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의 등문공 장구 하편에 실린 ‘왕척직심장(枉尺直尋章)’을 보면, 맹자의 제자 진대가 스승에게 이런 의견을 내놓는다.
“스승님, 스승님께서는 세상에 대해 너무 엄격하신 것 같습니다. 항상 옳은 것만을 추구하시니까요. 한 자(尺)를 구부려 여덟 자(尺)를 펼 수 있다면 마땅히 그리해야 한다는 옛말도 있지 않습니까? 스승님, 부디 세상의 어지러움을 꾸지람만 하지 마시고, 큰 뜻을 이루기 위해 제후들을 만나보심이 어떨는지요? 잠시 절개를 굽혀 세상을 구제하소서!”
이 의견에 대해 맹자는 단호한 어조로 가르친다.
“志士不忘在溝壑(지사불망재구학) 勇士不忘喪其元(용사불망상기원). 지사는 자신이 죽어 구렁텅이에서 뒹굴 수 있다는 생각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되며, 용사는 자신의 목이 언제든지 잘릴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고 살아야 한다. 네 말은 사람과 세상을 단순히 이해득실의 관계로 본 것이다. 때론 그것이 보다 큰 것을 위한 슬기처럼 보여도, 아주 위험한 발상이다. 이익을 우선시하는 그런 사람들은 때에 따라 그 어떤 나쁜 행위도 못 할 것이 없다. 옳은 길을 버리고 심지를 비튼 자가 남을 곧게 한 예가 없으며, 백성과 나라를 바르게 이끈 임금도 지금까지 없었다.”
정의로운 사회는 원칙(原則)과 정도(正道)가 지켜지는 사회다. 이를 위해 수많은 성현이 나름의 철학으로 혼탁한 세상을 일깨워 왔다. 동서양이 따로 없고 고금이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바람이 제대로 실현된 적은 거의 없었다. 이해득실을 재단함에 있어, ‘나와 우리’를 내려놓는 일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두말할 필요없이, 현대는 고대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문명사회다. 그렇다고 해서 현대사회가 고대사회보다 더 정의로운 것은 아니다. 모두가 주인임을 자처하면서도 모두가 손님처럼 사는 세상이 바로 21세기의 사회다. 그러므로 그 어느 때보다 ‘원칙과 정도’가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대라 할 것이다.
작금의 대한민국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원칙과 정도를 지키는 공정한 사회인가? 이 물음 앞에서 우리는 자신 있게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비록, 극심한 분열과 갈등을 겪고 있음에도 희망을 접지는 않는다. 까닭은, 맹자의 지적처럼, 한 시대를 이끄는 지도자들이 원칙과 정도를 지킬 때 백성이 뒤따른다는 순리(順理)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만약 이 믿음이 좌절된다면,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고 고통은 후손들이 감내해야 하리라.
사족 하나.
‘효공’과 함께 천하통일의 초석을 다진 ‘상앙’은 자신이 만든 ‘변법’에 걸려 거열형을 당하면서도 원칙과 정도가 지켜짐을 고마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