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는 반군과 정부군 사이의 내전이 2011년부터 2017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 결과로 내전을 피하려는 시리아 국민들은 난민이 돼 이국을 방황해야 했다. 레바논은 시리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어 많은 시리아 난민이 찾아온다. 이런 먼 이국에 나가 난민들에게 도움을 줬던 한국인 자원봉사자가 있다. 2016년 4월부터 9월까지 가족과 함께 한국에서 레바논으로 가서 6개월간 난민에게 봉사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임영국(33) 씨가 바로 그 사람이다.
무역회사에 다니고 있는 임영국 씨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 그는 평소에 국제사회의 난민에 대한 자원봉사와 선교활동을 하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다가 교회 선교사의 요청으로 레바논에 갈 기회가 생겼다. 그는 이 기회를 이용해서 가족과 같이 레바논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처음엔 가족에 대한 걱정과 주변 사람들의 우려 때문에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주변 사람들이 가족과 함께 자원봉사 가는 것에 반대를 많이 했다. 아이들 공부도 그렇고, 회사도 그만둬야 할 형편이었다.” 하지만 회사에선 자원봉사 활동을 갈 수 있도록 휴직 신청을 받아 주었고, 교회 사람들이 축복해줘서 그는 결국 레바논으로 떠날 결심을 굳힐 수 있었다.
아내도 그의 생각에 동의해 줘서 그는 아내와 자녀와 함께 2016년 4월 6일 드디어 레바논에 왔다. 당시 자녀들은 초등학교 취학 전인 6세, 5세, 3세였다. 주변 사람들은 아이의 교육을 특히 걱정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특별한 교육 철학이 있었다. 임 씨는 “저는 당시 아이들이 학교 공부보다는 난민 아이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다양한 문화를 접하고 관용을 배우는 것이 더 좋은 교육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레바논은 시리아와 달리 수학과 과학 등 특수한 과목들은 영어와 프랑스어로 교육하기 때문에 아랍어를 쓰는 시리아 아이들은 레바논 학교에서 공부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시리아 난민들은 레비논의 특수 난민학교에서 공부하는 게 일반적이다. 임 씨는 이 난민학교에서 아이들과 아랍어로 소통하고 학교 행정을 돕는 자원봉사 활동을 했다. 임 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시리아 아이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을 도와주는 일이 정말 보람찼다. 난민들과 같이 공부하던 내 아이들도 난민 아이들과 잘 어울리고 같이 노는 모습을 보면서 흐뭇했다.”
그는 구호 물품을 나눠주는 봉사활동에서 더 나아가 난민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밥도 같이 먹고 차도 마시면서 마음을 치료해 주는 일에도 힘썼다. 그래서 난민들과 친해지기도 쉬웠고 아픔을 같이 느낄 수 있었다. 임 씨는 “무턱대고 선교에 나서면 난민들이 싫어하는데, 같이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마음을 열어 그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려는 자세를 보이면 더 빨리 친해질 수도 있고, 결과적으로 선교 활동에도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자원봉사 기간 중 많은 난민을 만났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난민은 내전 중에 부상해 휠체어를 이용하던 아이였다. 당시 아빠와 함께 난민 캠프에 살던 그 소년이 어느 날 갑자기 임 씨가 사는 집으로 찾아왔다. 아직 어린 그 아이가 어떻게 휠체어를 타고 혼자 자기 집까지 찾아 왔는지 신기했다. 그 아이는 임 씨에게 자기의 처지를 털어놓았다. 그 아이의 엄마는 시리아를 떠나는 과정에서 아들과 남편과 떨어져서 독일에 가게 됐단다. 엄마는 아이에게 곧 돌아온다고 했는데, 그만 국경이 막혀서 레바논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됐다는 것. 아이는 엄마가 보고 싶어 늘 우울했는데, 문득 임 씨네 아이들과 놀고 싶어 찾아왔다고 했다. 이야기를 들으니 정말 가슴이 아팠다. 임 씨는 “아이의 이야기를 듣은 후 나는 난민들을 위해서 더욱더 열심히 자원봉사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낯선 이국에서 자원봉사를 하다보니 이런저런 어려움도 적지 않았다. 임 씨가 특히 애를 먹은 것은 한국과 다른 레바논의 교통 체계. 레바논은 신호등부터 시작해서 각종 교통 법규가 한국과 달랐고 교통통제 시스템도 부족했다. 그래서 작은 교통사고가 잦았다. 임 씨는 “힘들게 운전했지만 큰 사고 없이 자원봉사 활동을 마치게 돼 다행이었다”고 말했다.
시리아 난민들이 레바논에서 겪는 가장 큰 문제는 돈이었다. 난민들은 난민 캠프에서 땅을 빌리는 형태로 살고 있기 때문에 땅 주인에게 임차료를 지불해야 했다. 그는 “난민들은 일자리도 구하기 힘들고, 설사 취업을 한다해도 임금을 얼마 받지도 못하는데, 현지 사람들이 난민을 '돈'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서 슬펐다”고 말했다. 자원봉사자도 난민 수에 비해서는 턱없이 부족했다. “난민들의 수는 점점 많아지는데 자원봉사자 수는 너무 부족하다. 많은 사람들이 난민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게 임 씨의 바람이다.
그는 6개월 동안의 자원봉사 활동을 끝내고 작년 9월 30일 한국으로 귀국해 지금은 서울에 있는 무역회사에 복귀했다. 그는 6개월 간의 자원봉사 기간 동안 많은 인연을 쌓았다. 지금도 그는 교회를 통해 난민 아이들의 소식을 듣고 있다. 임영국 씨는 “다시 기회가 된다면 레바논에 또 가고 싶다. 또 우리나라도 정부 차원이든 민간차원이든 시리아 난민을 돕는 일에 나서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