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북한의 잇따른 핵 도발에 국제사회가 시끌시끌하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후 만도 9차례나 탄도미사일을 쏘아대더니 지난 3일엔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에서 지하 핵실험을 감행했다. 여섯 번째 실험이다. 핵실험이 일으킨 인공지진의 규모는 5.7, 폭발력은 100kt. 히로시마 원폭의 7배 수준이라고 한다.
북한이 이처럼 거침없는 핵 도발을 계속하자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분노와 비난도 한층 거세어졌다. 이미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이 미국을 계속해서 위협한다면 ‘화염과 분노’(fire and fury)로 공격할 것”이라며 “미군은 전쟁 준비가 돼 있다(locked and loaded)” 등의 강도 높은 경고성 발언을 쏟아냈던 미국은 군사 옵션까지 테이블에 올려놓고 있다는 보도다. ‘세컨더리 보이콧’ 카드까지 만지작거리고도 있다.
스티브 므누신 미국 재무장관은 4일 북한과의 경제적 단절을 위해 새로운 대북 제재안을 내놓겠다면서 “북한과 무역하거나 사업 거래를 하는 누구도 우리와 무역 또는 사업 거래를 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포괄적인 제재안을 성안해 대통령에게 전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불법 여부를 가리지 않고, 북한과 정상적 무역 거래를 하는 제3국의 기업과 금융기관, 개인까지도 무차별적으로 제재하는 ‘세컨더리 보이콧‘을 단행하겠다는 예고로 풀이된다. 그런데 ‘세컨더리 보이콧’은 사실상 중국을 겨냥한 조처다. 북한 대외 교역의 90%가 중국과 이뤄지기 때문이다.
현 단계에서 미국이 중국에 가장 강력히 요구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원유 수출 중단’이다. 만약 중국이 북한으로 가는 원유 파이프라인을 끊는다면 북한 경제에 즉각적이고 상당한 타격을 주게 될 것이란 게 미국의 예측이다. 동아일보의 5일자 보도에 따르면, 중국은 2013년까지 북한에 매년 50만 톤 이상의 원유를 수출했다. 현재 중국의 해관총서(세관)는 대북 원유 수출량을 밝히지 않고 있지만 중국은 단둥(丹東)의 송유관을 통해 매년 약 50만 톤의 원유를 무상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50만 톤 규모의 유상 제공 역시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관측된다. 북한이 매년 필요한 원유량 110만∼120만 톤의 90% 이상을 중국이 제공하고 있는 것. 중국에 비해 물량은 미미하지만 러시아도 북한에 원유를 수출하고 있다. 올 1~4월 러시아의 대북 원유 수출액은 약 230만 달러(약 26억 4615만 원)를 기록, 지난해 같은 기간 74만 달러(약 8억 5000만 원)보다 2배 이상 증가했다고 한다.
미국은 중국이 대북 원유 금수 조치를 취하면 북한이 손을 들 수도 있을 것으로 보지만 문제가 그리 간단치 않다. 과연 중국이 미국의 압력에 굴해 수출을 중단할 것인지에 대해선 회의적인 시각이 많기 때문이다. 설사 실행에 옮긴다 해도 전면 중단이 아니라 양을 줄이는 수준일 것으로 보는 거다.
북한의 잇단 핵 도발에 중국 역시 질색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중국이 북한의 숨통을 아주 죄지 않을 것이란 게 일반적 관측이다. 동북아 맹주 노릇을 원하는 중국의 입장에선 북한의 궤멸을 바라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중국은 이 판국에까지 왜 그렇게 북한을 감싸고도는 것일까. 그걸 이해하는 것 역시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북한과 중국 사이엔 수십 년에 걸친 혈맹 관계가 맺어져 있다. 역사적, 지정학적, 경제적, 군사전략적 고리가 단단히 연결돼 있는 거다. 다르게 말하면, 순망치한(脣亡齒寒),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린 관계인 거다.
2.
지난 7월 6일 독일 베를린에서 한·중 정상회담이 열렸다. 그때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미묘한 말을 내뱉었다. “중국과 북한은 선혈로 응고된(鮮血凝成的) 관계다.” 이 말은 우리나라엔 혈맹(血盟)으로 통역됐다. 중국은 공식적으로 ‘혈맹’이란 단어를 쓰지 않는다고 한다. 청와대는 ‘통역 실수’라고 했지만 시 주석의 언급으로 북-중간의 오랜 역사적 결속을 다시 떠올리게 했던 건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북한과 중국이 이른바 ‘선혈로 응고된 관계’가 된 건 6·25 때 중국의 참전 이후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인연은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의 인민해방군의 창건기념일은 공산당이 처음으로 국민당에 무력으로 대응했던 장시(江西)성 난창(南昌)봉기일인 1927년 8월 1일이다. 그런데 이미 그 무렵부터 조선 출신 공산주의자들이 중국 인민해방군에 소속돼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그리고 일본과의 전쟁에 참가했던 것.
<아리랑>이란 책이 있다. 80년대 대학생들의 필독서의 하나였던 책이다. 중국에서 항일전을 벌이던 한국인 혁명가 김산(본명 장지락)이 1937년 중국 서북부 옌안(延安)에서 미국인 기자 님 웨일스에게 구술한 내용이 바탕이 된 이 책엔 당시 조선인들이 중국 공산당의 무장봉기에 참가했던 사정이 자세히 소개돼 있다. 이에 따르면, 조선인들은 국공합작 시절이던 1926년 7월 국민당이 군벌을 타도하기 위해 벌였던 북벌전쟁에 의용병으로 참전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조선인은 장파쿠이(張發奎)의 철기군에 가담했는데, 난창봉기의 핵심도 바로 이 철기군이었다고. 그해 12월 광저우 봉기 당시에도 장파쿠이가 이끌었던 2000여 명의 교도단 중 80명이 조선인이었다. 그러니 북·중 혈맹의 시작은 1950년이 아니라 1926년이었던 셈이다.
중국 공산당이 장제스의 국민당 군에 쫒겨 1934년 11월부터 35년 6월까지 서북부 산시성 옌안으로 이동하는 대장정 당시에도 양림·김병희(가명 무정)·최정무 등 수많은 조선인이 중국 공산당에서 활동했다. 무정은 후일 팔로군 포병사령관을 지냈고 해방 후 북한으로 돌아가 인민군 창설에 기여했고 6·25 당시 평양방어사령관을 지낸 인물이다.
그 뿐이 아니다. 동북항일연군 소속의 김일성을 필두로 최현(나중에 북한 부수상)·김책(부수상 겸 산업상)·강건(인민군 참모장)·최용진(북한 제1부수상)·김일(본명 박덕산, 북한 제1부수상) 등은 해방 후인 1948년 수립된 북한 정권의 핵심 요직을 맡게 된다. 이들은 일본군의 공세가 거세지자 1942년 국경을 넘어 소련군 88저격여단에서 근무하다 해방 후 소련군을 따라 귀국해 공산 정권을 수립했다. 중국 공산당 중앙당사연구실이 2014년 공산당 창당 90주년을 맞아 펴낸 <중국공산당역사>는 “조선의 공산주의자 김일성, 최용건, 김책 등은 중국의 동지들과 일치단결해 같이 싸우면서 중국 인민과 조선 인민의 해방을 위해 중차대한 기여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시진핑 주석이 말했던 ‘선혈’이란 단어의 원 저작권자는 마오쩌둥(毛澤東)이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웠을 무렵 마오는 이렇게 말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오성홍기에는 조선 공산주의자들과 인민의 선혈이 스며 있다.” 마오가 이렇게 말한 데는 이유가 있다.
1945년 8월 15일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일본 관동군이 패주했다. 만주 동북 3성를 점령한 소련군이 1946년 중반 철수하면서 이 지역에서 국-공 내전이 본격화됐다. 국민당의 장제스 부대가 선제공격을 하자 마오는 김일성에게 긴급 지원을 요청한다. 당시 김일성의 입장에서도 군대를 조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기가 절실했다. 그런데도 김일성은 일본군이 남기고 간 10만 정의 무기와 탄약을 모택동에 넘겨주었다. 포병연대와 공병부대도 보내줬다. 그러니 북한이 중국에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은 줄 알지만 사실은 북한도 중국에 큰소리칠 이유가 있었던 것. 중국이 6·25 때 군대를 보낸 것도 이런 인연이 얽혔기 때문이겠다.
6·25 전쟁 이후에도 마오쩌둥과 김일성의 관계는 돈독했다. 중국과 소련군은 전쟁 후에도 북한에 오래 주둔했다. 전쟁 후에도 외국군이 남아 감시 아닌 감시를 하는 것은 김일성의 입장에선 여러 모로 불편했다. 소련군이 북한 땅에 남아 미적거릴 때 마오쩌둥은 40만 명의 중국군을 철수했다. 결과적으로 마오쩌둥이 김일성이 전후 권력 기반을 잡고 개인 우상화를 할 수 있는 여지를 준 것. 김일성 역시 1972년 ‘핑퐁외교’로 중국이 국제무대로 나오기 전엔 중국의 든든한 우방국 노릇을 철저히 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놓고 보면 북한과 중국의 관계는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뿌리가 깊다. 중국이 북한에 대한 전면적 제재를 선뜻 하지 못하는 것은, 북한 정권이 궤멸해 남한 주도로 통일이 이뤄지면 미국의 영향력이 한반도 전역에 미치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직접 미국과 군사적 대치를 해야 하는 전략적인 부담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북-중의 오랜 역사적 인연이 어쩌면 더 본질적인 이유라 해야 할 거다.
3.
그렇다고 중국과 북한의 사이가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중화주의로 무장한 중국인에겐 한국에 대한 뿌리 깊은 ‘속국 의식’이 있다.
1882년 일본식 별기군과의 차별이 원인이 돼 구식 군대가 임오군란(壬午軍亂)을 일으키고 궁궐을 침입한 군인에 쫒긴 명성황후가 충주로 잠적하자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잡았다. 그런데, 청군이 조선에 침입해 흥선대원군을 체포하고 명성황후에게 다시 권력을 물려주었다. 흥선대원군은 청군의 포로가 돼 텐진에서 오래 귀양살이를 해야 했다. 남의 나라를 거리낌 없이 침입해 왕의 생부를 멋대로 잡아간 것은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란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19세기 말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중국은 한반도에서 철수했다. 20세기 전반기 중국을 놓고 각축했던 마오쩌둥과 장제스는 한반도에 대한 시각은 일치했다. 한반도에서 일본에 밀려 중국의 종주권 상실을 개탄한 그들은 중국의 영향력 회복을 열망했다. 그리고 그들의 유지는 시진핑으로까지 넘겨졌다. 지난 4월 트럼프와 정상회담을 했을 때 시진핑이 “한국은 사실 중국의 일부였다”고 발언한 것에 우리는 분노했지만 이런 역사적 맥락을 따지고 보면 시진핑의 발언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쉽게 말해 한국은 오랜 세월 우리의 속국이고 우리가 한반도에 침 발라 놓은지 오래라고 미국에 연고권 주장을 한 것.
1972년 미중 수교가 이뤄지고 이어서 덩샤오핑(鄧小平)이 집권해 ‘개혁개방 정책’이 실시되면서 중국에게 차지하는 북한의 비중이 급격히 축소된 것이 사실이다. 그 와중에서 중국은 북한을 홀대하기 시작했고, 1992년 한중수교가 맺어진 후 중국과 한국의 교역이 크게 늘어나자 북한의 소외감도 깊어지기 시작한 것. 2002년 김정일이 낙후된 북한 경제를 일으켜 세우겠다고 김정일이 중국식 모델을 차용해 야심차게 시작한 ‘신의주 특구’ 사업도 중국의 방해에 부닥쳐 좌절하자 중국에 대한 북한의 의구심도 깊어졌다.
당시 김정일로선 중국이 북한의 자력갱생을 도와주기보다는 북한 정권이 무너지지 않을 만큼 링거 주사나 놓아줌으로써 자신의 목줄을 쥐고 흔들려는 것으로 보였을 법하다. 쉽게 말해 중국은 북한을 현대판 속국으로 대했단 거다. 소련과 동구권도 망한 마당에 중국까지 이러니 북한의 입장에선 ‘세상에 믿을 놈 없다’는 생각을 가졌을 법하다. 옛날 6·25 때처럼 중국이 자신들을 전면적으로 도와줄 것이라고 믿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중국에 대한 배신감이 김정일·김정은이 대를 이어 핵개발에 집착하게 만든 가장 큰 이유였을 터.
4.
만약 중국이 북한에 대한 원유 공급을 전면 중단하면 북한에 어떤 일이 생길까. 우선, 휘발유, 경유, 중유 등 석유 제품의 공급이 중단됨으로써 운송을 비롯해 경제 전반이 마비될 거다. 당연히 북한 사회 전반이 혼란을 겪게 되고 인민의 불만이 치솟게 된다. 더 큰 문제는 탱크, 군용트럭, 군용기, 군함 등의 운용이 중단될 거다. 북한도 만약의 사태를 예상해 원유를 어느 정도 비축해 뒀겠지만 그렇게 많지는 않을 거다. 원유공급이 전면 중단되면 북한은 일주일 만에 혼란을 겪을 것이란 어떤 전문가의 예측도 있다.
그럼에도 중국이 원유 공급을 중단하지 않는 건, 만약 북한에 극심한 혼란이 발생하면 북한 난민들이 대거 중국으로 넘어올 것이란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북한 정권이 무너지면 미국이 곧바로 손을 뻗칠 것이란 전략적 우려도 물론 크지만. 그러니 중국은 원유 공급을 잠깐, 그리고 부분적으로 줄여서 북한을 길들이려고는 하더라도 북한의 숨통을 아예 죄어 들려고는 하지 않을 거란 거다.
2003년 2월 중국이 대북한 송유관 밸브를 3일간 닫아 건 적이 있다. 2002년 10월 북한이 2차 북핵 위기를 일으킨 후 중국을 배제한 채 미국 부시 행정부와 양자회담을 고집했을 때다. 당시 부시 행정부는 북한과 양자 대면하는 것을 꺼려 중국, 러시아, 일본, 한국 등과 다자협상을 하자고 했지만 북한이 끝내 미국과의 양자협상을 고집했다. 대북한 영향력을 잃고 싶지 않았던 중국이 원유 금수 조치를 내렸다. 북한은 사흘 만에 손을 들었다. 4월 미중북 3자회담이 열렸고 그 4개월 후 6자회담이 열렸던 거다.
어쨌거나 중국이 이 시점에서 대북 송유밸브를 완전히 걸어 잠그리라고 믿기는 어렵다. 그리고 설마 중국이 그렇게야 할 수 없을 것이란 게 바로 김정은의 ‘비빌 언덕’인 셈.
동아시아의 맹주를 노리는 중국, 그리고 동아시아에서의 패권을 유지하려는 미국 사이에서 ‘북핵’ 문제를 놓고 지금 한판 힘겨룸이 이뤄지고 있다. 뜯어보면, 지금 사태가 반드시 중국에 불리한 것만도 아니다. 북한의 도발이 계속되면, 한-미-일 삼각동맹이 강화돼 북한을 강하게 압박한다. 그리고 각종 군사적 조치가 이행된다. 중국은 그걸 명분 삼아 자국의 군사적 증강을 합리화할 구실을 얻게 되는 거다. 지금 중국이 한국에서의 사드 배치를 명분 삼아 군사력을 증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 않나.
하지만, 만약 북한의 핵개발이 완료되면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도 현저히 감퇴할 것이다. 북한은 더는 중국의 말을 듣지 않으려 할 거다. 나아가, 북핵을 명분으로 미국의 핵무기가 남한에 배치되면 중국으로선 정수리에 화로를 뒤집어 쓴 형국이 될 거다.
북한의 핵보유를 견제한다, 그러나 북한 정권이 망하게 하지는 않는다. 이 두 가지 상충된 목표를 관철해야 하는 것에 중국의 대한반도 정책의 딜레마가 있다. 미국도 마찬가지. 북한의 핵 보유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나 북한에 대한 선제 군사공격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래서 미국은 중국에게 계속 압력을 가해 북한을 견제하려는 ‘손 안대고 코 푸는 전략’을 채택한 것이고, 중국은 또 그런 미국의 속내를 알기 때문에 미적거리고 있는 것 아니겠나.
북핵 문제를 둘러 싼 강대국들의 패권 다툼 속에 한국만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 격이 되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지금 북핵은 춤춘다. 제재와 협상론이 엇갈리는 이 와중에 북한과 미국, 중국이 또 어떤 뒤통수를 칠지 우리 정부가 정신 바짝 차려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