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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철 칼럼] 트럼프 지지자 미국 의회 난입은 민주주의 규범 상실...진짜 위기는 '나라의 진로' 숨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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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철 칼럼] 트럼프 지지자 미국 의회 난입은 민주주의 규범 상실...진짜 위기는 '나라의 진로' 숨기는 것
  • 발행인 정태철
  • 승인 2021.01.10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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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는 사회주의와 개인주의의 대결...그 과정에서 민주주의가 승리
최근 푸틴·트럼프 등 민주주의 취약점 선거 악용하는 선출된 권력자 득세
트럼프 지지자 미 의회 난입 이후, 상호 존중과 권력 자제의 민주주의 규범 상실
권력 목표가 무언지 모르고 투표하면, 두려운 미래 맞을 것

‘세상을 바꾼 변호인(On the Basis of Sex)’은 2018년 개봉한 미국 영화다. 1950년대 한 여학생이 하버드 대학 로스쿨을 수석으로 졸업하지만, 남녀 차별이 심한 당시, 로펌 취업 면접을 볼 때마다 남자 면접관으로부터 모욕적인 말을 들으며 번번이 거부당한다. 할 수 없이 간신히 법대 교수가 되어 자녀를 양육하며 주로 남녀 차별 사건 변호를 맡았던 그녀는 미국에서 성차별이 합법이라고 당당하게 규정한 법률 조항이 178개에 달한다는 사실을 밝혀냈으며, 일생을 통해서 미국 사회의 성차별적 구조 철폐를 위해 싸운다. 그녀가 바로 얼마 전 작고한 미국 연방 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다. 긴즈버그 대법관은 남녀 불평등 사회를 구조적으로 변화시킨 위대한 인물로, 작고한 이후에도 여전히 미국인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다고 한다.

“Change the world!” 세상을 바꾸자는 말은 젊은이들에게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정치인이 되기를 원하는 청춘들 가슴에는 아마도 세상을 바꾸고 싶은 야망이 충만해 있을 것이다. 기사 하나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얘기를 해주면, 대개 신방과 학생들은 사기가 오르고 기자의 꿈을 다진다.

인류 역사는 곧 세상을 바꾸고 싶은 가슴 뜨거운 영웅들이 쓴 서사시가 아닐까. 로마 시대 노예의 정의는 ‘노예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없는 자’였다고 한다. 가사노동, 농업, 검투사 등에 부림을 당했던 노예들은 결국 세 번의 노예 반란을 통해서 세상의 변화를 도모했는데, 그중에서 세 번째 노예 반란을 검투사 출신 리더 의 이름을 따서 ‘스파르타쿠스의 난’이라고 한다. 이 외에도 흑인 노예 해방, 여성참정권 운동, 우리나라의 동학운동, 3.1 독립운동, 독재 타도 민주화 운동은 모두 세상을 바꾸고 싶은 민초들의 염원이 담긴 간절한 투쟁이었다.

거시적으로 볼 때, 인류는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사회 중심(사회주의 혹은 집단주의)이냐 개인 중심(개인주의)이냐는 두 체제 중 하나를 지키려는 자와 바꾸려는 자 간의 대결로 봐도 과언이 아니다. 개인주의는 사회보다는 개인의 자유와 사유재산을 중시했고, 플라톤의 국가론은 사회 이익, 평등, 의무가 개인 자유, 권리에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양자는 인류 역사를 통해서 현실 세계의 대안으로 서로 밀고 당겼다.

영국의 사상가 토마스 모어는 1518년 ‘유토피아’란 저서에서 구성원 전체가 농업에 종사하고, 모든 것을 공유하며, 공동생활의 규칙을 엄수하면서 사는 사회주의 세계를 묘사했다. 그러나 개개인의 사유재산이 살아 있는 세상은 어떻게 하고 누가 어떻게 지상낙원 같은 유토피아를 건설할 것인지, 토마스 모어는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영국의 사회주의자 로버트 오웬은 산업혁명기에 거대한 방직공장을 경영해서 번 돈으로 공동체적 협동조합을 건설하려다 사유재산을 부정한다는 비판에 쫓겨 1824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인디애나 주의 뉴하모니란 곳에서 거대한 땅을 구입하고 실제 공동체를 건설했다. 일종의 ‘회원 모집’으로 희망자를 모아 시작한 그의 공동체는 3년 만에 ‘폭망’했다. 학자들은 로버트 오웬의 뉴 하모니 공동체 운동을 ‘공상적 사회주의’라고 불렀다. 그는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 대안으로 사회주의를 모색했으나, 각자가 사유재산을 움켜쥐고 있는 자본주의를 회원 모집 같은 순진한 방법으로 사회주의화하기는 요원했다.

이에 비해, 마르크스는 ‘자본’이란 책을 통해서, 자본주의의 양극화 모순과 생산양식을 지배하는 자가 사회의 모든 영역을 독점한다는 경제결정론을 근거로, 자본주의는 계급혁명에 의해 필연적으로 사회주의로 간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과정을 경제학 이론으로 증명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마르크스 이론은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이름이 붙었다. 계급 양극화 → 계급갈등 → 계급혁명으로 이어지는 마르크스의 계급혁명론은 오버트 오웬의 회원 모집보다는 이론적 설명력은 강했지만, 구체적 실천 전략이 없었다.

1917년, 레닌은 제정 러시아를 군사력으로 장악해서 대지주가 지배하던 봉건적 농업국가 러시아를 일시에 공산국가로 변모시켰다. 레닌의 공산화 전략은 무장봉기에 의한 ‘무장투쟁론’ 또는 ‘모험주의’라고 한다. 마르크스 이론에 무력이란 실천 방법을 가미한 레닌의 노선을 후세 학자들은 ‘마르크스-레닌주의’라 불렀다. 이 노선이 중국, 북한, 쿠바 등의 공산화에 영향을 미쳤다. 한국전쟁도 이 노선의 희생양이었다. 60-70년대 소련의 지원을 받아 각종 무기로 무장투쟁을 벌인 남미의 ‘체 게바라’ 식 공산 게릴라들도 레닌의 무장투쟁론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러시아 공산화 이후 레닌은 국유화, 협동농장과 협동조합 운영을 위해 지주와 지식인을 탄압하고 공산주의 사상을 강요해야 했으며,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은 비밀경찰을 시켜 시베리아로 유배시키거나 제거해야 했다. 무솔리니에 의해 투옥된 이태리 공산주의자 그람시는 이런 러시아 상황을 감옥에서 지켜보고 1926년 ‘옥중수기’라는 책을 집필했다. 여기서 그람시는, 무력에 의한 강제적 사회구조 변화는 비인간적이므로, 점진적 설득으로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사유재산을 포기하고 공산화에 동조하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산주의 사상에 투철한 전위대(그람시는 이를 유기적 지식인이라 함)가 각자의 위치에서 꾸준한 설득 운동(그람시는 이를 진지전이라 함)을 벌여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국민이 스스로 따라올 때 비로소 사회변혁의 헤게모니를 잡을 수 있다고 했다. 이를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이라고 한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은 1980년대와 1990년대 사이에 유기적 지식인을 자처한 전교조, 우리법연구회, 노동조합, 예술인, 종교인, 시민운동가, 언론인들에 의해 우리나라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여러 사상적 조류가 뒤섞인 이들의 진지전 결과가 현재 40대와 586 여당 철옹성 지지 세력으로 나타난 것이란 해석이 가능하다. 유기적 지식인의 진지전은 단기 성과보다는 대체로 장기적이어야 효력이 있는 듯하다.

산업사회의 자본주의 세력이 이런 사회변혁 운동에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프랑스 철학자 알뛰세르는 20세기의 자본주의 지배 구조는 자본 엘리트와 국가 엘리트의 연합에 의해 유지된다고 봤다. 일종의 정경 연합체가 자본주의적 지배 이데올로기를 영속화시키기 위해 이데올로기 국가기구(ISA, Ideological State Apparatus)와 억압적 국가기구(RSA, Repressive State Apparatus)를 장악하고 이용한다는 것이 알뛰세르 이론의 요체다. ISA는 이데올로기를 만들고 전파하는 곳으로 종교, 교육, 가족, 입법부, 정치, 노동조합, 언론, 문화를 말하며, RSA는 지배 이데올로기 수용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억압하거나 구속하는 곳으로 경찰, 법정(사법부), 감옥, 군대 등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국가가 ISA를 통해서 자본주의적 지배 이데올로기를 사회에 전파시키고, 이를 거부하는 사람은 RSA를 동원해서 강요한다는 것이다. 이를 알뛰세르의 ‘이데올로기 이론’이라고 하며, 3권을 장악했던 전두환 정부가 이데올로기 이론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우파적 시각에서 문재인 정부를 비민주적인 권위주의라고 비판하는 이유는 곧 문 정부가 ISA와 RSA를 장악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ISA에서 우파 유튜브가 저항하고, RSA의 한 축인 사법부에서 윤석열 우호 판결이 나온 것을 보면, 현 정부의 ISA와 RSA 장악은 전두환 시절처럼 순조로운 것 같지는 않다.

20세기를 거쳐 21세기에 이르는 동안, 세계는 냉전체제라는 자본주의 대 공산주의의 대립을 거쳐 미국과 서유럽 중심의 민주주의적 규범과 제도가 지배해 왔다. 민주주의는 하나의 정치 집단이 영구히 모든 권력을 장악할 수도 없는 제도다. 이를 보장하는 보험이 선거다. 선거는 법이 정한 주기에 따라서 국민들이 투표로 통치 집단을 바꾸는 기회다. 세상을 바꾸려고 무력을 동원할 필요가 없다. 선거에서 이기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선거로 얻은 정당성을 남용하는 선출된 권력자가 민주주의의 위기를 부르고 있다(사진: pxhere 무료 이미지).
선거로 얻은 정당성을 남용하는 선출된 권력자가 민주주의의 위기를 부르고 있다(사진: pxhere 무료 이미지).

미국과 영국, 그리고 서유럽의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과격한 노동조합이나 사회변혁 운동 단체들이 국민들에게 표를 얻는 정당 활동으로 운동 방식을 전환했다. 이게 영국이나 프랑스 등지에서 무장투쟁이나 계급혁명 방식의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였다.

그러나 민주주의에서 선거라는 제도는 또 다른 문제를 잉태하고 있었다. 히틀러도 선거로 당선된 이후 국민 마음을 민족주의로 훔치면서 세계 정복이 나섰고, 푸틴도 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장기 집권이 가능토록 헌법을 개정했으며, 대통령은 임기 후 형사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대통령 면책특권도 최근 가지게 됐다. 푸틴의 독재 탄탄대로는 선전이든 선동이든 모두 선거를 통해서 합법성을 얻었다.

선거란 언론의 정보 제공 → 정부 감시 → 여론 형성 → 여론에 따른 투표로 정권을 교체하는 행위다. 그런데 교묘한 선거전략으로 국민 마음을 움직이면 우호적인 여론을 등에 업고 선거에서 이겨 정당한 ‘민주적 권위주의’가 가능하게 된다. 이를 ‘민주 독재’, ‘독재 면허’, 또는 ‘다수의 폭정’이라고 한다.

일종의 민주주의 제도 취약점이 몇몇 선거 권력자들에 의해 자행되는 일이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들의 공통적인 방법은 마치 기업이 소비자에게 물건을 팔기 위해 마케팅 전략으로 파고드는 것처럼 국민 여론을 얻을 수 있는 고도의 선거전략을 펼친다는 것이다. 그 수단 중 하나는 ‘정책 카드’라고 불리고, 다른 하나는 점잖은 용어로는 ‘뉴스 관리(news management)’라 하고, 시쳇말로는 언론플레이, 이미지 조작, 정치쇼라고 불린다. 그리고 이 정책 카드와 뉴스 관리는 절묘하게 뒤섞인다. 새로운 생각이 어떻게 사회에 전파되는지를 연구한 에버렛 로저스는 “인류가 추구한 사회변화의 최대 적은 칼이 아니라 인간의 평상시 마음”이라고 했다. 민주 사회 권력자는 어떤 방법을 취하든 유권자의 마음을 사서 표를 받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미국 정당들이 대통령 후보를 확정하는 전당대회는 조명, TV 카메라, 밴드가 동원되니 형식이나 내용이 비욘세나 BTS 콘서트와 다를 바 없다. 최근 트럼프 지지자들의 행동은 연예인 팬덤과 무아지경 충성도에서 전혀 구분이 안 된다. 전당대회 직후에 선거전 후보들의 인기가 상승한다. 이를 컨벤션 효과라고 부른다. 정치인의 의도적 이벤트가 잘 먹힌다는 얘기다. 미국 대통령 선거 토론전을 보면, 정책이나 인품 대결이 아니라 번드르르하게 말 잘하고 재치 있는 퀴즈왕을 뽑는 것 같다. 미국 사학자 부어스틴은 그의 저서 ‘이미지와 환상(The Image)’에서 미국 대통령 후보 토론전을 “40만 달러(1960년대 미국 대통령 4년 연봉) 상금왕 선발대회”라고 악평했다.

트럼프의 정책 카드는 아랍인 입국 금지, 멕시코 국경 봉쇄, 이민자 범죄자 취급 등으로 국민을 흑백으로 분열시키고 인종차별을 선동한다. 미국 의회에 난입한 극우주의자들은 트럼프의 광신도 지지층을 상징한다. 그래서 트럼프의 인기 영합적 정책 카드와 광신적 지지자들이 결합해서 미국의 민주적 대통령제를 위협한다고 미국 언론들이 진단하고 있다.

한국 언론들도 수시로 ‘정책 카드’란 표현을 쓴다. 가덕도 신공항 카드, 전직 대통령 사면 카드, 세종시 국회 이전 카드, 백신 접종 카드라는 말이 나오니 말이다. 야당은 각종 대통령 주관 행사를 탁현민 ‘이미지쇼’라고 비판하고, 대한민국 탄소 중립 선언식 중계 때 KBS에게 흑백 영상 송출을 지시했다고 해서, KBS 노조는 탁현민을 ‘왕PD’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바이든이 중국이나 러시아 등 비민주주의 국가들의 득세를 막으려고 ‘민주주의 정상회의’를 계획하고 있는 가운데, 트럼프가 선동한 극우파가 의회를 난장판으로 만들었으니, 정말 내가 아는 미국이 맞는지 우려된다. 선출된 지도자가 오히려 권위주의적 통치자가 되는 현상은 명백한 민주주의의 쇠퇴 현상이다. 미 언론들은 “현대사에 전례 없는(unprecedented)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이라고 했고, 부시 전 대통령은 “반란”이라고 경악했다.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 하버드대 교수는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How Democracies Die)’라는 저서에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선출된 권력이 정치적으로 다른 집단을 공존의 대상으로 봐야 한다는 ‘상호관용(mutual toleration)’과, 권리 행사에서 절제와 신중함이 필요하다는 ‘제도적 자제(institutional forbearance)’가 작동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선출된 권력자의 관용과 절제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본다. 관용과 절제는 선거 승리에 도움이 되지 않는 한 절대로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관전 포인트는 선거 승리 이후에 있다. 과연 그들이 각종 ‘카드’와 ‘정치쇼’로 국민을 선동해서 선거에 이긴 후 ‘나라를 어디로 끌고 가려는 거냐’가 더 중요하다. 그게 모호하게 숨겨진 상태일수록 국민은 미래를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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