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약자의 손 잡아줄 사회 시스템 부족 속속 드러나
박원순 사건 피해자 2차 가해는 우리 사회의 고약한 심성 표출
실력과 인간성에 따른 네 가지 인간 유형 보고, 각자 반성 필요
존 그리샴 원작의 1994년 작 영화 <의뢰인(The Client)>은 마피아의 상원의원 살인사건에 연루돼 마피아로부터 쫓기는 어린아이의 얘기를 그리고 있다. 그런데 영악한 주인공 어린아이는 전혀 알지 못하는 아무 변호사 사무실로 무작정 찾아가 자기를 보호해달라는 긴박한 SOS를 전하고 도움을 청한다. 소년이 무턱대고 두드린 그 변호사 사무실에는 다행히도 천사 같은 여성 변호사 수잔 서랜든이 있어서 아이의 호소를 잘 들어주고 끝까지 인권을 지켜준다. 그녀는 이혼으로 자녀와 생이별한 아픈 경험에서 우러나온 모정으로 단돈 1달러의 수임료를 받고 딱한 아이의 목숨을 구하는 아름다운 감동을 선사한다.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누군가는 약자의 손을 잡아 주어야한다는 거다. 최근 천안의 계모에게 7시간이나 가방에 갇히는 학대를 당하다가 사망한 9세 남아도 그렇고, 왈패 같은 주민에게 폭행과 폭언으로 시달리다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한 서울 강북구의 한 아파트 경비원 경우도 그렇다. 그들 곁에는 위험을 제거해줄 ‘슈퍼맨’이 없었다.
최숙현 철인 3종경기 선수의 죽음도 안타깝기 짝이 없다. 최 선수는 2월부터 극단적 선택 하루 전인 6월 26일까지 4개월간 여섯 차례에 걸쳐 국가인권위, 검찰, 경주시청, 대한체육회, 철인3종협회에 소속 선수 및 관계자들로부터 폭행과 폭언에 시달렸다고 진정서를 내거나 고소했다. 그러나 그녀의 절규를 진지하게 귀 기울인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창녕의 계부 의붓딸 학대 사건은 조금 달랐다. 의붓아버지와 친모로부터 쇠사슬로 묶이고 프라이팬으로 손가락을 지지는 등의 학대를 당한 9세 여아는 마치 영화 <의뢰인>의 영악한 소년처럼 부모가 집을 비운 사이를 노려 4층 테라스 난간을 타고 옆집으로 탈출해서 주민에게 발견돼 목숨을 건졌다. 결과는 천만다행이지만, 과정은 역시 약자의 위험을 감지하지 못한 우리 사회의 허술함을 드러냈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돌연 극단적 선택을 했고, 그 직전에 성추행을 당했다는 여성이 박 전 시장을 경찰에 고소한 사실이 드러났다. 서울시가 거창한 5일장(葬)을 치룬 날, 그녀를 돕는 사람들이 기자회견을 열었고, 그녀는 그런 방식으로 관계 당국과 사회에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그녀를 돕자고 너무나 많은 사람이 나서서가 아니라 도움을 청한 피해자에게 쏟아진 손가락질 때문에 나라가 뒤집힌 것이다. 집권당은 피해자를 ‘피해 호소인’이라고 일사불란하게 불렀다가 지지율이 급락하는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고 ‘피해자’로 호칭을 급변경했다. 이뿐이 아니다. “4년간 무얼 하다가 지금 나타났냐”고 피해자를 조롱하는 사람도 있었고, “피고소인은 인생이 끝났는데 고소인은 숨어서 뭐 하는 것인가”라고 큰소리 친 사람도 나타났다. 한 여자 검사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박 전 시장과 팔짱을 끼고 찍은 사진을 첨부하며 “냅다 달려가서 덥석 팔짱을 끼는 방법으로 (박 시장을) 추행했다”며 “여자가 추행이라고 주장하면 추행이라니까!"라고 썼다. 빌 게이츠도 여비서와 결혼했으니 성범죄자 아니냐는 말도 있었다. “고인은 죽음으로 당신이 그리던 미투 처리 전범(典範)을 몸소 실천했다”는 믿기 어려운 논리를 전개한 이도 있었다.
나는 이런 일련의 발언들을 보면서 박원순 전 서울시장 사건에 대한 정치적인 논쟁이나 진영논리보다는 우리나라 일부 사람들의 심성이 어쩌다 이렇게 잔인하고 고약해졌을까 하는 회한(忏悔)에 깊이 잠겼다.
인류는 역사적으로 대개 전리품으로 타 민족이나 집단을 노예로 부렸다. 미국이나 유럽의 흑인 노예처럼 말이다. 그런데 우리 한국은 이와는 달리 같은 민족을 노예로 부린 전통이 있다. 전 세계적으로 우리만이 유일하게 같은 민족을 노예로 부렸는지는 좀더 조사연구가 필요하다. 아무튼 우리나라는 같은 민족이면서 피부색이 같지만 태어난 '신분'에 따라 누구는 상전이었고 누구는 종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군대에서 고참이 되면 같은 민족이며 같은 인종인 신참을 다만 '신분'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전리품 노예처럼 부리고 죽도록 팼을까? 그래서 조주빈은 같은 민족이고 같은 인종인 소녀들을 전리품처럼 성적으로 착취한 것인가? 그래서 6.25 때 공산당 완장을 찬 머슴들이 지주의 귀를 자르고 “많이 아프냐”고 실실 웃었던 것일까? (TV에 나온 어느 노인의 증언.) 아니면, 이런 잔혹한 사회상을 고도 경제성장의 물질지상주의가 낳은 ‘과도기적 규범 와해’란 부작용으로 진단해야 할까? 그것도 아니면, 좁은 국토에서 많은 사람이 부대끼고 경쟁하다 발생한 약육강식의 ‘사회적 다윈주의’라고 봐야 할까? 어쩌면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며 자기들 끼리끼리 뭉쳐서 남을 원천적으로 배제하는 '속 좁은 연고주의의 변형'은 아닐까?
대학에서 30년간 지식을 전수했지만, 항상 내 가슴에 남아 있는 아쉬움은 ‘교육은 인간을 가르쳐야지 지식만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지식은 교과서에 다 나와 있다. 학생이 배우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선생님 그 자체다”라는 경구가 교수 생활 30년 내내 내 뇌리를 맴돌았다. 그래서 신입생이 입학하면 그들에게 꼭 선언하는 게 있다. 대학은 지식과 더불어 인간을 교육하는 곳이라고.
지식과 더불어 인간 교육의 수단으로 내가 스스로 고안한 것이 실력(능력) 차원과 인간성(인격) 차원에 따른 네 가지 인간 유형이다.
우선 실력이란 사람 개개인의 직업적 능력을 말한다. 학생에게 실력은 성적, 외국어 능력 등이다. 회사원에게는 일 처리 능력, 업무역량이 실력이며, 주방장에게는 요리 실력이, 가수에게는 노래 실력이, 주부에게는 살림 실력이 요구된다. 하다못해 조폭에게는 주먹 실력이란 능력이 있어야 한다.
인간성의 척도는 대단한 철학적 기준에 따른 것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인간성의 평가 척도는 그저 상식적이고 생활 속의 기준이다. 흔히 저 사람 좋다, 착하다, 성실하다, 법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게 곧 ‘인간성 좋다’는 걸 뜻한다. 새치기하고, 남 욕하고, 욕심쟁이 놀부 심보를 지녔고, 서부영화에서 사람들을 괴롭히는 악당 같은 사람이 곧 ‘인간성 나쁜 사람’이다.
이러한 ‘실력 유무’와 ‘인간성 좋고 나쁨’에 따른 ‘네 가지 인간 유형’은 다음과 같다.
박원순 사건 피해자 2차 가해는 우리 사회의 고약한 심성 표출
실력과 인간성에 따른 네 가지 인간 유형 보고, 각자 반성 필요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
네 바퀴로 가는 자전거
물 속으로 나는 비행기
하늘로 뜨는 돛단배
복잡하고 아리숭한 세상 위로 오늘도 애드벌룬 떠 있건만
포수에게 잡혀온 잉어만이 한숨을 내쉰다.
시퍼렇게 멍이들은 태양
시뻘겋게 물이든 달빛
한겨울에 수영복 장수
한여름에 털장갑 장수
복잡하고 아리숭한 세상 위로 오늘도 애드벌룬 떠 있건만
태공에게 잡혀온 참새만이 눈물을 삼킨다.
남자처럼 머리 깎은 여자
여자처럼 머리 긴 남자
백화점에서 쌀을 사는 사람
시장에서 구두 사는 사람
복잡하고 아리숭한 세상 위로 오늘도 애드벌룬 떠 있건만
땅꾼에게 잡혀온 독사만이 긴 혀를 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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