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박근혜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사안 중의 하나인 이른바 ‘문화계 블랙리스트’가 이번엔 이명박 정권 사람들을 정조준하고 있다.
‘국정원 적폐 청산 TF’에 의해 드러난 정황을 보면, 이명박 정권 당시 원세훈 국정원장의 주도로 장기간 치밀하게 집행됐다는 ‘이명박판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오른 이는 82명이다. 이외수·조정래·진중권·문성근·명계남·김민선·김여진·이창동·박찬욱·봉준호·김미화·김구라·김제동·윤도현 씨 등 소설가, 문화평론가, 영화감독과 배우, 방송인, 가수에 이르기까지 죄다 이름이 잘 알려진 이들이다. 글쎄, 이 또한 ‘빙산의 일각’이 아니겠는가.
‘이명박판 블랙리스트’가 국민을 놀라게 한 대목은 여럿이다. 우선 정부 부처가 주도한 박근혜 시절과는 달리 국가정보원이 주도한 것. 문체부가 했대서 면책되는 건 결코 아니지만, 국내정치 개입이 엄격히 금지된 정보기관이 문화예술인까지 전 방위로 사찰했다는 건 예삿일이 아니잖은가. 나랏돈 수십 억 원을 들여 민간인으로 조직된 댓글 팀 수십 개를 운용하질 않나, ‘좌파 연예인 대응 TF'란 걸 만들어 해당 연예인의 방송 출연 등을 막았다질 않나, 듣기만 해도 입이 벌어질 정도다. 소속사 세무 조사, 억지 비판 여론 조성까지 나섰다니 그야말로 ‘열 일’을 했다.
그들의 블랙리스트는 방송사 등은 물론 정부 각 기관에까지 전파돼 충실히 집행된 것으로 드러났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이창동 감독이 영화 <시>를 제작하려고 영화진흥위원회에 지원신청을 했는데 시나리오 부문에 0점을 매겨 탈락시켰다. 그런데 그 영화는 깐 영화제에서 ‘시나리오상’을 받았다. 세계 최고 권위의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시나리오에 0점을 줬다니 한국 영진위 심의위원들의 안목은 ‘우주적’ 수준이 아니냐는 탄복(?)의 소리가 그때도 나왔지만 정권적 차원에서 벌인 치밀한 대응의 결과인 줄은 그때는 미처 몰랐던 거다.
화룡점정(?)이랄까, 절창은 배우 문성근 씨와 김여진 씨의 나체 합성 음란사진을 만들어 인터넷에 뿌린 대목이다. 그 창조적(?) 발상은 혀를 내두를 지경이거니와 국민의 관음증까지 돌봐 주시는 국정원의 자상한 배려에 감읍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상부의 지시를 받고 그 가짜 사진을 만든 국정원 직원의 심정은 어땠을까.
글쎄, 사찰과 탄압을 하더라도 숨어서 몰래 할 일이지, 이렇게 노골적으로 해서야 어찌 국정원이라고 하겠나.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그들의 옛 모토처럼 음지에서 하려면 제대로나 하든지 이게 무슨 망신인지. 피해자인 문성근 씨의 말마따나 해외토픽감이 아니겠나. ‘개는 키우는 주인을 닮는다’더라고 이명박 정권의 국정원은 역시 그 주인을 닮은 듯 천박하기 짝이 없질 않나.
2.
일반적으로 ‘요주의 인물 명부’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블랙리스트(black list)’란 말의 저작권은 원래 노동계에 있다. 미국의 노동조합은 미조직 사업소를 조직할 때 조합의 전임 조직책을 파견한다. 조직책은 대상 사업소에 몰래 취직해 내부에서 조직하거나, 대상 사업소 종업원과의 접촉을 통하여 외부로부터 조직화하는 방식으로 노조를 결성한다. 사용자는 조합 조직책의 인물 명부 작성을 흥신소 등에 의뢰해 노조 분쇄에 써먹는데 그게 바로 블랙리스트란 것이었다. 이에 대응해 노동조합도 부당 노동행위가 두드러진 기업의 명부를 작성해 공격의 타깃으로 삼았다고. 요즘엔 상업적인 스팸을 보내는 인터넷 정보 제공자(ISP)의 주소 목록을 일컫기도 한다. 여기에 오른 사람의 트래픽을 간단하게 제거하기 위한 목적이겠다.
서양에도 문화예술인에 대한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탄압에 써먹은 흑역사가 있다. 바로 나치가 그런 짓을 했다.
나치 정권은 “독일적인 예술의 순수성을 더럽힌다”며 이른바 ‘퇴폐 미술가’의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전위 예술가들을 감시하고 문화 예술 활동을 막았다. 1937년엔 국공립미술관에서 그들의 작품을 철거한 뒤 독일 전역을 돌며 전시했다. 그 유명한 ‘퇴폐 미술전’이다.
1937년 7월 19일 뮌헨의 한 고고학연구소 건물에서 시작된 현대 미술 탄핵을 위한 이 미술전람회는 베를린과 뒤셀도르프, 프랑크푸르트 등 독일의 주요 도시를 순회하며 개최된 것. 20세기 아방가르드 미술에 대한 나치스의 증오에서 촉발된 이 전시는 샤갈, 칸딘스키, 마르크, 뭉크, 피카소, 클레 등 112명의 '퇴폐 미술가'들이 그 대상이 됐다. 그들의 작품 1만 7000여 점이 '퇴폐 미술'로 판정을 받아 소각되거나 경매에 붙여졌다.
퇴폐 미술가로 지목된 작가들이 작품 제작을 금지당한 것 말할 나위도 없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해외로 망명했으며 자살한 사람까지 있다. 순수하고 원시적인 정신성과 분방한 감정을 적나라하게 표출하는 것, 인간 내면에 잠재된 불안과 위선을 날것으로 폭로하는 것은 비(非)독일적인 타락이며 퇴폐라고 단정한 나치스의 문화 테러는 서구 문화사에서 실로 가공할 만한 사건으로 기록됐다.
한국 산업화의 자랑스러운 대목을 강조하고 민주화를 위한 지난한 투쟁을 폄훼하면서 ‘국뽕영화’ 등등 보수진영의 일부 문화예술인의 활동엔 특혜를 아끼지 않았던 이명박, 박근혜 정권의 문화 정책과 어찌 그리 닮았는지 모를 일이다. 아니, 나치조차도 적대적인 예술가들의 가짜 나체 음란그림을 만들어 전시할 수준으로까지 떨어지지는 않았다.
3.
정치권력이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특정한 사람, 집단을 원천적으로 배제하는 일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행돼 왔다.
중국 송(宋) 신종 때 왕안석(王安石·1021~1086)의 등장으로 빚어졌던 신법당과 구법당의 쟁투는 중국사에서도 유명한 대목이다. 거란족의 위협으로 국정은 늘 불안했고 요즘의 재벌이라 할 호족 세력의 발호로 자작농 계급이 무너져 국가의 재정도 흔들렸다. 이때 혜성처럼 나타난 사람이 왕안석이다. 신종의 신임을 얻어 재상에 오른 그는 강력한 국정쇄신에 나섰다. 이를테면 기득권 세력의 발호를 막는 여러 정책을 시행한 것. 당연히 기득권 세력이 반발할 밖에. 그래서 왕안석의 신법당과 기득권 신료들의 구법당이 치열한 당쟁을 벌였고 시국에 따라 정권이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했던 것. 각기 정권을 잡을 때마다 정적들의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권력에서 철저히 배제했다.
1089년 정권을 잡은 구법당은 왕안석 등 신법당 인사 30여 명을 간당(奸黨)으로 규정해 전국에 그 이름을 공고했다. 공개적인 블랙리스트인 셈이다. 그리고 이후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과거사 청산’이 번갈아 펼쳐졌다. 1093년 구법당을 뒤에서 받쳐주던 고태후가 사망하자 신법당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그들은 신법당 인사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구법당 인사들의 관작(官爵)을 삭탈했다.
다시 사태가 역전된다. 1100년 철종이 젊은 나이로 죽고 휘종이 즉위했다. 철종의 황후인 향태후가 후원하는 구법당의 한충언이 집권했다. 구법당은 다시 한 번 신법을 폐기하고 신법당 인사들을 숙청하는 한편, 구법당 인사들을 복권시켰다. 그러다 휘종이 즉위한 지 7개월 만에 향태후가 죽었다. 1102년 휘종은 한충언을 추방하고 신법당 출신인 채경을 재상으로 앉혔다.
원래 신법당 소속으로 왕안석 시절에 수도 개봉의 시장(지사)을 지냈던 채경은 ‘적폐(積弊) 청산’에 나섰다. 먼저 사마광·소식·문언박·정이·황정견(화가·시인) 등 구법당의 요인들은 물론, 채경과 척진 일부 신법당계 인사 339명의 이름을 올린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 이들을 ‘원우당적인(元祐黨籍人)’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비석에 새겨 궁성 남쪽 정문인 단례문 앞과 전국 지방관청, 공자묘(孔子廟)에 세우게 했다. 이 ‘원우당적비’에 이름이 오른 사람들 중 살아 있는 자는 변방으로 영구히 유배를 보내고 그 자손들도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도록 했다. 어쨌거나 신법당이 정권을 잡았다고는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왕안석 시절 의기에 넘치던 개혁 세력이 아니었다. 구법당을 몰아낸 후 자기들끼리 부귀와 권세를 추구하는 추잡한 이익집단으로 전락한 것. 송나라는 신법당과 구법당이 권력투쟁을 벌이며 ‘블랙리스트’란 이름으로 서로가 서로를 물어뜯은 끝에 결국 멸망의 길을 재촉했다.
4.
하기야 우리나라라고 ‘블랙리스트’가 없었던 건 아닐 터.
가장 유명한 게 고려 태조 왕건의 블랙리스트다. 고려 태조가 자손들을 훈계하기 위해 몸소 지은 열 가지 유훈을 ‘훈요십조(訓要十條)’라 한다는 건 일찍이 국사 시간에 배운 터다. 일종의 고려 왕실의 헌법인 셈인데 문제는 8조였다.
"차현(車峴) 이남, 공주강(公州江) 외(外)의 산형지세가 모두 본주(本主)를 배역(背逆)해 인심도 또한 그러하니, 저 아랫녘의 군민이 조정에 참여해 왕후(王侯)·국척(國戚)과 혼인을 맺고 정권을 잡으면 혹 나라를 어지럽히거나, 혹 통합(후백제의 합병)의 원한을 품고 반역을 감행할 것이다. 또 일찍이 관노비(官奴婢)나 진·역(津驛)의 잡역(雜役)에 속했던 자가 혹 세력가에 투신하여 요역(徭役)을 면하거나, 혹 왕후·궁원(宮院)에 붙어서 간교한 말을 하며 권세를 잡고 정사를 문란하게 해 재변을 일으키는 자가 있을 것이니, 비록 양민이라도 벼슬자리에 있어 용사하지 못하게 하라."
다시 말해 공주 이남의 호남인의 벼슬 등용을 막으라는 보편적 블랙리스트인 셈. 호남인에 대한 차별은 이렇게 유구하다.
조선의 지역 차별 역시 뿌리가 깊다. 이 때 차별받은 곳이 평안도와 함경도였다.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의 한 구절.
"태조(이성계)가 무장(武將)으로서 왕 씨에게서 왕위를 물려받았으므로 그를 도운 공신들도 서북 지방의 맹장이 많았다. 그런데도 나라를 창건한 뒤에 태조는 '서북 지방 사람은 높은 벼슬에 임용하지 말라'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렇기 때문에 평안ㆍ함경 두 도에는 300년 동안 높은 벼슬에 오른 사람이 없었다. (…) 또 나라의 풍속이 문벌을 중시하여 서울의 사대부는 서북 지방 사람과 혼인을 하거나 벗으로 사귀지 않았다. 서북 사람도 감히 서울의 사대부와 동등하게 어울리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서북 양도에는 결국 사대부가 없게 되었고, 서울 사대부로서도 그곳에 가서 사는 사람이 없었다.(…) 이런 까닭으로 서북 방면인 함경ㆍ평안 두 도는 살 만한 곳이 못 된다."
글쎄, 태조가 왜 평안, 함경도 사람을 싫어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는 없다. 내 개인적인 추측은 이렇다. 이성계는 원래 함경도 회령 일대 거란족과의 접경지대의 한미한 무장 출신이었다. 일설에는 이성계 자신이 거란족의 후예라는 주장도 있다. 그래서 새 왕조를 연 그는 자신의 내력이 드러나는 게 매우 싫었을 거다. 그래서 자신의 내력을 잘 아는 서북 지방 출신을 경계한 게 아니었을까. ‘쇠가 쇠를 먹고, 살이 살을 먹는다’는 속담처럼 동류가 동류를 더 모질게 대하는 법 아닌가.
어쨌거나 조선시대 내내 평안도 사람들은 ‘평한(平漢)’이라 불리며 오랫동안 조정에서 내쳐졌다. 이 같은 서북 지방에 대한 차별 정책은 결국 이시애의 난과 홍경래의 난을 비롯한 수많은 민란으로 이어졌음은 다들 아는 바다. 지역 차별 블랙리스트는 요즘의 관점에선 상상도 못할 일일 테지만, 하여튼 그때는 버젓이 국가의 주요 인사 정책으로 시행됐으니 수백 년 차별을 받은 해당 지역 사람들로선 원한이 뼈에 사무쳤을 법 하다.
지역 차별 뿐만 아니라 여성 차별 블랙리스트도 있었다. 고려시대에 시작돼 조선조까지 이어져 온 ‘자녀안(姿女案)’이 그것이다.
양반집 여자로 품행이 바르지 않거나 3번 이상 다시 결혼한 사람의 소행을 기록한 블랙리스트다. 이미 1389년(공양왕 1)때 ‘6품 이상의 처첩은 남편이 죽은 뒤 3년간 재가할 수 없으며, 수절할 경우 그 정절을 포상한다’는 규정을 만들어 실시했다. 조선시대 들어와선 한층 강화돼 양반의 이혼은 왕의 승인을 얻어야만 가능했다. 특히 태종은 양반의 처로서 세 번째 지아비를 섬긴 여자들을 자녀안에 기록하도록 했다. 자녀안에 오르면 그 가문의 불명예는 물론 과거·승진에도 큰 지장을 받았다.
조선시대 사대부 여인들이 정숙함의 화신으로 칭송받곤 하지만 알고 보면 이렇게 잔인하고 가혹한 블랙리스트의 굴레에 들씌워져 열녀 되기를 강요받은 또 다른 흑역사의 희생자였던 것.
5.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문화예술인에 대한 탄압은 죽 있어왔다. 대표적인 게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과 역시 세계적인 현대미술가 고암 이응노가 아닌가.
따지고 보면 윤이상은 ‘원조 블랙리스트’ 예술가다. 1960년대부터 독일에 체류한 윤이상은 남북을 아우르는 통일운동에 힘을 보태겠다는 심정으로 북한을 방문한 것이 빌미가 돼 박정희 정권의 지속적인 탄압을 받았다. 박정희 정권 때 중앙정보부는 이른바 ‘동백림 사건’의 간첩 혐의로 윤이상을 독일에서 국내로 납치해와 고문을 자행했다. 그는 1967년 동베를린(동백림) 간첩단 사건이란 거창한 조작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사형 선고를 받았다. 박정희 정권은 그를 2년 가까이 교도소에 감금했다가 세계적 비난 여론이 들끓자 마지못해 석방한 뒤 추방했다. 당시 작곡가 스트라빈스키·슈토크하우젠·지휘자 카라얀 등 세계적 음악가 200명이 탄원서를 제출했던 터다. 독일로 돌아간 윤이상은 1995년 베를린에서 영면할 때까지 고국 땅을 밟지 못했다.
고암 이응로도 마찬가지. 1958년 55세란 늦은 나이에 프랑스 파리에 건너간 그다. 한국적 정서를 바탕으로 콜라주 기법을 이용한 완전 추상 작품을 발표해 호평을 얻었고, 1963년 살롱도톤전에 출품해 유럽 화단에 알려진 사람이기도 하다. 1965년 제8회 상파울로 비엔날레에서 명예대상을 획득하여 세계 미술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그 역시 1967년 ‘동백림간첩단’사건에 연루돼 중앙정보부에 의해 납치돼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1989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국내활동 및 입국이 금지되는 등 고초를 겪었다.
글쎄, 윤이상이나 이응노에게 간첩 허울을 뒤집어 씌워 감옥에 가둔 게 박정희 정권 아닌가. 그런데 그들의 후배 문화예술인들을 ‘좌파’로 몰아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것은 또 그 딸인 박근혜 정권 때의 일이었으니, 역사는 진전이 아니라 쳇바퀴를 도는 존재일까.
이명박 정권 당시 광우병 파동 때 비판한 죄목(?)으로 오래 동안 블랙리스트에 올랐다는 배우 김규리가 최근 이런 댓글을 SNS에 올렸다던가. “내가 낸 세금이 나를 죽이는데 쓰였다니…”
블랙리스트에 올랐다는 건 단순히 정부로부터 창작활동에 필요한 돈을 더 이상 받지 못했다는 정도의 이야기가 아니다. 권력에 의해 생계 수단이 막혔다는 이야기만도 아니다. 아니, 예술가로서의 정체성과 자기 존재를 위협한 엄중한 사태다. 자유로운 영혼이 질식되는 공포스런 사태이기도 하다. 정권이 오죽 못났으면 힘없는 배우들의 사진을 가짜 합성시킨 음란물을 배포하는 수준으로까지 전락할 수 있나. 그건 한 인간의 영혼을 밑동을 도끼로 쳐 내는 행위다.
스탈린을 비판했다는 혐의로 강제노동수용소에서 11년간 노역했던 솔제니친의 소설 <수용소 군도>는 이렇게 시작된다.
"한밤중에 요란스럽게 울리는 벨소리 혹은 거칠게 두드리는 노크 소리는 곧 체포다. 그것은 흙 묻은 장화로 용감하게 들이닥치는 오만무도한 비밀경찰 요원들의 침입을 뜻한다."
요컨대, 블랙리스트는 비밀경찰 요원들이 흙 묻은 장화로 인간의 영혼을 짓밟는 행위가 아니겠는가. 명확하게 규명되고 죄지은 만큼 벌을 받아야 한다. 설사 그가 전직 대통령이라도 예외가 있을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