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10-25 15:38 (금)
언제나 비어 있고, 주인도 없고, 관리인도 없다
상태바
언제나 비어 있고, 주인도 없고, 관리인도 없다
  • 취재기자 임소현
  • 승인 2015.04.30 09: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누구나 들어와 이용하는 도심 속 이색 열린 ‘공간 초록’ 이야기

부산 교대 정문 앞 작은 골목길 사이를 따라 조금만 걸어 들어가면, 작은 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그 주택들 사이에 얼핏 보면 별 다를 것이 없어 보이는 초록 대문을 가진 한 주택이 모습을 드러낸다. 초록 대문 옆으로 그리 높지 않은 담장이 보이고, 담장 넘어 화단에는 이제 막 피어난 꽃들이 웃고 있다. 북적이는 도심 속에서 초록 생명들로 채워진 이 집은 ‘공간 초록’이란 이름이 갖고 있다.

▲ 공간 초록임을 알리는 명패와 낮은 담장 너머로 가꿔진 나무들이 보인다(사진: 취재기자 임소현).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공간 초록의 마당은 부드러운 흙과 나무로 채워져 있다. 마당 한 가운데는 원목으로 만든 평상이 놓여 있다. 화단에는 수풀과 나무들이 앞 다투어 푸름을 뽐내고 있다. 공간 초록에는 모두 초록빛으로 물이 들었다.

▲ 초록빛을 띄는 화단과 흙으로 만들어진 마당의 모습(사진: 취재기자 임소현).

공간 초록은 천성산 도롱룡으로 유명한 지율스님이 만들었다. 시빅뉴스는 관계자를 통해서 지율스님을 만나 공간 초록의 단아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에 대해 설명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인연이 닿지 않아, 할 수 없이 공간 초록의 홈페이지(www.spacechorok.com)에 게시되어 있는 다큐멘터리 영상으로 지율스님의 뜻을 알아내야 했다. 지율 스님은 공간 초록을 만들기 전에 우리 문화가 하지 못했던 것을 그 어떤 공간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단다. 그리고 지율 스님은 자신이 목수의 딸이었다는 얘기를 들려주면서 사람들에게 도면과 설계도를 보여주며 이런 공간을 만들자고 그들을 설득했다고 한다.

지율 스님의 뜻은 바로 ‘도심 속 비어있는 공간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 뜻이 사람들의 후원으로 만들어진 곳이 공간 초록인 것이다. 공간 초록은 원래 식당이었던 곳을 개조하여 2006년 여름에 문을 열었다. 이곳은 자발적인 개인과 단체들의 후원으로 유지된다. 언제나 비어 있고, 주인도 없으며, 관리하는 사람도 없다. 다만 누가 더 나서고 덜 나서고의 차이일 뿐이다. 초록색 대문이 미닫이 문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있다면, 이곳은 누구든 언제나 그 대문을 밀고 닫으며 방문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 벽 곳곳에 붙어진 메모들은 공간 초록이 자발적으로 운영되는 공간임을 보여준다(사진: 취재기자 임소현).

공간 초록은 소박한 꿈을 가진 모임들이 원하면 언제든지 모임 공간으로 이용된다. 각 모임이 각자의 뜻을 가지고 다양한 모임을 진행하면, 공간 초록은 잠시 그 자리를 비워 줄 뿐이다. 모임의 성격은 환경, 인권, 인문 등 다양하다. 뜻이 맞는 모임들이 연합해서 강연회, 영화제, 음악회를 진행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로 채워지느냐에 따라 매 순간 초록색이 다른 색깔로 달라지기도 한다.

‘곳간’이라는 이름의 문학 모임에 참여하는 송모 씨는 공간 초록을 이용해 모임 사람들과 모여 공부하기도 하고 의견을 나누기도 한다. 송 씨는 초록을 자본화, 개인화되고 있는 도시에서 어떻게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지 보여주는 공간이라 했다. 송 씨는 초록을 이용하면서 “소멸되기 쉬운 가치들이 초록에 모여서 지켜지고 있다”고 했다.

▲ 공간 초록의 거실. 많은 모임들이 이곳에서 자리를 펴고 자신들의 이야기로 공간을 채운다(사진: 취재기자 임소현).

공간 초록을 이용하는 모임 중 하나인 ‘부산 온 배움터’라는 단체가 있다. 부산 온 배움터는 공간 초록을 활용하여 많은 수업을 이곳에서 진행한다. 온 배움터는 옷살림, 먹거리, 생태건축 등 참다운 삶을 지향하는 수업들이 공간 초록에서 갖는다.

부산 온 배움터 대표 송명자 씨는 2011년 봄부터 공간 초록의 세 개의 방 중 곰팡이 때문에 쓰지 못하는 방 하나를 온 배움터 사무실로 개조해 수시로 방문한다. 송 씨는 종종 공간 초록의 수도, 전기, 청소상태를 점검한다. 운영진도 관리인도 뚜렷하지 않은 공간 초록에서 온 배움터는 일종의 공간 지킴이 역할을 하고 있다.

공간 초록은 자체가 시민들에게 오픈되어 있는 공간이고 책임지는 사람을 따로 두지 않는 공간이다 보니 2006년부터 지금까지 많은 문제들도 있었다. 집 자체가 심하게 노후되어 상수도관이 터지기도 하고, 재보수해도 티가 나지 않는다. 또한 일부 이용자들이 공간을 사용 후 전기를 끄지 않아 전기세 폭탄 맞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난방비, 수도세 역시 마찬가지다.

▲ 몇몇 자발적인 이용자들이 공간의 전기세를 걱정해 콘센트 위마다 전기를 꺼달라는 당부의 말이 적혀 있다(사진: 취재기자 임소현).

공간의 보수비용과 전기세, 수도세, 월세, 가스 요금 등은 모두 공간 초록의 운영비에서 마련된다. 운영비는 이용자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마련된다. 초록의 벽면에 붙어 있는 후원계좌로 이용자들이 자발적으로 비용을 지불한다. 부산 온 배움터는 수강생들의 수강료에 공간 초록 이용료를 포함시켜 정기적으로 비용을 낸다. 공간 초록은 이렇게 여러 곳에서 모인 운영비로 빠듯하게 운영해오고 있다.

부산 온 배움터 송 대표는 4년여 간 공간 초록을 이용해오며 일부 이용자들의 잘못된 이용방식에 대해 안타까워 했다. 송 씨는 “초록이 현재 재정난을 안고 있는 만큼 이용자들이 자유와 책임은 하나라고 생각하고 초록을 좀 더 아껴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2006년 삭막한 도시에 생태와 문화가 어우러진 공간을 꿈꾸며 시작한 공간 초록은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고, 현실과 부딪히며, 아픈 시간들을 겪어왔다. 하지만 여전히 주변 사람들과 모임이 있을 때나, 혼자 책을 읽을 때나, 언제나 열려있는 공간 초록을 찾는 사람들 덕분에, 초록은 항상 새로운 이야기로 채워진다.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배움의 터일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혼자 사색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이용 목적이 없어 더욱 넓고 깊게 느껴지는 곳,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곳이 바로 공간 초록이다.

부산교대 재학생 이민호(25) 씨는 조용하게 독서를 즐기고 싶을 때나 생각에 잠기고 싶을 때는 공간 초록을 이용한다. 이 씨는 “자주 방문하는 편은 아니지만 올 때마다 공간이 주는 여유로움이 좋다”며 “앞으로 오랫동안 공간 초록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