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어제 한국을 방문했다. 미국 대통령으로선 25년 만의 국빈 방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도착한 후 곧바로 경기도 평택의 주한 미군 기지를 찾아 기다리고 있던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한미 양국 장병들과 점심을 먹고 합동 브리핑을 받았다. 오후엔 청와대를 방문해 공식 환영행사에 참석했고 문재인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저녁엔 공식 환영만찬에도 참석했다. 융숭한 대접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오늘은 현충원을 방문한 후 다음 여행지인 중국으로 간다.
문 대통령과의 회담에선 한미동맹 강화와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한미 공조, 동북아 평화와 안정 구축 방안 등이 논의됐다고 한다. 취임 직후부터 대북 제재의 강공 드라이브를 걸어 온 트럼프에 대해 문 대통령이 얼마나 적절히 제동을 걸면서 적정 제재 수위에 합의했는지 내막이 궁금하다. 한-미-일 삼각 공조에 대한 논의도 나왔을 것이다. ‘사드’ 추가 배치 문제도 테이블에 올랐을 수도 있을 것인데, 문 대통령은 대중 관계의 특수성을 들어 트럼프 대통령의 양해를 구했을 수도 있겠다.
물론, 트럼프는 한국의 안보를 떠맡는 데 대한 청구서를 역시 가져 왔다.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수십억 달러어치의 무기를 구매하기로 했다. 미국이 큰 적자를 보고 있다고 엄살을 떨어왔으니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개정하는 데도 원칙적으로 합의한 모양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우리는 미국의 안보 약속을 다짐받았고 북핵의 평화적 해결 원칙을 재확인했으며 중국과의 포괄적 관계 개선에 미국의 묵시적 양해를 얻었다. 미사일 개발에 있어서 탄두 중량 해제라는 부수입도 얻었다. 대신 우리는 무기를 사주고, 한미FTA 개정협상에 속도를 내기로 하는 등 돈으로 때운 셈이다. 역시 장사꾼 트럼프답다. 다시 말하면, 어음을 받고 현찰을 내준 격인데 그 대차대조표는 꼼꼼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하기야 트럼프의 실리외교는 일본에서도 이미 선보였던 터다. 2박 3일의 일본 방문에서 일본은 거국적(?)으로 트럼프 환대에 나섰다. 아베 총리는 골프광으로 알려진 트럼프와 함께 라운딩을 했는가 하면, 황금실로 ‘Donald & Shinzo: make alliace even greater (도널드와 신조: 동맹을 더욱 위대하게)’라고 자수를 놓은 흰색 모자를 선물했다. 트럼프와 아베는 서로 “도널드”, “신조” 하고 이름을 부르는 사이라고 한다. 저녁엔 양국 정상 부부가 도쿄의 유명 식당에서 와규 스테이크도 함께 먹었다. 아베는 트럼프에게 온갖 공을 들이면서 둘 사이의 ‘찰떡궁합’을 과시했다. 그러나 이벤트는 이벤트, 국익은 국익. 부동산 투자로 잔뼈가 굵은 ‘장사꾼’ 트럼프는 결국 일본에 청구서를 내밀었다. 미국의 대일 무역적자가 연간 700억 달러(78조 원)이나 된다면서 미국산 첨단 무기를 사라고 요구했던 것.
그러니 ‘밀당 흥정’에 능한 이 의뭉한 미국 장사꾼이 문 대통령에게 청구서를 내밀어 사인하라고 요구했고 문 대통령은 일단 돈주머니를 끌렀다. 트럼프 방문 전부터 일정을 비워놓고 ‘시험공부’에 들어간 문 대통령이 써낸 답안이 과연 정답인지는 두고 볼 일. 어쨌거나, 트럼프 방한에 따른 손익결산서는 다시 찬찬히 주판알을 튕겨 보기로 하고 차제에 한미 정상외교의 역사를 되짚어 보기로 하자.
2.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한국과 미국 대통령 사이의 정상회담은 이번 문재인-트럼프의 서울 회동을 포함해 모두 64차례라고 한다. 지난 시절, 한국 외교의 사활은 대미 관계에 달려 있었으니, 64번에 이르는 그 만남의 갈피에 숨은 애환과 눈물, 에피소드는 또 얼마나 많았겠는가.
우선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겨울, 미국에서 진객이 서울로 왔다. 당시 미국 대통령 당선자 신분이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가 그 사람이다. 교착상태에 놓여 있던 한국전쟁의 종식을 공약으로 내세워 당선된 아이젠하워는 ‘북진 통일’을 외치던 이승만 대통령과의 만남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전쟁 중의 신생국이던 한국은 서울시청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대형 초상화를 내걸고 서울 시내에 꽃전차를 운행하는가 하면, 기념우표와 기념 담배를 만들 정도로 열렬하게 환영했지만 아이젠하워는 용산 미8군 사령부에 틀어박힌 채 이승만을 만나려 들지 않았다.
이승만은 국군 수도사단을 마지 못해 방문한 아이젠하워를 만나러 달려 갔지만 아이젠하워는 좀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얇은 양복을 입은 이승만이 바깥에서 추위에 떨자 곁에 있던 백선엽이 파커를 입혀줬다는 에피소드가 전한다. 겨우 아이젠하워와 대면한 이승만은 중앙청에서 대대적인 환영행사가 준비돼 있으니 참석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아이젠하워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다시 한 번 경무대 환영행사를 준비한 이승만은 서울시장을 미8군에 보내 참석을 요청하려 했지만, 서울시장은 영내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문전축객을 당했던 것. 결국 유엔군 사령관인 벤플리트에 SOS를 쳐 한국을 떠나려던 아이젠하워를 막판에 경무대로 불러들이는데 겨우 성공했다. 우여곡절 끝에 성사된 이 만남에서 이승만은 휴전하는 대신 한미상호방위조약이란 ‘선물’을 받아내는데 성공했다고.
동맹국을 찾아와서도 해당국의 국가원수도 만나려 하지 않았던 미국의 오만함과 추위에 떨면서 미국 대통령 당선자를 만나려고 갖은 애를 썼던 약소국 대통령의 비애가 오버랩되는 장면이다.
박정희 대통령과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회담도 비슷하다. 1961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그해 11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당시 전용기가 없어 국적 전세기와 미국 민항기를 탔고, 도쿄, 알래스카, 시애틀, 시카고를 거쳐 워싱턴에 도착하기까지 만 사흘이 걸렸다고 한다. 박정희는 케네디와의 두 차례 정상회담에서 한국군의 베트남전 파병까지 제안하며 “무조건 도와달라는 게 아니라 한국처럼 자립 의지가 있는 나라에 우선적으로 지원해 달라는 것”이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동갑내기였던 케네디는 합헌적 민주정부를 뒤엎고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에게 냉담했다. 케네디에게 홀대를 받은 박정희는 결국 빈손으로 돌아와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오만한 미국이 박정희를 환대한 적도 있다. 65년 5월 미국에서 열린 ‘박-린든 존슨 정상회담’ 때였다. 베트남전이 교착상태에 빠지고 미군들이 전장에서 죽어나가자 미국 내에서 반전여론이 끓어올랐다. 존슨으로선 대리전을 수행해 줄 나라가 필요했던 것. 그래서 존슨은 한국으로 대통령 전용기까지 보내 박정희를 워싱턴으로 불러들였다. 대접도 깍듯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베트남 파병을 고리 삼아 미국의 경제 지원을 끌어내겠다는 게 박정희의 복안이었겠지만, 어쨌든 그 결과로 한국 정부는 그해 8월 국회 의결을 거쳐 수도사단과 제2해병여단 파병을 결정했다.
미국에 대한 ‘구걸 외교’는 전두환 정권 때도 이어졌다. 12·12 정변을 일으키고 5·18 광주민주항쟁을 짓밟고 들어선 전두환 대통령이 미국의 지지를 얻어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음은 당연한 수순이다. 80년 이른바 ‘내란음모사건’으로 신군부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은 김대중의 구명을 놓고 한국 신군부와 백악관이 긴박하게 협상에 나섰다. 1981년 1월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자 김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가 백악관 측에 도움을 요청했던 것. 당시 백악관 보좌관이던 브레진스키가 중재에 나서 한국 정부에 전두환과 도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정상회담 성사를 위한 일종의 전제조건으로 김대중의 방면을 요구했다. 미국 방문이 절실했던 전두환은 김대중을 방면해 미국으로 추방(?)하고 나서야 워싱턴을 찾아 레이건과 회담할 수 있었다.
전두환-레이건 행정부의 줄다리기는 한 번 더 있었다. 전두환 정권은 1985년 4월 전두환의 방미를 앞두고 양국 정상의 언론발표문에 ‘레이건 대통령은 전 대통령의 헌정 수호 결의를 지지한다’는 내용을 담을 것을 집요하게 요구했다고. 양측은 정상회담 직전까지 합의를 보지 못한 채 핑퐁게임을 벌였고, 한·미 정상회담 바로 전날 저녁 미국 현지에서 열린 한·미 외무장관 회동에서도 줄다리기는 계속됐다.
미국은 “한국에서 정치문제화된 이 문제를 미국이 언급하면 한국 내정에 간섭한다는 인상을 줄 우려가 있다”며 끝내 거부했다. 우여곡절 끝에 최종 발표문은 레이건이 헌법 문제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고 ‘한국의 정치 발전을 위한 제반 조치를 지지한다’고 언급하는 선에서 매듭지어졌다. 전두환은 1987년 4월 13일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거부하는 한편, 일체의 개헌 논의를 중단시키고 현행 헌법을 유지한다는 내용의 ‘4·13 호헌 조치’를 발표했다가 같은 해 6월 10일 이후 전개된 전 국민적인 저항에 부딪쳐 직선제 개헌을 허용하지 않을 수 없었음은 역사가 증언하는 바다.
3.
역대 정상회담을 보면, 대체로 한국이 미국에 손을 벌리는 처지였고, 미국은 고자세를 취하는 게 상례였지만, 한미 정상회담에서 양국 간의 불협화음이 표면화된 사례도 적지 않았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1979년 박정희와 지미 카터 간의 서울 회담.
카터는 1977년 취임 직후부터 대선 공약이었던 주한미군 철수를 완고하게 밀어붙였던 터. 그의 강력한 철군 의지는 미국 조야에서도 심각한 갈등을 낳았거니와 카터의 고집은 ‘퇴로’를 찾기 위해 마련된 한미 정상회담에까지 이어졌다. ‘바른생활 맨’ 카터와 철권 통치자 박정희의 1979년 6월 대면은 “도저히 동맹국 정상 간 회담이라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는 게 당시 양국 관계자들의 증언. 박정희의 유신 정권이 한국민의 인권을 심각하게 유린하고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던 카터의 면전에서 박정희는 작심한 듯 주한미군 철수의 부당성에 대해 40분간 혼자서 설교했다는 건 잘 알려진 이야기. 박정희는 “주한미군을 철수하려면 해라. 장비는 두고 가라, 돈을 달라면 주겠다”면서 “하지만 인권 문제는 간섭하지 말라”고 강하게 나갔다. 카터는 청와대에서 나오는 차중에서 참모들에게 “당장 미국으로 돌아가겠다. 짐을 싸라”고 분통을 터뜨렸다고.
글쎄, 그해 10월 26일 박정희가 궁정동 안가에서 술 파티를 벌이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을 맞아 세상을 떠나면서 그 강고했던 유신 정권이 무너진 것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박-카터 회담의 실패도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을 것이란 게 일반적 분석이다. 만약 회담이 원만하게 끝났더라면, 미국이 박 정권에 대한 지지를 유지하는 대신 박정희가 상당 부분 철권 통치를 완화하는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해 여름의 YH사건이나 가을의 김영삼의 국회의원 제명, 부마항쟁 등 박 정권의 몰락을 부채질한 사건들이 일어나지 않았을 지도 모르니까.
사상 최악이었던 ‘박-카터’ 회담 정도는 아니지만, 그 후에도 이런저런 뒷말이 나오곤 했다.
김대중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대통령 사이의 정상회담도 삐걱거렸던 사례 중 하나다. 2001년 1월 25일, 김대중과 부시는 전화 통화를 하고 가능한 빨리 한미정상회담을 갖기로 합의했다. 당시 박준영 청와대 대변인은 김 대통령이 한미정상회담을 통해 대북포용정책 공조에 나서자고 제안했다며 사뭇 장밋빛 발표를 했다. 그러나 백악관의 풍경은 전혀 달랐다고. 당시 국무부 대북 교섭 특사로 두 정상의 전화 통화를 곁에서 지켜본 찰스 프리처드의 <실패한 외교>에는 다음과 같은 회고가 실려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을 포용할 필요성을 (부시) 대통령에게 말하기 시작하자, 대통령은 손으로 전화기의 송화구를 막으면서 '이자가 누구야? 이렇게 순진하다니 믿을 수 없군(Who is this guy? I can't believe how naive he is!)'이라고 말했다(2013년 11월 19일자 프레시안 ’2001년 김대중-부시 정상회담 막후에선 무슨 일이?‘ 제하 기사)."
이 같은 분위기가 연장되면서, 햇볕정책을 펴는 김대중 정부에 불만이 많았던 부시가 회담 후 김대중을 ‘디스 맨(this man, ·이 사람)’이라고 부르는 ‘외교적 참사’가 벌어지고 말았던 것. 상대국 정상을 ‘미스터 프레지던트’라고 극진하게 부르는 게 외교 프로토콜인데, 실언으로 자주 구설수에 올랐던 부시라고는 해도 상대의 면전에서 ‘이 사람’이라고 부른 것은 지나쳤달밖에. 후일 자서전에서 김 전 대통령은 “친근감을 표시했다고 하나 불쾌했다”고 털어놨다. 김대중은 공개 석상에서 이런 모욕을 당하고서도 햇볕정책에 반신반의하는 부시를 집요하게 설득했다. 그의 이런 노력은 후임 대통령인 클린턴으로부터는 “한반도 문제는 김대중 대통령이 핸들을 잡아 운전하면 나는 옆자리로 옮겨 보조 역할을 하겠습니다”라는 말을 끌어내긴 했지만.
한국 대통령에 대한 부시의 결례는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로 이어졌다. 2003년 5월 미국에 간 노무현은 부시에게서 ‘이지 맨(easy man)’으로 불렸다. 글쎄, ‘다루기 쉬운 사람’쯤이라고 번역할 수 있을까. 우리 청와대 공보팀은 ‘대화하기 편안한 상대’라고 번역했지만. 당시 동북아에서 한국이 외교적 이니셔티브를 취해야 한다며 “반미 좀 하면 어떠냐”고 공개 발언했던 노무현에 대한 부시의 반격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노무현이 미국에 가서 “53년 전 미국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다면 저는 지금쯤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한껏 몸을 낮춘 것에 비하면 ‘무례’에 가깝다는 지적이 당시에 나왔다. 회담에서 노무현이 부시에게 평화협정과 종전선언에 대한 입장을 공개적으로 압박했고 부시가 이를 일축하는 장면이 고스란히 생중계됐다. 노무현이 ‘이라크 파병’이라는 ‘선물 보따리’를 들고 갔음에도 두 정상은 끝내 냉랭한 관계를 풀지 못했다.
부시는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한 후 드디어 마음이 맞는 ‘짝’을 만났다는 듯 ‘밀월 관계’를 유지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2008년 4월 캠프 데이비드에서 부시를 만난 이명박은 부시를 태우고 직접 골프 카트를 운전하기도 했다. 이명박은 이 자리에서 노무현의 주한미군 감축 계획을 백지화했다. ‘광우병 파동’을 불러일으킨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도 합의해 줬다.
하지만 같은 해 8월 부시가 서울을 방문했을 때는 한편의 코미디가 연출된다. 청와대에서 정상회담을 마치고 공동기자회견을 할 때다. 기자가 묻는다. 한국군의 아프가니스탄 파병 문제가 논의됐느냐고. 이명박은 이렇게 답했다. “아프가니스탄 파병 문제, 이것은 부시 대통령이 답변해야 하잖아요. 내가 할 것이 아니고. 그러나 그런 논의는 없었다는 걸 말씀드립니다.” 이 말을 동시통역으로 듣던 부시는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이명박을 흘끗 쳐다보곤 이렇게 받았다. “우리는 그 문제를 논의했습니다(We discussed it).” 공동기자회견서 일국 대통령의 공식발언이 상대 정상에 의해 묵사발이 되고 만 거다. 부시가 자신의 말을 면전에서 뒤집자 이명박이 혼자 중얼거리는 장면이 TV 카메라에 포착된다. “아, 논의했구나…”
4.
정상 간의 대화는 늘 어렵다. 특히 우리가 안보 문제에 사활을 걸다시피 의존하고 있는 미국 대통령과의 만남은 더 그럴 게다. 게다가, 지금은 북핵 문제 등으로 동북아 정세가 난마처럼 얽혀 있는 때가 아닌가.
무식하고 말을 함부로 하는 데는 부시보다 한 술 더 뜬다는 트럼프 대통령이다. ‘아메리카 퍼스트!’를 모토 삼은 그의 일방주의는 벌써 악명을 떨치고 있다. 지난 대선 당시 ‘목사님’이란 별명이 붙었던 문재인 대통령도 벌써 그에게 당했다는 뒷말이 나오고 있다. 지난 6월말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트럼프가 문재인 대통령한테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는 것.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부시가 김대중 대통령한테 ‘디스 맨’이라고 부른 것보다 더한 외교적 무례가 있었다고 한다(한겨레, 2017년 9월 14일자 '특파원 칼럼').
한미 FTA 폐기 주장을 아무렇지도 않게 끄집어내고, 한국의 대 중국 경제 피해는 아랑곳없이 사드 배치를 밀어붙인 트럼프다. 글쎄, 이번엔 또 무슨 뒷말이 새나올지 걱정스럽다. 어쨌거나 ‘팍스 아메리카나’를 모토로 한 완력과 ‘베니스의 상인’을 닮은 교활한 상술이 트럼프의 트레이드마크가 아닌가. 어제 있었던 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그에게 밀리지 않고 당당히 협상을 이끌었다는 후일담이 나왔으면 좋으련만.
글쎄, 두어 차례 열린 문-트럼프 회담이 탐색전이었다면, 문재인과 트럼프의 본격적인 힘겨룸은 이제부터일 거다. 이번 정상회담에서도 드러났지만 북핵 공조, 한미 FTA 재협상, 방위비 분담금 문제 등등 난제가 산적해 있지 않나. 우리는 문 대통령이 트럼프에게 굽실거리지 않고 당당한 태도로 주권국가의 체모를 유지해 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박정희와 카터 사이처럼 파국으로 끝나서도 안 될 일이다. 문 대통령이 좀 더 강단을 갖고 북핵 문제, 대미 협상에 임하면서도 끝까지 국익을 지키려는 노력을 보여야 할 일이다.
그런 점에서 문 대통령에게 감히 조언(?) 한 마디. 정치학의 고전이라고 할 해롤드 니콜슨이 <외교론>이란 책에서 한 말이다. “처녀는 ‘예스’라고 말하지 않으며 외교관은 ‘노’라고 하지 않는다.” 외교는 ‘노’라고 말해야 할 때도 ‘글쎄요’라고 말하는 기술이 아닌가. 신중하면서도 강단 있게 산적한 외교 안보 문제를 잘 헤쳐가 주기를 바랄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