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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일 특집]우리는 당신들의 희생을 잊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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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일 특집]우리는 당신들의 희생을 잊지 않았습니다
  • 미국 서던 미시시피 주립대학교 간호대학 교수 공미정
  • 승인 2016.06.05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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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교포 공미정 박사, 한국전 참전 미군 노병 네 분을 만찬에 초대해 깊은 감사의 뜻을 표하고..

미국 미시시피주 남부에 해티스버그라는 작은 도시가 있다. 35년전 주한 미군 장교와 결혼해 현재 해티스버그 소재 서던 미시시피 주립대학교에서 간호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재미교포 공미정 박사는 미국의 현충일(5월 4번째 월요일, 올해는 5월 23일)을 맞아 이 도시에 거주하는 한국전 참전 미군용사 네 분을 초대해 만찬을 베풀었다. 공 박사는 그날의 소회를 지역 신문인 <해티스버그 아메리카>지에 '한국전 참전 용사에 바친 만찬'이란 제목으로 기고했다(//me2.do/5uX2NCB3). 시빅뉴스는 공미정 박사의 허락을 받고 이 글을 옮겨 싣는다./편집자 주

▲ 미국 미시시피 주의 해티스버그 시 한국전 참전용사 4명이 현지 한인 재미교포 대학교수들의 초청으로 감사의 만찬에 초대됐다. 좌로부터 찰스 싱글테리, 토니 파스케일, 루이스 패이스, 해롤드 스토버 등 4명의 참전용사가 자리 했고, 맨 오른쪽이 초청자 공미정 박사다(사진: 공미정 박사 제공).
현충일 이틀 전인 5월 21일, 나는 매우 특별한 경의를 표하는 모임을 주선하는 영광을 갖게 됐다. 같은 대학 교수인 한국인 동료 최환석 박사와 나는 이 지역에 거주하는 네 명의 한국전 참전용사와 그 부인들을 초대해서 저녁을 대접했다. 최 박사의 부인 소영 씨와 그의 딸 에린(Erin), 그리고 아들인 이탄(Ethan)과 이안(Ean)이 소중한 이날의 저녁 식사 준비를 정성껏 도왔다.
▲ 이날 공미정 박사와 같이 감사의 모임을 주선한 최환석 박사와 그의 세 자녀, 그리고 부인이 미군 노병들과 감사의 환담을 나누고 있다(사진: 공미정 박사 제공).
나는 미군 장교였던 미국인 남편과 한국에서 결혼하고 남편 따라 미국으로 이주한 1981년 이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63년 전 내 조국을 도우러 낯선 땅을 마다 않고 참전해 준 미국인들에게 한국인으로서 감사의 표시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숙제처럼 지니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처럼 한국전도 격렬하고 참혹해서 하루에 미군 500명이 죽어 나갔다고 한다. 육군 소령으로 퇴역한 내 남편 볼디 레이본(Voldi Rayborn)은 과거 군대 네트워크를 활용해서 해티스버그 지역에 생존해 있는 미국 해외참전용사회 회원 10명의 명단을 나를 위해서 알아내 주었다. 그 중 이번 저녁 초대에는 건강이 허락하는 단지 4명의 참전용사만이 참여할 수 있었다. 자랑스런 그들의 이름은 루이스 패이스(Loise Pace)와 그의 부인 셜리(Shirley), 찰스 싱글테리(Charles Singleterry)와 그의 부인 제인(Jane), 토니 파스케일(Tony Pascale)과 그의 부인 재넷(Janet), 그리고 해롤드 스토버(Harold Stover)와 그의 부인 메리 루(Mary Lou)였다. 우리 한인 가족은 그들 영웅 가족과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함께 자리를 같이 한 것을 진심으로 하나님의 은총으로 생각하고 있다.
▲ 이날을 위해 특별 주문한 감사 케익. 케익에는 한미 양국의 국기가 장식되어 있다. 참석한 네 분의 미군 노병들은 이 케익의 불을 끌 때 다들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사진: 공미정 박사 제공).
미국에서 한국전은 흔히 “잊힌 전쟁(the forgotten war)”이라 불린다. 이는 1940년대의 2차 세계대전과 1960, 70년대의 월남전 사이에 끼어서 미국의 해외 참전 역사를 설명할 때 짧게 언급되는 사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1953년 한국전이 끝난 직후에 태어난 한국인으로서 나는 늘 한국전에 대해 학교와 집에서 듣고 자랐다. 5만 7,000명의 미군이 16개국에서 파병된 UN군으로 편성되어 한국전에 참전했다. 이중 미군은 3만 7,000명이 한국 땅에서 전사했다. 한국전은 공식적으로 1950년 6월에 발발해서 1953년까지 지속됐다. 그러나 한국전은 종전(終戰)이 아니라 휴전(休戰), 혹은 정전(停戰) 상태로 끝나고 말았으며, 군사적 대치 상태는 63년이 지난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1950년 6월 15일, 한국전이 발발하자, 한국전에 참전했던 미군 병사들에게 당시 한국은 지구 어디에 있는지 들어 본 적도 없는 나라였다. 내 시아버지와 시어머니 마크 레이본(Mark Rayborn)과 올라(Ola)는 공교롭게도 한국전이 발발한 그날 미시시피 주의 룸버톤(Lumberton)의 한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내 시아버지가 결혼식을 끝내고 교회 밖으로 행진해서 나오는데, 한 친구가 트루먼 대통령이 한국전 파병을 결정했다는 소식을 당시 참석자들에게 큰소리로 전했다. 그때 시아버지는 이렇게 혼자 중얼거렸다고 회상했다. “도대체 한국이 어디에 처박혀 있는 나라야?” 그는 그 말을 내뱉은 31년 후인 1981년에 그 존재조차 몰랐던 한국이란 나라에서 온 며느리를 보게 될 줄은 당시에는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한국전이 휴전된 1953년 7월 이후, 한반도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2마일(3.2km) 너비의 비무장지대가 남북한 양쪽의 군대를 현재까지도 분리해 놓고 있다. 남북을 가르는 이 군사분계선은 이 시대 진정한 “자유를 지키는 최전선(freedom’s frontier)”이다. 오늘날 미국인들은 북한이라는 가혹한 세계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상을 종종 보게 된다. 나 또한 그렇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그 지옥 같은 북한이 아니라 극명하게 다른 남쪽에서 낳고 자란 사실에 대해서 당시 한국이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도 모르면서 한국을 위해 기꺼이 싸워 준 미군 참전용사들에게 어떤 감사의 말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들의 희생으로 한국은 오늘날 세계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제 강국으로 우뚝 섰다. 그래서 나는 한국이란 자유의 최전선에서 여전히 자유라는 종소리가 울려 퍼지도록 그들의 고귀한 생명과 피와 생애를 희생한 미국 참전 용사들에게 깊은 경의를 표한다. 나는 언제나 그들에게 정말 큰 빚을 졌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다. 나는 미국 캔사스 시에서 살다 1998년에 남편 고향인 이곳 미시시피로 이사 왔다. 2년 후 나는 마취간호사로 해티스버그의 웨슬리 병원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나는 존(John)과 마릴린 맥다니엘(Marilyn McDaniel) 부부와 같이 일하게 됐다. 그런데 나는 존의 아버지가 한국전에서 목숨을 바친 3만 7,000명의 미군 참전용사 중 한 명이란 사실을 알게 됐다. 그때가 바로 내가 자유 국가에서 성장할 수 있는 내 권리를 지켜준 전쟁에서 사랑하는 아버지를 잃은 미국 자손을 내 생애 처음 만난 순간이었다. 존의 아버지 윌리엄 토마스 맥다니엘(William Thomas McDaniel) 소령은 진정한 영웅이었다. 그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1950년 6월 한국전 발발과 동시에 곧바로 다시 한국전에 배치된 몇 안 되는 미군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당시 사랑스런 아내와 두 아들을 미국 땅에 남겨두고 세계의 전쟁터를 누볐다. 그는 서울에서 대전으로, 다시 대전에서 남쪽으로 그의 연대를 이끌고 퇴각하던 중 그만 북한군에 포로로 잡히게 됐다. 그를 포함한 미군 포로들은 서울에서 평양까지 200km를 강제로 걸려서 끌려갔다고 한다. 이 최악의 고통을 동반한 포로 이송 행위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필리핀에서 미군 포로 7만 명을 도보로 88km 이동시키면서 1만 명의 미군 포로를 질병과 굶주림으로 죽게 한 악명 높은 ‘죽음의 바탄 행진(Bataan Death March)’보다 더 악랄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전 당시 북한군에게 당한 미군 포로의 가혹 행위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1950년 10월, UN군이 서울을 수복하고 평양을 탈환했을 때, 맥다니엘 소령과 137명의 미군포로들은 평양 근교 순천터널에서 학살당했다. 그들의 시체는 학살 며칠 뒤 UN군에 의해 발견되었다. 맥다니엘 소령에게는 포로가 되기 전 그가 세운 무공을 기려 사후에 은성 무공훈장과 수훈 십자훈장이 추서됐다. 그는 지금 진정한 영웅으로서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존 맥다니엘 소령은 사후에 하늘나라에서 아버지 없이 자란 한 꼬마를 지켜보았을 것이다. 내 조국을 위해 싸우다 아버지를 잃은 내 동료의 얘기를 들은 후, 나는 미국의 한국전 참전용사들에게 큰 빚을 졌다는 생각을 떨 칠 수 없었다. 벼르고 벼르다, 수년이 흐른 지금에야 나는 그들이 피로 싸운 한국전에서 그들이 바친 숭고한 희생은 전혀 잊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비로소 그들에게 알리게 됐다. 내 뜻에 동조해서 같이 이 지역 네 분의 한국전 참전 용사를 초대한 자리에 기꺼이 동참해준 최 박사님과 그의 가족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나는 진정으로 미국의 '잊힌 전쟁' 참전용사들과 그들의 남은 가족들에게 전하고 싶다. 여러분의 희생은 절대로 '잊히지 않았다'고, 나는 그들이 치룬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도록 가치 있는 삶을 살려고 노력할 것이다.  *공미정 박사는 1955년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국군간호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간호장교로 복무 중 당시 주한 미군 장교인 남편 볼디 레이본을 만나 1981년 결혼, 그해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후 미국에서 간호사로 일하면서 남편과 같이 애론과 다니엘, 두 아들을 양육했으며, 그 사이 남편은 군에서 은퇴했고, 그녀는 마취간호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현재는 미국 서던 미시시피 주립대학교 간호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아래는 해티스버그 아메리카에 실린 영어 원문.

Dinner honors veterans of Korean War

Michong Rayborn This past Saturday, just two days before Memorial Day, I was honored to take part in a very special tribute. My colleague, Dr. Hwanseok Choi, and I hosted a dinner for four Korean War veterans and their spouses. Dr. Choi’s wife, Soyoung, his daughter, Erin, and sons Ethan and Ean assisted with preparing and serving the meal. For quite some time I have wanted to show my appreciation to the men and women who came to the aid of my country 63 years ago. Like our World War II veterans, we are losing our Korean War veterans at the rate of 500 per day. My husband, Voldi, obtained the names of 10 Korean War veterans that are members of Veterans of Foreign Wars Post 3036 in Hattiesburg. Only four were able to attend with their spouses. We were blessed to have a few short hours of fellowship of Louis and Shirley Pace, Charles and Jane Singleterry, Tony and Janet Pascale and Harold and Mary Lou Stover. In America, the Korean War is often called “the forgotten war.” Sandwiched between World War II in the 1940s and Vietnam in the ‘60s and ‘70s, it is often little more than a footnote in the litany of U.S. military actions. But having grown up in South Korea in the 1950s and 1960s, the war has always been a part of my life. And so have the contributions of more than 5.7 million Americans that served as part of the 16 nation United Nations Command. Almost 37,000 Americans lost their lives in the conflict. Officially, the conflict lasted from June 1950 until July 1953. However, the war ended with a truce, rather than an armistice, and the coals of hostility still smolder 63 years later. When hostilities broke out on June 25, 1950, many of the Americans that served in the war had never even heard of Korea. My future in-laws, Mark and Ola Rayborn, were married that same day at the Methodist church in Lumberton. My father-in-law said that he walked out of the church and someone told him President Truman was sending troops to Korea. He thought to himself, “Where in the heck is Korea?” I am certain he never thought that 31 years later he would have a daughter-in-law from Korea. Since July 1953, the two-mile wide “demilitarized zone” that stretches from east to west across the Korean Peninsula has separated the combatants. This line is truly “freedom’s frontier”. Most of us have seen documentaries of the draconian world that is North Korea today. My situation could have been much the same. But thanks to the men and women that came from America to fight for a country many had never even heard of, my life is drastically better. And South Korea is today an economic powerhouse with global influence. So I have always had a great sense of appreciation to America and to those men and women who sacrificed their time, their blood and even their lives to make sure that freedom rings on freedom’s frontier. I always knew I owed them a great debt. The great extent of that debt became very real to me in 1998, when my family moved back to Mississippi. A couple of years later, while working at Wesley Medical Center, I met John and Marilyn McDaniel. Marilyn and I were co-workers at the time. And I learned that John’s father was one of the nearly 37,000 Americans who gave their lives for my native country. For the first time in my life, I looked into the eyes of an American who had lost a loved one in the war that guaranteed my right to grow up in a free country. John’s father, Maj. William Thomas McDaniel, was a true hero. A combat veteran of World War II, McDaniel was among the first American troops sent to Korea in June of 1950. He left behind a lovely wife and two young sons. He was captured just four months later as he covered his regiment’s retreat from Taejon, just south of Seoul. He and his fellow prisoners were forced to march the 125 miles from Seoul to Pyongyang. This grueling march was comparable to the infamous “Bataan Death March” in the Philippines in World War II, but few Americans have even heard of it. When it was obvious that the United Nations forces would overrun Pyongyang in October 1950, Major McDaniel and 137 other American POWs were massacred by the North Korean at Sunchon Railway Tunnel, outside of the city. Their bodies were discovered just days later by UN troops. He was posthumously award the Silver Star and the Distinguished Service Cross for gallantry in the field and for his actions while a POW. He is buried at Arlington National Cemetery, as befitting a true hero. When I looked into John McDaniel’s eyes, I saw a little boy growing up without his dad. Since hearing the story of his father’s sacrifice for my country, I have felt a special sense of indebtedness to our Korean War veterans. So I was especially honored to host these men on Memorial Day weekend. I want them to know that their war and their sacrifice are not forgotten. So I was pleased to join with Dr. Choi and his family in honoring four veterans of “the Forgotten War”. I want every veteran and their families to know their sacrifice is not forgotten. I hope my life is worthy of the price they paid. *Dr. Michong Rayborn grew up in Korea in the aftermath of the war. She teaches in the Nurse Anesthesia program at the College of Nursing at the University of Southern Mississippi. She can be reached at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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