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4주간 어학연수를 갔다. 연수를 다녀온 후 그는 미국 유학을 결심했고 버클리대학교 경제학부를 졸업하였다. 자유분방하고 개방적인 미국 사회에 매료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인생의 롤모델 ‘사카모토 료마’를 만났다. 에도 막부 말기의 풍운아 사카모토 료마를 주인공으로 한 시바 료타로(司馬遼太朗)의 장편소설 <료마가 간다>를 정독했다. ‘나도 료마처럼 큰 포부를 품고 세상을 호령하겠다. 내가 펼칠 세계는 비즈니스다.’ 손정의는 비즈니스 세계에 승부를 걸기로 결심했다.
“5년 후 매출은 100억 엔, 10년 뒤 500억 엔을 돌파할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1조, 2조 단위로 끌어올리고자 합니다.”
1981년, 일본 큐슈 후쿠오카의 허름한 목조건물 사무실에서 스물네 살 청년이 사과궤짝에 올라 직원들 앞에 섰다. 직원이라고 해봤자 고작 세 명이었다. 젊은 사장의 허무맹랑한 연설을 듣고 직원들은 기가 막혀 회사를 떠나버렸다.
빌 게이츠가 인정한 ‘승부사risk taker’, 손정의(손 마사요시) 소프트뱅크 회장이 창업할 당시의 일화다. 그때 손정의의 연설은 허풍으로 여겨졌다. 30년이 지난 2011년 소프트뱅크는 자회사 117개, 투자회사 73개, 순매출 2조 7000억 엔의 거함이 되었다.
손정의는 어릴 적 야스모토 마사요시(安本正義)라는 일본 이름으로 불리었다. 그에게 있어 ‘자이니치(재일조선인)’라는 뿌리는 드러내고 싶지 않은 콤플렉스였다.
그는 1957년 일본 큐슈 사가 현의 한인 밀집지역 무허가 판자촌에서 태어났다. 대구가 고향인 할아버지 손종경은 열여덟 살에 탄광 노동자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아버지 손삼헌도 중학생 때부터 돈벌이에 나서야 할 만큼 가정 형편이 어려웠다.
그에게 가난보다 더 큰 걸림돌은 재일 한국인 3세라는 사실이었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꿈을 포기한 것도 한국 국적 때문이었다. 귀화시켜 달라고 부모를 졸랐지만, 그의 아버지는 ‘초등학교 선생님도 훌륭한 직업이지만, 너는 다른 쪽에 소질이 있는 것 같구나’라고 격려했다.
손정의의 부모는 교육열이 매우 높았다. 또 가난을 떨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했다. 부친은 밀주를 만들어 팔 정도로 안 해본 일이 없었다.
그는 미국에서 고교 과정을 3주만에 마쳤다. 6개월 어학코스를 거쳐 샌프란시스코 교외의 세라몬테고 10학년(고교 1학년)으로 편입했다. 월반을 거듭하여 3주만에 고교 졸업 검정고시에 도전했다. 막상 검정고시 기회가 주어졌지만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시험문제를 풀기에 그의 영어 실력이 한참 부족했다. 손정의는 시험 감독관에게 “영어 실력을 보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정중하게 말했다. 감독관은 일영사전 사용을 허락했다.
홀리네임스칼리지를 다니다가 1977년 버클리대학교 경제학부 3학년에 편입한 때가 만 열아홉이다. 이때 청년 손정의는 ‘인생 50년 계획’을 세웠다. ‘20대에 사업을 일으키고 이름을 떨친다. 30대에 1000억 엔의 자금을 모은다. 40대에 큰 사업을 일으킨다. 50대에 사업에서 큰 성공을 이룬다. 60대에 후계자에게 사업을 물려준다.’
놀랍게도 이후의 그의 삶은 이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버클리대학 재학 시절 손정의는 우연히 과학잡지 <파퓰러 일렉트로닉스>에서 본 인텔 마이크로프로세서 확대 사진에 마음을 빼앗겨 IT 세계에 빠져들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일본으로 돌아온 손정의는 1981년 9월 3일, 자본금 1000만 엔으로 소프트뱅크를 세웠다. 때마침 전자오락과 PC붐이 일면서 회사는 파죽지세로 성장했다. 창업 30주년인 2010년 6월 발표한 ‘신 30년 비전’은 더욱 원대한 포부를 담았다. 30년 후 시가총액 200조 엔, 계열사 5000개를 거느리는 세계 톱10 기업이 되겠다는 구상이다. 현재 시가총액보다 100배나 큰 기업집단을 만든다는 것이다. ‘손정의 2.0(후계자)’을 키우기 위해 소프트뱅크 아카데미아도 개교했다.
손정의 회장의 신 30년 비전 역시 30년 전 비웃음을 사면서도 당당하게 선언했던 창업포부만큼이나 거창하다. 한바탕 꿈으로 끝날지 아니면 새로운 소프트뱅크 성공 신화가 전개될지 가늠조차 어렵다.
그러나 ‘인터넷이 마음의 고향이라고 말하는 사나이’ 손정의가 인생을 걸고 있는 ‘디지털 정보혁명’은 계속 진행 중이다.
교사의 꿈도 허락되지 않던 재일 한국인 손정의가 현실에 안주했다면 일본 사회에서 영원히 비주류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거품을 만들어내는 사나이’라는 일본인들의 비아냥을 뒤로하고 소프트 뱅크는 2011년 가장 많은 순이익을 기록했다. 일영사전 사용을 허락해 줄 수 없다던 감독관에게 더듬거리는 영어로 ‘내게는 그런 배려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설득한 소년의 돌파력이야말로 큰 자산이다.
한 편의 영웅소설이 한 사람의 기업영웅을 만들었다. 그의 머리는 지금도 쉼 없이 작동하고 있다. 작동의 샘, 작동의 윤활유는 책을 통한 독서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간염으로 3년간 병석에 누워 있었던 적이 있다. 입원했던 3년 동안 무려 3000권의 책을 읽었다. 매일 세 권 가까이 읽은 셈이다.
“최고가 되려면 우왕좌왕하지 말고 한 우물만 파라.” 손정의가 강조한 말이다. 공부하는 학생은 말할 것도 없고, 직장인들도 모두 최고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자기 일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은 동서양이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