를 보고 쳤는데 공은 빠리로 갔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말이 하도 웃겨서 '정신을 집중할 수 없어' 그날은 더더욱 자꾸 롬빠를 치고 말았다는 것이 은 국장의 변명이었습니다. 지금도 우리들은 만날 때마다 은 국장의 롬빠 사건을 빠짐없이 즐거운 화제 거리로 떠올리곤 합니다.
은 국장의 골프 솜씨가 이제는 눈에 띄게 향상되어 롬빠를 치는 일이 거의 없음에도 은 국장은 언제나 롬빠로 불리고마는 '불명예'를 아직도 즐거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9)-6 나의 조국 한국과의 인연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