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아메리카 퍼스트’에 갈피 못 잡는 한국 정치권...전술핵 요구하다 한미FTA 개정 부메랑, ‘코리아 퍼스트’는 언제쯤?
편집위원 이처문
승인 2017.10.16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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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위원 이처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우는 ‘아메리카 퍼스트(America First)’ 외교정책에 한국 정치권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당장이라도 북한을 타격할 태세를 보이던 트럼프 대통령이 엊그제는 북한을 향해 “협상의 문이 열려있다”고 밝혔다. 모든 군사적 옵션이 준비됐다고 강조하면서도 대화의 여지를 남긴 것이다.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에게 핀잔까지 주면서 ‘대화 무용론’을 이어가던 그간의 기조와는 사뭇 다르다.
만약 문재인 대통령이 ‘대화’라는 말을 끄집어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모르긴 해도 우리 정치권에선 “순진한 대북 유화정책”이라는 비난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북한과의 대화 가능성’도 트럼프가 이야기하면 ‘전략적 판단’으로 해석되기 때문인지 한국에서는 이렇다 할 반발이 없다.
어쨌거나 트럼프는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워 현란한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어제는 공격 카드를 꺼냈다가, 오늘은 슬쩍 대화 카드를 보여준다. 하지만 국익이 걸린 북핵 문제마저 정쟁거리로 삼는 우리 정치권은 우물 안에서 ‘네 탓 공방’만 벌이고 있다. 우리가 미국 우선주의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미국의 입장만 쫓아다니다가는 낭패를 당하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든다. 이미 전술핵 재배치를 요구하는 한국 야당의 주장에 미국은 보란 듯이 한미FTA 개정 요구로 응답했다. 한국의 안보 불안감을 이용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사실 ‘아메리카 퍼스트’는 미국의 국익과 안보를 최우선으로 챙긴다는 지극히 당연한 국가 전략이다. 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주변국의 눈길은 곱지 않다. 국익을 취하는 과정에도 지켜야 할 법도가 있기 때문. 미국이 유네스코 탈퇴를 선언한 것이나, 이란과의 핵 합의를 파기하려는 시도가 비판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실 트럼프 대통령이 내세운 ‘아메리카 퍼스트’는 원래 고립주의를 상징했다. 국제 문제에 관여하지 않고 오로지 미국의 이익만 지킨다는 이데올로기다. 반면 개입주의는 국제 문제에 적극 관여해야 미국의 이익을 보장할 수 있다는 신념이다.
미국에서 고립주의와 개입주의가 팽팽한 대결을 펼친 사례는 2차 세계대전으로 거슬러간다. 미국이 1차 세계대전에 개입하면서 큰 비용을 치르는 장면을 지켜보았던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당초 고립주의 노선을 지켰다. 하지만 1930년대 들어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의 침략이 거세지자, 루즈벨트는 미국 외교의 전통적 노선인 개입주의로 돌아선다. 세계 평화와 자유를 위한 투쟁에서 미국이 앞장서야 한다는 신념이 되살아난 것이다. 이런 기조에서 미국은 1941년 가을 무렵 군수 물자를 영국에 지원하고, 독일 해군과 선전포고 없이 싸웠다. 일본에 타격을 입히려고 석유 수출을 금지했다.
하지만 루즈벨트는 국내에서 고립주의자들의 거센 저항에 직면했다. 당시 루즈벨트에게 가장 적대적이었던 집단이 바로 1940년 9월 결성된 ‘아메리카 퍼스트(America First)’라는 단체였다. 미국 중서부와 비 영국계 미국인들의 지지를 받은 이 단체의 대변인은 찰스 린드버그. 1927년 뉴욕에서 파리까지 대서양 횡단 비행에 성공해 유명세를 떨쳤던 인물이다. 그는 강력한 미국, 강인한 국민성, 빚 없는 나라를 후손에게 물려주려면 무엇보다 먼저 미국 내부의 사회갈등과 인종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루즈벨트의 개입주의야말로 외국의 그 어떤 위협보다 미국 민주주의에 치명적 위협을 가하게 된다는 게 린드버그의 시각이었다.
고립주의는 전쟁을 반대했다. 전쟁으로 인한 전시 동원 체제는 필연적으로 미국인의 목숨을 앗아가고, 정치적 경제적 자유를 파괴하는 것은 물론 막대한 국가 부채를 후손에게 떠넘기는 죄악이라는 것이다. 린드버그는 “미국의 올바른 선택은 전쟁에 가담하지 않고 백인을 보호할 성벽을 쌓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1차 세계대전의 경험에서 보듯 미국의 자유는 해외 전쟁에 참여해서가 아니라 미국 국내 정치를 개혁함으로써 신장될 수 있다는 게 린드버그의 믿음이었다.
반면 루즈벨트의 지원 아래에 창립된 ‘동맹국 지원을 통해 미국을 수호하는 위원회(The Committee to Defend America by Aiding the Allies)’는 미국 전역에서 확보한 회원들을 중심으로 참전의 당위성을 거들었다. ‘센추리 그룹(Century Group)’도 루즈벨트의 개입주의를 지지했다. 1940년 6월 동부지역 엘리트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이 단체는 미국의 신속한 선전포고를 촉구했다. 대서양이 더는 미국의 안전을 보장하는 완충지대가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유럽에서 힘의 균형을 유지해야 미국의 안보도 지킬 수 있다는 논리다.
그러나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고립주의는 설자리를 잃고 만다. 진주만 공습이후 루즈벨트는 “미국이 국제사회를 휩쓰는 야만적 행위의 원천을 철저하고 영원하게 근절시켜야 한다”며 참전을 선언했다. 이후 미국의 개입주의는 오늘날까지 맥을 이어오고 있다. 트럼프도 언론 인터뷰에서 ‘아메리카 퍼스트’는 고립주의가 아니라고 밝힌 바 있다. 고립주의의 상징이었던 ‘아메리카 퍼스트’가 트럼프 시대에 와서 한 걸음 진화한 셈이다.
마이클 헌트는 <이데올로기와 미국 외교>에서 미국이 독립한 이후 외교정책에서 변하지 않은 세 가지 이데올로기를 다음과 같이 진단했다. ‘미국 예외주의’와 ‘인종주의’, 그리고 ‘반급진주의’다. 헌트는 “미국은 늘 위대하다는 국민적 자의식과 인종 간에는 서열이 있다는 백인 우월주의, 그리고 급진주의와 혁명을 위험하게 바라보는 반급진주의가 미국의 외교를 이끌어왔다”고 주장했다. 예외주의는 미국이 다른 나라와는 다른 특별한 무엇이 있다는 의식이다. 트럼프의 ‘아메리카 퍼스트’ 역시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2017년 대한민국 정치권을 돌아보자. 미국은 오로지 미국의 이익을 우선하겠다고 외치는데도 정치권은 미국만 쳐다보고 있다. 일부 야당 지도자들은 미국에서 이미 사라진 전술핵을 한반도에 배치해야 한다고 우긴다. 트럼프는 한국에서 불거진 이런 안보 불안감을 간파한 듯 유유하게 한미FTA 개정을 들고 나왔다.
북핵 문제와 관련해 미국 트럼프 정부의 결정은 강공책이든 유화책이든 무조건 ‘전략적 선택’이라고 떠받는 일은 경계해야 하겠다. 아울러 우리 정부의 신중한 대북접근법을 앞뒤 가리지 않고 ‘유화책’이니 ‘코리아 패싱’으로 몰아붙이는 것 또한 우리의 입지만 좁힐 뿐이다. 더구나 국민들에게 안보 불안감을 자극하는 일은 이적행위나 다름없다. 자주국방을 외치면서도 전시작전권 환수에 대해서는 “국민이 불안해한다”고 반대하는 것도 지나친 대외 의존주의가 아닌가 싶다.
미국은 정권이 바뀌고 대통령과 외교라인이 바뀌어도 ‘아메리카 퍼스트’의 큰 줄기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우리도 언젠가 여야가 한 목소리로 ‘코리아 퍼스트’를 외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