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수사 방해하고도 “국가에 충성했다”는 전 국정원차장...범죄를 범죄로 인식하지 못하는 ‘악의 평범성’인가
편집위원 이처문
승인 2017.10.30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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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위원 이처문
근래 접한 가장 충격적인 뉴스 중 하나가 ‘국가정보원의 검찰 수사 방해’인 듯하다. 지난 2013년 검찰이 ‘국정원 댓글 사건’을 수사할 당시 국정원이 ‘현안 TF팀’을 꾸려 가짜 사무실과 허위 서류, 허위 증언으로 검찰을 농락했다는 이야기는 영화에나 나올 법한 수법이 아닌가 싶다.
이 사건에서 고개를 드는 첫 번째 의문은 수사 방해에 가담한 고위 공직자들의 국가관이다. 일반 국민들이야 세금 제대로 내고, 법 잘 지키면 그게 애국하는 길이다. 그러나 댓글로 정치 공작을 자행하고 검찰 수사를 방해한 국정원 고위 간부들의 행태는 ‘출세를 위한 맹목적 충성’으로만 해석하기엔 뭔가 부족하다.
국가의 존립을 위한 두 국가기관 중 한 쪽은 범죄를 밝히려 했고, 다른 쪽은 이를 막았다. 같은 정부 아래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한 배를 탄 사람들이 알량한 기득권을 지키자고 저지른 일이라 해도 그렇다. 국정원 ‘현안 TF팀’ 멤버들의 ‘신념’과 ‘용기’에 탄복할 따름이다.
점입가경은 지난 주에 펼쳐졌다. 수사 방해 혐의로 검찰에 소환된 전 국정원 2차장이라는 사람이 “국가에 충성을 다했다”고 주장했다. “국가에 충성했을 뿐 죄 지은 것은 없다”는 말로 들린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논리다. 국가가 시키는 대로 했다는 ‘아돌프 아이히만’의 이야기다.
1961년 5월 11일.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리하르트 클레멘트’라는 이름의 남자가 이스라엘 비밀경찰에 납치된다. 9일 후, 그는 예루살렘 법정에서 유대인 학살에 대한 자신의 역할을 진술한다. 그의 진짜 이름은 ‘아돌프 아이히만.’ 2차 세계대전 때 나치 친위대 중령으로 활약하던 인물이다. 유대인 강제 이주와 집단 학살을 집행했던 핵심 요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법정에서 줄곧 무죄를 주장했다. 자신은 상관의 명령을 받고 국가적 행위를 수행했을 뿐이라는 거였다. 아이히만은 “나는 괴물이 아니다. 그렇게 만들어졌을 뿐이다. 나는 오류의 희생자다”라고 강변했다.
당시 재판을 지켜본 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펴냈던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가리켜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깨닫지 못하는 인물”이라고 진단했다. 아이히만은 허풍쟁이도 아니고 머리에 뿔이 난 괴물도 아닌 지극히 평범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널리 알려진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은 여기서 태어났다.
하지만 조엘 딤스데일이 <악의 해부>에서 소개한 심리학자 구스타브 길버트는 아렌트와 배치되는 주장을 폈다. 그는 뉘른베르크 재판에 등장한 나치 전범들이야말로 ‘악의 화신’이라고 규정했다. 나치 전범들의 죄악은 평범한 인간에게선 볼 수 없는 특수한 악에 속한다는 것이다.
아렌트에 앞서 ‘악의 평범성’을 주장한 심리학자는 더글라스 켈리다. 그는 나치 전범들이 지나친 야망과 수준 낮은 윤리관, 강한 민족주의를 가졌을 뿐 그들 역시 평범한 인간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약간의 악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를 결정짓는 것은 사회적 맥락이라는 게 켈리의 주장이다. 어느 쪽의 주장이 옳은지 명쾌하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지만 악은 평범함과 특별함이 섞여 있는 것 아닌가 싶다.
평범한 사람들의 ‘맹목적 복종’에 대한 심리는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의 실험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바 있다. 밀그램은 1974년 <권위에 대한 복종>이라는 저서에서 ‘복종 실험’ 결과를 소개했다. 실험 내용은 이렇다
두 명의 실험 참가자 중 한 명은 교사, 또 다른 한 명은 학습자 역할을 맡는다. 학습자는 끈으로 의자에 묶여진 상태에서 단어를 외우게 하고, 교사는 학습자가 외운 단어가 틀리면 약한 전기 충격을 가하도록 했다. 물론 학습자에게 실제 전기 충격은 가해지지 않는다. 비명을 지르도록 교육받은 실험 관계자일 뿐이다.
실험 결과는 의외였다. 실험 전 실시한 예측 조사는 “대부분의 교사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 곧 실험 중단을 요구할 것”이라는 거였다. 하지만 실제 실험에서는 교사 역할을 맡은 사람들 대부분이 가장 높은 단위의 전압에 도달할 때까지 실험을 계속 수행했다.
스탠리 밀그램이 얻은 결론은 ‘정상적인 사람들도 비정상적인 지시에 따른다’는 것이었다. 어떤 개인이 자신을 다른 사람이 시키는 일을 수행하는 도구로 인식하는 순간,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감을 놓아버린다는 말이다.
하지만 공직자는 개인의 이념이나 사상에 관계없이 범법 행위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공익을 해치는 행위는 더욱 그러하다. <죽음의 수용소>를 쓴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동쪽 해안에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것처럼, 서쪽 해안에는 책임의 여신상이 있어야 한다”고 설파했다.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는 빼앗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선(善)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다. 출세욕이든 애국심이든 그 어떤 이유에서든 공직자가 상부의 지시라는 이유로, 국가에 충성한다는 이유로 이런 자유를 권력에 ‘상납’할 수는 없을 터이다. 조직과 체제에서 시키는 일이라면 법을 어기더라도 기어코 해내야 직성이 풀린다는 그릇된 충성심은 나라를 망칠 수밖에 없다.
범죄를 범죄로 인식하지 못하는 장애는 인지퇴행에 해당한다. 일부이긴 하겠지만 어쩌다 이런 사람들이 2013년 국정원을 장악했는지 그 배경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