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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우의 경성만필(慶星漫筆)]9-화편소실기(華扁笑室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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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우의 경성만필(慶星漫筆)]9-화편소실기(華扁笑室記)
  • 칼럼니스트 이현우
  • 승인 2020.02.05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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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우 칼럼니스트
이현우 칼럼니스트

신어산 동남쪽 장척마을 외딴곳에 ◯◯의 안식처 ‘화편소실(華扁笑室)’이 있다. ◯◯은 경남 의령 태생으로 김해에 정착한 지 이십여 년 되었다.

세상을 대하는 밝은 눈과 사람을 대하는 따뜻한 마음이 조화를 이루었으니 아름다운 품성을 지닌 사람이다. 가사와 직장의 이중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면학한 결과 마침내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에서 중국학을 가르쳐오던 중 돌연 병을 얻었다.

어찌 보면 짧고 또 어찌 보면 긴 인생 여정에서 건강을 잃는 것보다 더 큰 좌절이 어디 있으랴. 이를 극복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삶에 대한 본인의 의지와 가족들의 헌신일 것이다. 다행히도 ◯◯은 지금까지 희망의 불씨를 잘 살려왔고, 지인들 또한 한 마음으로 도와주려 나섰다.

나와는 칠 년 전 가인정(伽人亭)에서의 만남이 첫 인연이다. 그러나 그동안 별다른 친분 없이 그냥저냥 지냈는데, 알고 보니 우리 집 창을 건너 마주 보이는 이웃에 살고 있었다. 속담을 따른다면, ◯◯과 나는 사촌쯤 되는 사이리라. 이에 오라버니가 누이를 염려하듯, 가끔 위로 전화도 하고 함께 산책도 하면서 미미한 정성이나마 보태주려 애를 썼다.

그러던 어느 날 장척산 등반을 마치고 잠시 이곳에 들렀을 때다. ◯◯이 간곡하게 당호(堂號)를 청해 왔다. 가능하면 피하고 싶었으나 그럴 형편이 아니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전혀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매사에 게으르고 아둔한 내가 무슨 작명(作名)을 한단 말인가?’ 이렇듯 시늉과 속이 달라 차일피일하던 차에 마침 모(某) 선사(禪師)를 만났다.

다중한담(茶中閑談)이 식어갈 즈음, 넌지시 ◯◯의 운명을 짚어보라 했더니 선사가 이르기를 ‘심의(心醫)를 만나면 쾌차할 것이오’ 하였다. 내가 선사에게 되묻기를 ‘요즘 세상에 심의가 어디 있습니까?’ 했더니, 선사가 껄껄 웃으며 ‘그야, 밖에 없으면 안에서 찾아야지... 모든 상(相)이 심상(心相)만 못하니, 결국은 마음이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법’이라 했다.

자주 그래왔던 것처럼 선사와의 알쏭달쏭한 문답을 접어둔 채 한참이나 지난 오늘, 문득 그날의 대화 뒤편에서 두 명의(名醫)의 이름 ‘화타(華陀)와 편작(扁鵲)’이 떠오른다. 그들은 각각 후한(後漢)과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살았던 전설적인 인물이다.

화타는 진맥(診脈)만으로 병의 경중(輕重)과 원인을 밝혀냈음은 물론 치유법에도 통달한 명의 중의 명의였다. 관우의 팔에서 독을 긁어내 완치시켰고, 조조의 뇌에 든 종양을 알아냈으며, 위중한 환자의 분(憤)을 돋구어 병의 원인을 제거하는 등 심리와 외과 치료까지 곁들여 난치병을 고친 <청낭서(靑囊書>의 주인이 바로 그다.

편작 또한 못지않다. 망진(望診)만으로도 오장육부를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던 그는 불가사의한 족적을 남겼다. ‘내가 편작을 제자로 삼은 것은 그가 똑똑하거나 부유해서가 아니라 본성이 선량하고 자비로우며 참을성이 강해서 어떠한 고생도 마다치 않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라고 한 스승 ‘장상군(長桑君)’의 말을 상기하면 그가 어떤 인물인지를 더욱더 잘 알 수가 있다.

제(濟)나라 환공(桓公)의 안색만 보고도 병근(病根)이 어디에 닿아있는지를 충고했고, 거의 죽어가는 괵(虢)나라 태자를 살려냈으며, 조간자(趙簡子)가 소생하리라는 것을 예언하는 등 오늘날 한의학의 기초가 되는 맥진(脈診)의 원조로서 <난경(難經)>을 쓴 사람이기도 하다.

고맙게도 왜? 이천 수백 년의 먼 세월 끝에 있는 두 명의의 이름이 갑자기 내 머릿속에 떠오른 걸까?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라 그 어떤 암시라는 예감이 든다. 그래서 나는 이곳 신어산록(神魚山麓)에 두 분을 모셔와 ◯◯을 부탁하기로 하고 편액(扁額)의 명칭을 짓는다.

‘화(華)’는 화타(華陀)에게서 따온 것이요, ‘편(扁)’은 편작(扁鵲)에게서 따온 것으로, ‘화편(華扁)’이라 먼저 짓고, ‘화타와 편작이 마주 보고 웃는 집’이라는 뜻에서 ‘소실(笑室)’을 뒤에 이으니, 편액(扁額)의 명칭은 ‘화편소실(華扁笑室)’이 된다. 여기선 목각(木刻)을 만들어 문 위에 걸었지만 실은 마음속에 새긴 이름이다. 그러므로 굳이 글을 쓰고 붙이지 않아도 마음 닿는 곳곳이 다 화편소실(華扁笑室)인 셈이다.

머지않아 ◯◯은 의연히 일어나 예전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돌아올 것이다. 전설적인 두 명의가 늘 함께 있으니, 활짝 웃고 있으니, 어찌 아니 그러하랴. 부디 잊지 마시라, 그대가 바로 ‘남산지수(南山之壽)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아울러, 이곳을 찾는 모든 이들이 봄에는 꽃처럼 화사하고, 여름에는 신록처럼 풋풋하며, 가을에는 열매처럼 탐스럽고, 겨울에는 함박눈처럼 포근한 우정을 간직한 채 고난의 여울목을 함께 손잡고 건너갈 수 있기를 빌어 마지않는다.

*남산지수(南山之壽):장수를 축하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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