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공덕 짓고 수행 정진하면 심안도 얻고 천안도 구한다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 한 분인 천안제일(天眼第一) 아나율이 바느질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장님인 그는 바늘에 실을 꿸 수가 없어 동료들에게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남에게 좋은 일을 하여 공덕(功德)을 쌓고 싶으신 분이 계신다면 내 바늘에 실을 좀 꿰어 주시구려."
'천하 제일의 밝은 눈'을 가지고 있는 아나율인데 이 얼마나 큰 역설인가. 여기엔 엄청 큰 뜻을 담은 부처님과 그 제자들의 심안(心眼)을 얘기하고자 하는, 후세 제자와 사람들의 마음이 읽혀지고 있다.
그런데 마침 뜻밖에도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대답이 돌아왔다. 깜짝 놀란 아나율이 당황하며 말했다.
"세존이시여, 세존은 이미 열반의 피안"(彼岸)에 건너가 계신 분이옵니다. 다시 공덕(功德)을 더 쌓아 행복을 추구할 필요가 없으실텐데ㅡ"
"아눌타여, 그렇지 않다. 나도 역시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진리를 추구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길에는 결코 끝이 없지. 어서 나에게 공덕을 쌓도록 해다오."
부처님은 장님인 승려를 아눌타라고 불렀다.
-증원양언(增原良彦) 저 지방훈(池芳熏) 역, <석존과 십대제자>, 도서출판 상어, 146-147p, 1991 중판.
이 얘기는 코오사라 국의 사위성 교외의 '기원정사'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이때 부처님은 고희(古稀)를 넘기신 연세였다. 이 두 분의 대화는 착하고 좋은 일을 하여 공덕을 짓는 일에는 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어떤 선이 분명히 그어진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부처님은 진리의 말씀을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이다.
아눌타의 천안과 마음의 눈(심안心眼 또는 深眼)은 이때 부처님의 인자한 미소를 보았을 것이다. 아눌타는 가까이 보이는 것은 보지 못하지만 멀리 보이지 않는 것도 보는 천안-심안도 가지고 있었다. 이미 부처님의 기르침으로 그걸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천안은 우리 얼굴의 양쪽 눈섭 사이에 존재한다. 육안이 아나라 지혜와 머리로 보는 시각이다. 오랜 수행으로 얻어지는 또 다른 눈이라 하겠다.
석존 부처님과 제자의 이 대화와 설법은 우리 중생에게도 자비스런 천안-심안이 있다는 걸 깨우쳐 주신다. 부처님은 중생에게도 불성이 있다고 가르쳐주셨다. 우리가 아무리 팍팍한 현실 삶과 가시밭길 같은 여건 속을 걸어간다고 해도 살아갈, 또 살아야 할 이유는 그래서 충분하다는 가름침이다.
육안(肉眼)과 심안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부처님이나 10대 제자들만이 자비와 사랑의 심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더욱 아니다. 우리에게도 육안은 물론 심안도 있고 또 천안도 있다.
오직 '마음'이다. 우리가 한숨 고르고 자리잡고 앉아 조금만 수행, 정진한다면 천안과 심안이 크게 열려 자비와 사랑을 담을 수 있다. 세상과 사람을 더 널리 깊이, 그리고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2019년 7월 19일, 묵혜(默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