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빅 인턴 출신 언론인들, "시빅뉴스는 나를 키운 둥지"
김수정, 조윤화, 백창훈, 김연수, 김강산 씨, "후배들도 꿈 갖길" 당부
공공 저널리즘 정신으로 시민의 목소리를 대변해온 ‘시빅뉴스’가 창간 8주년을 맞았다. 2013년 3월 15일, 경성대학교 학교기업으로 출발한 시빅뉴스는 ‘작은 것도 크게 보는 시민언론’이란 캐치프레이즈 아래, 대학 안팎의 소식과 지역뉴스를 객관적이고 심층적으로 보도·논평하면서 공공 저널리즘의 지평을 열어왔다. ‘시빅(civic)’이란 제호는 ‘시민’과 ‘see big(크게 본다는 뜻)’이란 중의적 의미를 품고 있다.
시빅뉴스는 2015~2016년 2년 간 교육부 및 한국기술진흥원의 지원을 받았으며, 2017년엔 네이버와 다음 등 포털과 기사검색 제휴사로 선정되어 실시간 포털로 기사를 내보내고 있다.
시빅뉴스 창간 8주년을 기념해 시빅뉴스의 인턴 등을 거쳐 언론계 및 미디어 분야에 진출, 맹활약을 펼치고 있는 경성대 출신 시빅뉴스 인턴기자 5명의 활동과 포부, 그리고 후배에 대한 당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4년 전 무더운 여름, 시빅뉴스는 제 작은 어깨에 날개를 달아 줬습니다"
어느새 봄기운이 스며들고 새로운 시작에 설레는 달, 3월의 둘째 주, 벌써 시빅뉴스의 여덟 번째 생일이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언론인이라는 꿈을 가진 신문방송학도에게 기회와 소통의 장을 열어줬던 소중한 그때 기억이 떠오릅니다.
고등학생 시절, 동아일보에서 ‘고교생 기자단’으로 활동한 적이 있습니다. 학생의 신분으로 학교 내 소소한 일상을 신문과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통해 전하는 건 가슴 뛰는 일이었습니다. 확신은 없었지만 언론인이 되고 싶다는 꿈을 막연히 가지고 경성대 신문방송학과(현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학과)에 진학했습니다.
새내기 시절, 시빅뉴스의 문은 참 높고도 커 보였습니다. 그곳에서 근무하는 선배들은 동경의 대상이 되곤 했죠. 그래서 틈틈이 작성한 서평과 영화감상평이 독자투고로 시빅뉴스에 기고되면, 가족과 주변 지인에게 활발히 공유하며 자랑했습니다. 시빅뉴스는 제 작은 어깨에 날개를 달아줬습니다.
그렇게 교수님들의 가르침을 통해 조금씩 부족한 부분을 개선하고 성장해가며 저는 4년 전, 제대로 시빅뉴스의 문을 두드리게 됐습니다. 더위가 한창이던 여름, 시빅뉴스의 인턴 취재기자로 근무했습니다. 인생의 첫 명함, 첫 직장, 사무실, 내 자리, 소속감과 사명감으로 첫 기사를 작성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르포 등 다양한 기사를 작성했지만, 저는 주위를 둘러보며, 가까운 우리 지역, 우리 동네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좀 더 관심을 가졌습니다. 여러 기성 언론들이 자기들이 생각한 뉴스 가치에 적합한 소재에 집중하느라 미처 소외된 이야기는 없는지 귀 기울이고 싶었습니다. 작은 것도 크게 보는 시민언론 시빅뉴스의 순기능을 살리고 싶었습니다. 내리쬐는 태양에 조금만 걸어도 금세 젖었던 2017년 여름, 저는 두 달간 총 56편의 기사를 작성했습니다.
크고 높았던 시빅뉴스의 문이 익숙해졌고 종종 들리는 소식에 그리워지는 2021년 지금, 저는 2년 차 아나운서입니다. 시청자의 작은 목소리가 모여 큰 움직임이 되도록 돕고 싶습니다. 제 이력서에 자리한 시빅뉴스에 대해 긍정적인 관심을 보이는 면접관들도 여럿 만났습니다. 덕분에 지금 제가 이 자리에 있는 거겠죠. 누구에게나 첫 시작은 꿈틀, 약간, 조금이라는 표현을 붙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작은 것들이 모여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갈 발판이 될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시빅뉴스의 창간기념일을 축하드립니다.
"기자 꿈꾸는 후배들아, 해답은 '닥치고' 시빅뉴스 인턴이다!"
지난 2016년 경성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입학해 올해 2월 졸업하기까지, 내 대학생활을 돌이켜 보면, 그 가운데 시빅뉴스가 큰 존재감을 내뿜고 있다. 언론인이 아닌 그 무엇도 꿈꿔본 적 없는 내게, 시빅뉴스는 경성대학교 신문방송학과 학생으로서 내게 주어진 큰 특권이자 기회였다.
2018년, 3학년이 됐을 때 나는 시빅뉴스 인턴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당시 "많이 힘들 것"이라며 주변에서 말리기도 했지만, 나는 기자가 되고 싶었고, 그냥 기자가 아닌 좋은 기자가 되려면 무엇보다 기사를 잘 써야 할 텐데, 기사를 잘 쓰기 위해선 많이 쓰는 방법밖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단순히 ‘기사를 많이 쓸 수 있는 환경에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으로 큰 고민 없이 시빅뉴스 인턴에 지원했던 것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시빅뉴스 인턴으로 일하게 된다면 내게 나쁠 건 정말 하나도 없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시작하게 된 시빅뉴스 인턴은 예상보다 만만치 않았다. 매일 어떤 기사를 써야 할지에 대한 발제 스트레스는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고, 당시 나는 주말 아르바이트도 병행해야 했기 때문에 단기·장기 인턴으로 일하는 6개월 동안은 정말 단 하루도 쉴 수 없었다. 그럼에도 매일 기사 쓰는 속도가 점차 빨라지는 스스로의 모습을 알아차리게 됐을 때, 그리고 간혹 내가 생각해도 ‘이 기사는 정말 잘 썼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기자를 직업으로 삼아도 되겠다는 확신이 듦과 동시에 시빅 인턴 하기 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시빅뉴스에서 인턴으로 일 한 경험은 취업준비활동에 정말 큰 도움이 됐다. 시빅뉴스 인턴경험은 면접자리에 갈 때마다 면접관들이 빼먹지 않고 하는 질문 중 하나였고, 자기소개서마저도 인턴으로 일하면서 경험한 내용을 바탕으로 큰 무리 없이 작성할 수 있었다. 예컨대 왜 기자가 되고 싶으냐는 물음에 대해선 나는 내가 쓴 [“목숨 걸고 지하철 탈 순 없다”...장애인 연대, 지하철 리프트 철거 촉구] 기사를 언급하며 상대적으로 사회적 발언권이 약한 이들의 입장을 대변하고자 기자가 되려 한다는 대답을 할 수 있었다.
시빅뉴스는 내가 기자라는 꿈을 이루는 데 가장 실질적인 도움을 준 존재다. 내가 시빅뉴스 인턴으로 일한 경험이 없었더라면 나는 ‘졸업하기 전 취업’이라는 목표를 이룰 수 없었을 거라 확신한다. 만일 기자를 꿈꾸는 후배들이 있다면 무조건 시빅뉴스 인턴을 추천하고 싶다. 스물 두 살이란 어린 나이에 인터넷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할 수 있는 경험은 그리 흔한 기회가 아니니 말이다.
이렇게나 내게 특별한 의미로 남아있는 시빅뉴스가 올해로 8주년을 맞이한다니 감회가 새롭다. 시빅뉴스가 내게 그래 줬던 것처럼 앞으로 몇십 년이고 명맥을 이어나가 언론계에 종사하려는 후배들에게 큰 도움이 되는 존재로 굳건히 남아있었으면 한다.
"시빅뉴스는 기자 육성 사관학교, 창간 8주년 계기로 언론 중의 언론으로 발돋움하라!"
시빅뉴스 창간 8주년을 축하합니다. 대학교 최초 네이버 등 포털사이트와 뉴스검색제휴사로 선정된 시빅뉴스에서 기자라는 꿈을 펼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경성대 부속 언론사라는 타이틀을 넘어 한국 사회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길 수 있는 대안 언론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저는 경성대 신문방송학과 13학번 졸업생이자 2018년 시빅뉴스 하계 방학 인턴기자였습니다. 당시 시빅뉴스에서 일할 때 하루하루가 즐거웠습니다. 날 것의 기자로서 열정 넘치는 초년병 시절을 다녀나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시기 기사 한 건을 쓰기 위해 사회 이슈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분석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쓴 대표 기사가 ‘군함도 생존자 인터뷰’ ‘영화 허스토리 실존 인물 인터뷰’ 등 입니다. 지금 봐도 후회하지 않을 만큼의 자부심이 깃든 결과물들이죠.
시빅뉴스에서 제 가치를 인정받아 부산 일간지 국제신문을 거쳐 지금은 통신사 ‘뉴스 1’에 취재기자로 있습니다. 정태철 교수님, 강동수 교수님 등 뛰어난 실력의 은사님들 덕분에 기자라는 꿈을 거머쥘 수 있었습니다.
사실 요즘 한국 사회에서 언론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습니다. 마구잡이식 보도, 팩트가 검증되지 않은 가짜뉴스 등으로 ‘기자’라는 직업이 얼룩진 탓이겠죠. 기자 육성 사관학교 역할을 하는 시빅뉴스가 언론의 오명을 벗겨 광명을 찾는 역할이 되었으면 합니다. 다시 한번 시빅뉴스 창간 8주년으로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시빅뉴스는 나의 자양분...인턴하면서 나는 정말 기자처럼 살았다"
버스킹을 해보신 적 있으신지요? 그 짜릿한 경험. 전 못 잊습니다. 기타도 못치고요. 노래도 못하는데요. 실은 시빅뉴스가 제겐 버스킹 무대였습니다. 세상에 무수히 많은 일들에 궁금증을 품고 살던 제 20대 중반에 시빅뉴스는 끓어오르는 창작욕을 마음껏 발산하는 소중한 무대가 돼 주었습니다.
첫 취재지는 소막마을이었습니다. 골목골목을 며칠 내내 걸었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깊은 이야기 나누고 사진도 찍었죠. 도서관에선 관련 학술자료와 서적을 읽고 메모하고, 또 전문가에게 자문도 구했습니다. 정말이지 제 모든 열정을 쏟아부었어요. 아직도 기억이 새록새록합니다. 공들여 쓴 기사가 인터넷 공간에 딱 올라왔을 때 그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통쾌했지요. 이러한 경험은 제 능력을 객관화해보는 귀중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선명해졌죠. 기자라는 꿈이. 그때 저는 질곡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으며 이제는 그러한 한 세대로서 저물어가는 노인들, 그 개개인을 대변하는 기자가 돼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시빅뉴스가 없이 지금의 저를 상상할 수 없습니다. 혹자는 왜 그렇게까지 열심히 했냐고 물을지도 모릅니다. 누군가에겐 고작 대학 전공수업 중 현장실습이었을 테니까요. 적당히 A만 받을 정도로 해도 돼잖아요. 그런데 제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정말 기자처럼 살았던 나날이었습니다. 취재현장 어디서든 시빅뉴스 기자라고 당당히 말하십시오. 저는 인터뷰 안 해주면 직접 찾아가서 물었습니다.(웃음) 지금 기자 생활에도 시빅뉴스 기자로서 했던 다양한 활동이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후배님들에게 과감하게 말씀드립니다. 시빅뉴스는 어마어마한 저력을 가진 시민언론입니다. ‘작은 것도 크게 보라’ 정말 좋아하는 캐치프레이즈입니다. 20대 대학생이자 기자, 그 무한한 가능성으로 기성 언론에 하이킥을 날리십시오.
늘 펄떡펄떡 뛰는 언론이기를 기도합니다. 건승하십시오!
"글에 묻혀 사는 방송 작가에게 시빅뉴스는 직무능력의 원천이었다"
‘궁금한 건 유튜브에 물어봐요.’ 얼마 전 본 기사 제목이다. 요지는 제목 그대로. 요즘 세대는 모르는 것에 대해 알고 싶어질 땐 네이버, 구글 등 포털 사이트에 검색을 통해 나온 ‘텍스트’가 아닌 유튜브로 대변되는 ‘영상’을 통해 그 궁금증을 해소한다는 것.
늘 글을 쓰는 것을 즐겼고, 신문 기자가 되기를 꿈꿨던 나에게는 씁쓸한 소식이었다. 다만 그렇다고 ‘글’이 지닌 힘이, 그 가치가 사라지고 있는 걸까? 대단치는 않지만 나름 영상을 만드는 방송국에서 일하는 내 대답은 ‘NO’다. 역설적이라고? 그렇지 않다. 새 프로그램이라는 건물의 뼈대를 담당하는 기획 단계부터, 그 뼈대에 살을 붙이는 대본, 깔끔한 인테리어의 마감과도 같은 자막을 입히는 단계까지 모든 곳에 ‘글’이 숨어 있다.
나는 그 '글' 쓰는 기술을 시빅뉴스를 통해서 배웠고 글 쓰는 기교를 경성대 신방과 교수님들의 지도를 받으며 키웠다. 방송국 작가하면서도 글에 뭍혀 사는 나에게 그래서 시빅뉴스는 내 직업적 직무능력의 원천(源泉)이었다. 시빅뉴스가 창간 8주년을 맞이했다니, 작지만 소중한 시빅뉴스 성장의 한몫을 수 놓았던 나로서는 기쁘기 한이 없다. 교수님들과 후배들이 함께 만들어 가는 시빅뉴스의 발전을 졸업생의 한 사람으로 열렬히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