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또 다른 특급 도발이 예상되던 노동당 창건 기념일(10일)은 다행스럽게도 별일 없이 무사히 지나갔다. 하지만 긴장의 끈은 놓칠 수 없다. 김정은이 중국의 공산당 전국대표대회가 열리는 오는 18일 전후해 북한이 깜짝쇼를 벌일 것이라는 관측, 연말까지 1~2회 ICBM급 미사일 실험을 할 것이라는 전망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트럼프는 “지금은 폭풍전야의 고요함”이라는 식으로 으시시한 분위기를 조성했고, 미국 국방장관과 육참총장 역시 잇달아 ‘(북한에 대한) 군사 옵션 준비’를 언급했다.
특히 마키 밀리 육참총장이 10일 기자회견에서 한 발언은 미국이 실제 전쟁 발발의 발화점에 바짝 다가선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군사 옵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북핵 위기를 손볼 시간도 무한정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엄청나게 어렵고 위험한 것이지만 미군이 군사행동에 나설 대비 태세는 완벽하게 갖췄다. 결정권자의 명령만 대기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의 이 말을 뒷받침하듯, 미국은 11일 죽음의 백조라는 B1-B 폭격기 2대를 또 한반도에 출격시켰다. 이제 한반도에서 지금 당장 전쟁의 포화가 터지더라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는 형국이 전개되고 있다.
트럼프와 김정은이 치킨 게임하듯 전개하고 있는 이런 수법을 두고 국제 정세 전문가들은 ‘미치광이 전략’이라 부른다. ‘미치광이 전략’은 정말 매드맨(madman) 같은 두 사람이 서로 “미치광이”라며 말 폭탄을 쏟아 부은 것에서 연유된 ‘빗대는 표현(innuendo)’이 아니다. 족보 있는, 엄연한 국제정치 이론 중 하나다. 상대방에게 자신을 예측 불가능하고 무모한 미치광이로 인식시켜 판을 유리한 쪽으로 이끈다는, 효율성 높은 전략이다.
미치광이 이론의 기원은 16세기 군사전략가 마키아벨리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저서 <전쟁론>에서 “주위 사람들에게 당신의 다음 행동에 대비할 수 없고 당신을 두려워하게끔 예측할 수 없는 언행을 보여라”라고 충고했다. 마키아벨리는 “적은 우리가 가공할 파괴력을 구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한 상태에서 우리가 미칠 수 있고, 예측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때 겁에 질려 우리의 요구에 순응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1960년대 초 미국의 사상가이자 역사학자인 아서 슐레진저 2세는 당시 케네디 대통령에게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정책 방향의 대전환을 주장하면서 이 ‘미치광이 전략’을 쓸 것을 진언했다. 그는 “중남미 국가들의 자결(自決)을 주장하는 카스트로 사상이 퍼져나간다면 세계 여러 곳에서 인간다운 삶의 기회를 요구하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자극할 수 있다”면서 “사과의 썩은 부분을 도려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슐레진저의 이 이론을 받아들여 케네디는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쿠바에 대한 전면 해상 봉쇄 작전을 전개해 당시 쿠바와 그 후원국인 소련의 굴복을 이끌어 낸다.
당시 국제 정세는 긴박했지만, 미국이 3차대전 발발의 위험성을 무릅쓰고 쿠바에 대한 군사적 행동을 전개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케네디는 이 예측을 깨고 “소련과의 핵전쟁도 불사하겠다”고 나왔다.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 후르시초프는 긴장이 최고조로 도달한 시점에 케네디의 최후통첩을 받고 핵미사일 선적 의심을 받던 화물선을 쿠바 인근 해역에서 다시 회항시킴로써 무릎을 꿇었다.
닉슨 행정부도 베트남 전쟁을 끝내기 위해 이 미치광이 전략을 썼다. 2003년 비밀 해제된 미국 외교 문서에 따르면 1970년 당시 닉슨은 미국이 베트남과 캄보디아에 핵무기를 사용할 것이라는 경고를 암암리에 퍼뜨렸고 실제 캄보디아에 대해 ‘비논리적’인 폭격을 감행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북 베트남 호지민 정부와 그 후견국 소련으로 하여금 파리 강화협상에 나오도록 하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당시 닉슨은 “강한 힘을 가진 것 만으로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깡다구가 있어야 하고 독기가 있어야 한다”고 인식했다. 실제 한 기자회견에서 그는 “소련인들이 나를 비이성적인 행동도 불사할 인물로 인식한다면 미국 국익을 위해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은 그의 당초 구상과는 달리 전개됐다. 1975년 남베트남 게릴라 베트콩의 구정 공세에 밀려 그해 4월 주월 미군이 전면 철수함으로써 미국은 국제 전쟁에서의 첫 패배라는 굴욕을 맛봤다.
미치광이 이론은 케네디와 닉슨 행정부 시절 즈음부터 미국 전략의 기본으로 채택된 것 같다. 최근 비밀 해제된 미국 전략사령부(USSTRACOM)의 1995년도 비밀 연구보고서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우리 자신을 너무 이성적이고 냉철한 머리를 가진 나라로 묘사하는 것은 자해행위다. 미국 정부의 핵심 인사들이 경우에 따라서는 통제불능일 수 있다고 비춰지는 것이 오히려 적국의 정책결정자들의 마음 속에 공포감과 의심을 조장,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어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9.11 테러에 대한 ‘맹목적 보복’의 일환으로 확증도 없이 이라크를 침공, 후세인을 제거한 부시에 이어 트럼프도 이 미치광이 전략에 충실한 인간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트럼프는 그 행동의 불가측성에 있어서 다른 전임 대통령들이 족탈불급(足脫敌不过)이다. 어디로 튈지 아무도 예측하기 힘들다. 미국 공화당에서조차 그의 럭비공 같은 행동과 발언에 거센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을 정도다. 그럼에도 트럼프의 비이성적, 비논리적 행동은 거침이 없다. 대국굴기(崛起)를 내세우는 중국도 미국의 대 북한 국제 제제 조치에 동조하고 있으니 트럼프는 자신의 미치광이 전략의 성공에 쾌재를 부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문제는 치킨게임의 상대자 김정은 역시 미치광이 전략에 몰두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처해진 상황과 형태는 다르다. 북한은 미국처럼 막강한 군사력을 배경에 깔고 위협하는 것이 아니다. 김정은이 미국 앞에서 휘두르고 있는 것은 말폭탄과 깡다구 뿐이다. 실제 미국과 전쟁이 발발하면 북한이 궤멸적 타격을 받을 뿐이라는 것을 그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김정은은 할테면 해보자라는 식으로 버티고 있다. 이른바 ‘벼랑끝 전술’인데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이라는 점에서 그 기조는 트럼프의 미치광이 전략과 같다.
이 두 ‘미치광이 전략’의 기세 싸움 속에서 중간에 낀 한국은 조마조마하다. 서로 상대방으로부터 최대한 양보를 얻어내기 위한 전략이라면 전략으로 그쳐야 하는데, 자칫 삐끗해서 마구잡이 열전으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미국과 북한 간에 전쟁이 발발하면 우리 한국 역시 엄청난 피해를 보게 된다는 것은 불문가지다. 핵폭탄이 아니더라도 장사포 등 북한의 화력이 서울을 향해 쏟아질 때 수백 만 명의 사상자가 날 수 있다는 추산이 나오고 있다.
뿐 만 아니다. 그동안 어렵사리 일궈 놓았던 우리의 경제 기반이 일거에 날아간다. 다시 한국전쟁 직후의 서울처럼 거리에 거지들이 넘쳐나고 먹을 것 마실 물이 없어 시민들이 거리를 헤메는 참담한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일부 보수 우익 사이트에선 미국이 북한 김정은 정권 제거에 나서주기를 촉구하는 글들이 올라오고 있다고 한다. 물론 그 심정은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베트남전, 이라크 전쟁 등에서 보듯 미국의 군사 작전이 구상대로 원활하게 전개되지 않을 때 한국인들이 받을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한반도에서 더 이상 전쟁이 일어나선 안된다. 더 이상 우리는 전쟁 참화의 비극을 맛볼 수 없다. 우리 중 누구 하나 다시 원시사회로 후퇴해 살아갈 각오를 하고 있겠는가. 이 점에서 북미간 전쟁을 고취하는 일부 보수파 인사들은 또다른 의미에서 미치광이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가 한강이 미국 신문에 트럼프의 미치광이 행동 자제를 촉구하는 글을 실었다고 한다. 여기서 그는 “한국에는 5000만 명의 선량한 시민이 살고 있고 70만 명의 유치원생이 오늘도 재롱을 피우고 있다. 이들에게 어느 누가 비극을 안겨줄 자격을 갖췄는가”라고 호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