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부터 이론 50% 실습 50%의 교육과정 개편하고 실행 중
각종 언론과 신방과 교수들, 경성대 신방과 교육 개혁에 주목...서서히 그 효과 드러내다
1989년, 경성대 신문방송학과의 탄생
나는 올 8월로 나이 만 65세가 되어 은퇴하게 된 경성대학교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학과(신문방송학과에서 2021년부터 명칭 변경) 교수다. 1989년 설립되어 겨우 1학년과 2학년 학생밖에 없던 이 초라한 학과에, 나는 1990년 학과 두 번째 교수로 발을 들였다. 그리고 2021년 내 교수 생활 마지막 63번째 학기를 보내고 있다. 정년을 눈앞에 두고 이 세상 사람들이 읽고 기억해 주었으면 하는 소망으로 그동안 이 학과가 벌여온 ‘교육 개혁 도전기, 그 30년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려고 한다.
경성대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학과의 30년 역사는 성공 신화도 아니고, 그렇다고 폭망 실패담도 아니다. 일부 성공, 일부 실패, 그리고 일부 현재진행형인 아직도 미지수 도전기다. 나와 우리 학과를 현재도 지키고 있거나 다녀간 여러 교수들과 학생 제자들이 힘 모아 시도한 도전은 때로는 간절했고, 때로는 아름다웠다. 뿌듯한 것은 뿌듯한 대로, 안타까운 것은 안타까운 대로 우리의 기록을 있는 그대로 읽어 주기 바란다.
최근 페이스북에 대학 서열에 관한 글이 하나 올라왔다. 지명도나 신뢰도가 있는 페북 페이지는 아니었지만, 여기에는 ‘사회에서 만나 본 출신 대학별 느낌’이란 제목의 글이 하나 실렸다. 작성자 이름도 없는 이 글은 출신 대학에 대한 ‘길바닥’ 정서를 제법 실감 나게 표현해 놓았다, 이 글이 분류한 1등급 대학은 ‘해외 명문대’, 2등급은 ‘해외 그저 그런 대학’이다. 그다음부터는 국내 대학인데, 3등급은 ‘스카이 대학’, 4등급은 ‘서성한중경외시(‘시’는 서울시립대인 듯)+이화대학’, 5등급은 ‘건동홍+부산·경북+인하·아주 대학’, 6등급은 ‘인서울 하위+지거국(전남·충남·경상 등 지역거점대학인 듯)’, 7등급은 ‘지거국 제외 지방 국립대(부경·해양·교대 등)’, 8등급은 ‘지방 유명 사립대’, 9등급은 ‘기타 지방 사립대’, 10등급은 ‘고졸’이었다.
내가 32년 봉직한 경성대는 이 10등급 서열 분류에 의하면 ‘9등급 기타 지방 사립대’다. 여기에 나와 있는 표현들은 옮기기가 역겨울 정도지만, 대강 그 안에는 “니들도 잘 알 거임. 그냥 쓰레기 취급당함”, “그게 어디 있는지, 뭐 하는 대학인지 잘 모르는 수준”, “등록금만 비싸서 불효자 소리 듣기 딱 좋음”, “그래도 4년제라서 졸업장만 따면 고졸보다 할 수 있는 일들의 범위가 커짐” 등의 세평이 처참하게 휘갈겨 있다.
내 제자들이 그런 소리를 들을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은 절대로 아니지만, 내가 소속된 대학과 내 제자를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낮춰 볼 수도 있다는 현실에 마음이 가볍지 않다. 그러나 1990년 3월, 교수 인사 발령을 받고 부산 경성대 신문방송학과(현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학과) 교수가 된 나는 학교 수준, 학생 수준을 잘 알지도 못했고 별 관심도 없었다. 서울이든, 제주도든 지역이 무슨 상관인가, 그저 신바람 나게 연구하고 땀 흘려 가르치다 보면, 내 제자들이 사회에서 그런 천대를 받는 일은 없게 할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순진한’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열 받아서 학과발전계획서를 쓰고 또 쓰다
철없는 신참 교수의 어설픈 꿈이 깨지는 데는 1주일이 채 걸리지 않았다. 신임 교수에게 인사치레로 고향과 출신 학교 등을 물어본 주변 고참 교수들이 모 학과 모 교수가 고향 모교 선배라는 사실을 친절하게 알려주었고, 외로운 타향에 학교 선배가 있다니 반가운 마음에 즉시 선배 연구실을 두드려 인사를 드렸다. 쇠뿔도 단김에 뺀다고, 그날 저녁 그 선배와 나는 같이 소주잔을 기울이게 됐다. 술기운이 오르자, 선배 교수는 나에게 “정 교수, 여기서 ×대가리들 가르쳐 뭐해? 젊었을 때 부지런히 연구해서 어서 서울로 뜨라고”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그 순간 젊은 혈기에 욱했던 나는 “선배님, 죄송하지만, 저는 학생들이 ‘다이아몬드’ 머리라 해도 그저 열심히 가르쳐 볼 생각 뿐입니다”라고 외치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씩씩거리며 연구실로 되돌아왔다. 밤 9시. 화가 가시지 않은 나는 백지를 꺼내서 학과 발전계획을 끄적였다. 그 선배하고는 그 후로 한 10년간 말 한마디 안 하고 서로 냉담했다.
학과 발전 계획서를 쓰고 지우고를 반복하던 1990년대 초반 무렵, 신문에 난 강릉대 반도체 공학과의 얘기는 이 세상 어느 수준의 대학이든 노력하면 안될 일이 없음을 나에게 일깨워줬다. 이 학과 교수들은 간판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의 벽을 해외 유학으로 단번에 깨보자는 욕심으로 학생들에게 영어와 전공을 악바리처럼 공부시켜서 15년 뒤에는 30여 명의 학생들을 미국 유수 대학으로 유학 보낸 전설적 성과를 창출했다. 연구실에서 학생들과 침식을 같이 하며 주말만 퇴근하는 어느 공대 교수 이야기도 언론을 탔고, 어느 대학 교수는 백지를 낸 학생 답안지를 복사해서 부모에게 등기로 부쳐 주었다는 뉴스도 있었다. 세상은 제자들을 교육하기 위해 온몸을 던져 노력하는 교수들이 많이 있음을 나에게 웅변으로 전하고 있었고, 이에 고무받은 나는 전율했다.
서서히 꿈틀거리는 미국 미주리 저널리즘 스쿨 식 실무 위주 교육 개혁
그런 나에게 서울로 뜨라니? 고향 선배 교수는 완전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나는 신설학과인 경성대 신방과에 올 때부터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유학했던 미국 미주리 대학교 저널리즘 스쿨(journalism school, 언론학과, 혹은 그냥 신문방송학과와 같다고 보면 된다)의 기자 양성 교육 시스템을 구현해보자는 것이었다. 그게 바로 교수로서 내 인생을 바칠 목표였고, 부임 초기에 선배와 술 먹다 홧김에 끄적였던 학과 발전 계획도 바로 이것이었다. 이 목표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학과의 교육과정을 뒤집어엎어야 하기에, 20년, 30년 역사를 가진 오래된 학과에서는 계획 시도조차 불가능했다. 그게 내가 신설학과를 찾아 ‘신바람’나서 남쪽으로 날아온 이유였다.
미주리 저널리즘 교육 모델은 의대의 교육 모델과 동일했다. 의사가 부속병원에서 환자를 진료하면서 의대생들을 의사로 교육하는 방식이 미주리 대학에서 기자 교육에 고스란히 적용되고 있었다. 미주리 저널리즘 스쿨은 일간 상업신문인 ‘Columbia Missourian’을 발행하고 있었고, 전국 네트워크인 NBC-TV의 그 지역 방송국도 역시 소유하고 운영하고 있었다. 학과 교수는 수십 명이 있었는데, 그들 대부분은 언론사 국장, 부장 등을 역임한 베테랑 기자 출신들이었다. 학생들은 한두 개 기초 실습 과목을 강의실에서 수강한 후 학과가 경영하는 이들 신문사나 방송국에서 일하는 실습과목을 의무적으로 수강해야 했고, 그러면 수강생들은 자동적으로 ‘정식 기자’로 취재 현장에 투입됐다. 시청, 주정부 취재를 실습하고 난 뒤, 학생들은 마지막 4학년 2학기에는 워싱턴 DC로 가서 연방정부, 연방의회, 연방대법원 취재를 실습한다. 워싱턴 DC에도 교수가 상주해서 학생들 취재를 지도한다.
의대생이 졸업과 동시에 의사 면허를 받고 병원에서 바로 환자를 진료하는 의사가 되는 것처럼, 미주리 저널리즘 학생들도 졸업과 동시에 기자로서 취재도 할 줄 알고 기사도 쓸 줄 아는 ‘직무능력’을 갖추고 언론사로 취업하는 것을 나는 내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 더욱이 나는 이 대학의 기자 교육 과목을 직접 수강했고, 콜롬비아 미주리언에서 한 학기는 취재기자로, 한 학기는 편집기자로 일했다. 나 자신이 기자가 되어 기사를 쓰고, 내가 쓴 기사가 미국 신문 가판대에서 판매되는 짜릿한 경험을 하면서, 이 대학 실무 교육 시스템의 위대함에 감탄해 마지않았다.
실무 교육 DNA조차 없는 국내 신방과...도제식 자체 교육에 익숙한 국내 언론계
그게 나의 뇌리에 강하게 자리 잡을 수밖에 없던 이유는 미국과 대비되어 ‘엉터리’라고 불러도 할 말이 없는 한국 언론의 기자 채용 및 수습 제도 때문이었다. 미국 기자들은 신입 기자의 80% 이상이 신방과 출신들이다. 나머지 20%는 하버드 대학의 ‘크림슨’처럼 대학 신문 기자 출신들이다. 신입 기자 대부분은 학교나 지역 신문 인턴 프로그램을 통해서 배운 기사 취재 및 작성 능력을 갖추고 언론사에 입사한다. 미국의 신방과는 미주리 대학처럼 자체 상업적 언론사를 설립해서 교육하거나 주변 기성 언론사와 정규 인턴 프로그램을 운영해서 실무를 필수적으로 익히게 하기 때문이다. 한국 언론사는 영어, 상식, 논술, 작문 실력이 좋은 인재를 입사 시험으로 뽑은 다음, 자체적으로 기자 수습 교육을 시킨다. 이때 교육 담당 고참 기자와 신참 수습 기자는 사수와 조수 관계가 된다. 이게 바로 중세의 대장간이나 우리나라 인간문화재 전수 제도와 유사한 ‘도제식’ 교육 시스템이다.
60-70년대에는 국내 언론사에 신방과 출신이 입사하면, 언론사 고참들은 그들이 기사를 쓰든지 영상 제작 정도는 할 줄 알 것으로 지레짐작했다. 그러나 실제 일을 시켜 봤더니, 신방과 출신들이 실무에 ‘젬병’이란 사실이 들통났다. 당시 내 대학 동기들은 언론사에 입사하면 먼저 입사한 학과 선배로부터 신방과 출신임을 최대한 숨기라는 ‘비밀 정보’를 전달받기도 했다. 언론사 내부에서 신방과 출신들은 실무는 잘할 줄도 모르면서 언론 자유가 어떻다는 등, 언론의 상업성이 문제라는 등 입만 살아서 각 언론사 노조 위원장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니 언론사 간부들은 공채 과정에서 오히려 신방과 출신을 선호하지 않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문제는 대한민국 신문방송학과의 이론 위주 교육과정
도대체 대한민국 신방과에서는 무엇을 가르치길래 언론사에서 이런 푸대접을 받고 있는 걸까? 1990년 초반에 당시 서강대 최창섭 교수는 전국 신방과의 교육과정을 전체 조사한 결과, 각 대학 신방과별 전체 교과목 중 실습과목 비율이 평균 13%라고 발표한 적이 있다. 대개 1개 학과가 개설하고 있는 총 전공과목수는 30-40개 전후다. 13%라고 하면 겨우 3-4개 과목이 실습과목이란 뜻이고, 실습 분야가 신문, 방송, 광고 3개라고 하면, 잘해야 신문 실습과목 1개, 방송 실습과목 1개, 광고 실습과목 1개 내외가 실습과목의 전부라는 말이다. 대학 4년 동안, 단 1개의 신문 실습과목으로 기사를 취재하고 작성하는 직무능력을 갖출 수 있을까? 난센스다.
기자나 PD 출신 교수가 전임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학과도 드물다. 그래서 신방과 학생들은 주야장천 4년 내내 이론만 배우다 종 치게 된다. 그러니 언론사에서 신방과 출신들에게 실무 능력은 기대도 하지 않게 됐고, 신방과 교수들도 어차피 자신들이 미국이나 영국에서 배운 최신 이론을 가르치는 것 말고는 실무를 가르칠 엄두도 못내고, 의지도 전혀 없게 되어 있는 것이다. 모든 대학들은 한 학과가 개설할 수 있는 과목수를 제한하고 있다. 그래서 이론만 아는 교수가 수년 동안 가르쳤던 이론 과목을 반납하지 않고는 신방과의 실무 과목은 신설조차 할 수 없는 게 바로 대한민국 신방과, 지금의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학과의 적나라한 실상인 것이다. 어느 신문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교육과정을 쉽게 바꾸지 못하는 이유가 교수의 이기주의 때문이라면서 교수들이 나라의 미래 발목을 잡는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론만 알고 수술할 줄 모르는 의사를 배출하는 의대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론만 아는 기자와 PD를 배출하는 국내 신방과는 아직도 건재하고 오히려 그게 정상이 됐다. 왜냐하면 언론사에서 대학의 신방과에 그런 기대를 저버린 지 오래고, 그래서 언론계는 아예 자체 도제식 시스템으로 실무를 가르치기로 작정한 지 역시 오래됐기 때문이다. 신방과 학생들은 무슨 방송 아카데미, 기자 아카데미, 학교의 언론고시반이라는 일종의 학원 같은 사교육 기관을 들락거리며 부모 등골을 ‘브레이크’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교수가 된다면 미주리 대학 저널리즘 스쿨처럼 부속 언론사 만들고, 실습 교수 뽑고, 실무 위주 교육과정 수립해서, 학생들은 기사 쓰고 영상 만들 수 있는 직무능력을 갖춰야 졸업이 가능한 교육 모델을 만들 작정을 했던 것이다.
1993년, 개혁의 첫삽을 뜨다...이론 50%, 실무 50%의 교육과정 개편
경성대 신방과에 와서 처음 한 일은 우선 기존 교육과정에서 이론 과목을 통폐합해서 그 수를 줄이고 그 자리에 실무 과목을 집어넣는 거였다. 기사 작성은 초급, 중급, 고급, 현장실습 등 4개 과목을 만들었고, 같은 식으로 방송도 4단계, 광고도 4단계 실습과목 시퀀스를 만들었다. 단순 계산만 해도, 3개 실습 분야별로 4개 과목씩 단계별 실습과목을 개설하면, 총 12개 과목이 된다. 결과적으로 대략 이론 50%, 실습 50%인 교육과정이 1993년 경성대 신방과에서 만들어졌다. 이를 학계 세미나에서 발표하니, 다른 학교 교수들이 “경악스럽다”, “충격적이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 직후, 한국언론학회가 발간한 ‘언론학원론’이란 학회 차원에서 만든 공식 교과서에는 대한민국 신방과에는 3개의 교육 모델이 있다고 적혀 있다. 첫째는 이론 중심의 서울대형, 두 번째는 실무 중심의 경성대형, 그리고 세 번째는 나머지 이론과 실무 혼합형이라고 지칭했다. 경성대 신방과가 대한민국 3대 신방과 교육 유형 중 한 축을 대표하게 된 것이다.
주위의 비웃음 속에 현업 출신 교수 영입하고, 어설픈 스튜디오를 마련하다
기자, PD, 광고 기획자(AE) 출신 교수 선발이 그다음 과제였다. 언론사 출신 중 박사 학위를 가진 교수 후보는 드물었다. 그래서 석사 학위 + 언론사 경력을 토대로 교수를 선발하겠다고 하니, 학교 본부는 자격이 부족한 측근을 정실로 뽑으려는 꼼수 아니냐고 노발대발했다. 실무 위주 교육 시스템 구축이라는 학과의 차별적 발전전략 때문이라고 했더니, 총장을 비롯한 담당 처장들이 비웃음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그렇게 오해와 고정관념의 벽과 싸우며 어렵게 실무 교육이 가능한 교수진을 뽑아 나갔다.
그다음은 실습시설이 필요했다. 라디오와 TV 겸용 10평 남짓한 스튜디오와 사제 조립품인 조잡한 음향 콘솔, 녹음기, 가정용 소형카메라와 편집기를 갖추는데 1000만 원 정도가 든다는 견적을 업자로부터 받았다. 이걸 학교에 내밀었더니, “신방과는 분필과 칠판만 있어도 되는 학과가 아닌가요?”라는 빈정거리는 대답을 들어야 했다. 은행에 있는 친구에게 이런 사정을 하소연했더니, 팩토링 금융이란 게 있어서 은행이 대출 형식으로 기계를 구입해서 담보로 삼고 개인이 매달 얼마씩 은행에 갚아 나가는 형태의 대출 상품이 있다는 정보를 줬다. 우리 학과가 필요한 기계 및 설비 금액을 은행이 대신 내주고 학과가 월 40만 정도만 매달 갚아 나가면 된다는 은행 친구의 조언을 토대로, 학과 교수 1인당 20만 원씩 2명의 교수(당시 2명이 교수 전체였다)가 매달 수년간 갚아 나가는 조건의 팩토링 대출 서류를 만들어서 학교 기획처장에게 내밀었다. 나중에 학교가 돈이 생기면 그동안 교수들이 갚아온 금액을 학교가 변제해 주면 되지 않겠느냐는 게 우리 학과의 논리였다. 며칠 뒤, 기획처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다른 학과 교수들은 툭하면 기획처장 방에 와서 예산 내놓으라고 고성을 지르기 일쑤인데, 신방과 교수들의 희생정신과 정성에 학교가 감동했다며 추경에 신방과 예산을 반영해주겠노라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스튜디오를 완공했다. 그런데 스튜디오 밖에서 손짓 사인을 안으로 보낼 필요가 없었다. 스튜디오 밖의 말소리가 안에 그냥 들릴 정도로 방음이 잘 안되는 싸구려 스튜디오 시설이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초기에는 그게 어디냐면서 학생들은 즐겁게 방송 실습을 했다. 이게 1992년 경이었다. 방송실습실 건립 후 매년 학교를 졸라서 신문 편집을 할 수 있는 맥 컴퓨터와 쿽익스프레스(QuarkXpress) 소프트웨어를 구입해서 신문편집실을 만들었으며, 그다음은 광고실습실을 조성했다. 총장이 불러서 올라갔더니 구형 펜탁스 필름 카메라를 한 대를 주시면서 오래됐지만 작동은 되니 실습에 보태쓰라고 기증해 주셨다. 1993년경부터는 이미 신방과가 학과 발전을 위해서 교수와 학생들이 똘똘 뭉쳐서 동분서주한다는 소문이 교내에 퍼져가고 있었다.
전국 최초 ‘고3 초청 신방과 학과 투어 프로그램’으로 뉴스를 타다
그다음은 학과의 대외 홍보였다. 실무 위주 교육과정 수립, 언론사 출신 실습 교수 확보, 그리고 조악하지만 나름 실습 흉내를 낼 수 있는 방송실습실, 신문실습실, 광고실습실을 보유한 학과는 전국 최초, 그리고 유일하다는 사실을 널리 알릴 필요가 있었다. 1995년경, 3명이 된 학과 교수들은 언론에 학과의 변혁이 뉴스로 보도되도록 언론 이벤트를 매학기 1개 이상 벌이자는 데 뜻을 모았다.
홍보 비디오도 만들었다. 가정용 비디오 카메라를 들고 영상을 잘하는 학생 한 명을 대동하고 지금은 작고하신 고(故) 김영희 중앙일보 대기자를 찾아 서울로 갔다. 김영희 대기자와 나는 미주리 대학에서 동문수학했던 인연이 있었다. 김 대기자는 한국에서 최초로 실무 교육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크게 기뻐하시며 의미 있는 한국 신문방송학과의 교육 개혁이라는 멘트를 인터뷰로 해주셨다. 당시 조선일보 독자부장이던 윤석홍 단국대 명예교수도 영상 인터뷰로 경성대 신방과의 실무 위주 교육과정 개혁을 올바른 방향이라고 성원해 주셨다. 이렇게 찍은 영상을 들고 부산 KBS로 가서 방송용 전문 편집기를 사용해서 10분짜리 홍보 비디오를 만들었다.
그다음은 학교 총무과와 접촉해서 학교 버스 2대를 3일간 신방과를 위해서 배정해달라고 요청했다. 학과 교수들이 흩어져 일일이 방문해서 섭외한 고등학교를 대상으로 매일 오전과 오후에 2개교씩 하루 4개교, 3일간 총 12개 학교에 학교 버스를 보내서, 한 학교 당 학생 40여 명씩 고3 학생 총 600여 명을 학과로 초청했다. 그리고 실무 위주 교육 시설과 교육과정을 둘러보는 학과 투어 행사를 시작했다. 언론사에 보도자료도 보냈다. “경성대 신방과, 전국 최초 학과 차원의 고3 대상 실무 교육 시스템 홍보 행사 개최”라는 헤드라인으로 부산지역 신문사 방송사 기자들을 불러 모았다. 부산일보, 국제신문, 부산 KBS, MBC를 비롯해서, 연합뉴스와 조중동 부산지사 기자들이 일시에 다 모여 취재에 열을 올리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당시에 학과 차원에서 그 정도 홍보 이벤트를 벌인 학과를 대한민국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그후로도 수시로 현직 언론인 초청 강연회, 현직 언론인 초청 실무 특강, 프리미어/포토샵 등 영상 관련 소프트웨어 방학 특강도 실시했다. 부산 KBS와는 인턴 프로그램 협약을 맺고 매 학기 1-2명의 학생들이 휴학하고 KBS PD 밑에서 인턴 수련을 받았다. 그중 몇 명은 현재 중견 방송인이 됐다. 방과 후 취업 교실도 만들었다. 교수별로 한자반, 영어토익반, 상식반, 논술반을 맡아서 방과 후 1시간씩 학생들을 가르쳤다. 나중에는 영상 동아리 CNS, 신문 동아리 WED, 광고 동아리 ADi, 영어회화 동아리 Marshmallow Team 등이 생겼고, 이들 동아리는 지금도 끈끈한 선후배 관계를 유지하면서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고 있다.
뉴스를 읽지 않는 학생이 기자가 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신문을 읽히기 위해서 시사상식 시험을 실시했고, 우수 학생에게 상품을 줬다. 처음에는 학기별로 1회 실시하다가, 나중에는 매월 1회, 지금은 매주 1회씩 전체 재학생이 한 교실에 모여서 시사상식 시험을 치룬다. 모든 전공 과목을 90점 만점으로 하고, 나머지 10점은 무조건 시사시험 점수를 반영했다. 그 결과, 시사 공부를 하지 않으면, 학생들은 모든 전공과목에서 A를 받을 수 없게 됐다. 매주 시사상식 시험은 지겹도록 미워했던 공포의 대상이라고 졸업생들은 회고한다. 그러나 졸업 후 취업해 보니 시사상식이 사회생활의 가공할 무기였음을 깨달았고, “교수님, 시사상식 덕분에 회사 윗분들과 대화 상대도 되고 사랑도 받고 있습니다. 다른 것을 몰라도 시사상식 시험만큼은 절대로 없애지 말아주세요”라는 문자를 보내오기도 했다. 2010년에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실시한 전국 신문활용 공모전에서 경성대 신방과의 시사상식 시험제도가 전국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95년에는 케이블 TV가 전국적으로 서비스를 개시했는데, 낙동 케이블과 동남 케이블 등 부산지역 케이블 방송국 실무국장들을 호텔로 초청해서 경성대 신방과는 실무에 강한 인재를 배출하고 있으니 많이 채용해달라는 취업설명회 행사를 가졌다.
약 10페이지짜리 학과 소개 팜플릿을 제작해서 재학생들에게 수십 부씩 나누어주고, 자신의 모교를 방문해서 학과 홍보 동영상도 틀어주고 홍보 팜플릿을 돌리면서, 고3 후배들에게 전국에서 하나밖에 없는 실무 위주 교육과정을 갖춘 경성대 신방과를 널리 알리도록 독려했다.
“신방과는 부산에서 경성대가 제일 좋대요. 남들 다 그래요!”
1993년 이후 수년간 그렇게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미친 듯이 좌충우돌하던 중, 마산(지금의 창원)의 경남대에 시간강사로 출강하는 지인으로부터 믿기 어려운 얘기를 듣게 됐다. 그 지인은 경남대 강의를 마치고 캠퍼스를 걸어서 나오던 중, 경남대 학생회장 선거 유세 현장을 지나게 됐다. 요즘 학생회장 후보들은 어떤 공약을 내걸고 표를 구하는지 궁금해서 그 사람은 잠시 후보들 유세를 경청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후보가 단상에 올라가서 “부산에는 경성대 신문방송학과가 있는데, 그곳 교수들이 실무 위주의 교육과정을 만들고, 대대적인 홍보 활동을 벌이는 등 열성적으로 학과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합니다, 왜 우리 대학에는 이런 교수님들, 이런 학과가 나오지 않는 겁니까?”라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어떻게 우리 학과의 전방위 홍보 드라이브 소식이 마산의 경남대 학생회장 후보 귀에까지 흘러가게 됐을까? 당시에 우리 교수들은 이 소식을 전해 듣고 틀림없는 사실이면서도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을 못할 지경이었다.
그즈음, 초등학교를 다니던 내 집 아이들이 피아노를 배우고 있었다. 아이들 피아노 선생이 1주일에 몇 번 내 집을 방문했는데, 어느 날 피아노 선생이 어느 세미나에서 발표하는 내 사진을 거실에서 발견하고 무엇을 하는 분이냐고 아내에게 묻더란다. 아내가 경성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라고 했더니, 피아노 선생 왈, “신방과는 부산에서 경성대가 제일 좋다던데”라고 답하더라고 퇴근한 나에게 전했다. 나는 아내에게 다음에 또 피아노 선생이 오면 어디서 그런 소리를 들었느냐고 자세한 내막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학과 홍보의 전파 과정을 아는 것이 홍보 전략 수립에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다음날 들은 피아노 선생의 답변은 “남들 다 그래요!”라고 하더란다. 이 말 역시 사실이면서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로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에 그런 입소문이 부산지역에서 널리 퍼져나가고 있었던 건 사실이었다.
1995년의 기적...경성대가 경쟁 우위 대학 신방과를 수능 점수에서 추월하다
고3들이 대학 원서를 낼 때 현실적으로 가장 많이 참고하는 것은 대입학원에서 만든다는 ‘대학입시 성적 배치표’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 학과는 부산 굴지의 입시학원 입시상담 실장 서너 분을 음식점으로 초대해서 학과의 발전전략을 소개하고 우리 학과의 미래 발전 가능성을 제대로 평가해 달라고 ‘로비’하기도 했다. 그렇게 학과는 학과 홍보를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력 질주했다.
1994년도 입시부터는 학력고사에 이어 수능고사가 처음 실시되고 있었고, 수험생들은 대학을 먼저 지원하고 자기가 지원한 대학에 가서 전국적으로 같은 날 수능을 치뤘다. 그리고 그다음 날은 이미 수능 가채점을 한 상태에서 지원 학과 교수들의 면접을 봤다. 이때 학과 교수들은 수험생들에게 가채점 결과를 일일이 물어봤고, 면접이 끝나면 대개 수능 몇 점이 그해의 학과 합격 커트라인인지를 알 수 있었다. 1995학년도 면접을 실시하면서 우리가 넘고 싶은 경쟁 대학 신방과에서 조교를 하던 우리 졸업생에게 그 학과의 수능 합격 커트라인을 파악하는 대로 전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면접이 다 끝난 점심 식사 시간 무렵, 졸업생한테서 전화가 왔다. 그리고 그 대학 신방과 수능 합격 커트라인을 확인하니 우리 학과보다 0.5점이 낮았다(원점수 기준). 순간, 우리 학과 교수들은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그날 저녁 교수들은 그야말로 샴페인을 터트렸고 대취했다. 우리나라에서 학과별 대학 서열이 엄연히 존재하는데, 낮은 서열의 한 대학 학과가 높은 서열의 다른 대학 같은 학과를 점수상 추월하는 게 가능할까? 그런 일이 실제로 1995년도 입시에서 경성대 신방과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그후 약 10년간 경성대 신방과는 부산의 2대 국립대학인 부산대와 부경대 신방과를 제외하고는 부산 내 사립대학 중에서는 수능 점수 1-2위를 다투었다. 대학 입학 성적 자료를 가장 많이 보유한 ‘진학사’에 의뢰해서 당시 10년간의 부산지역 신방과 수능고사 국, 영, 수 3개 과목 점수를 100점 만점으로 환산한 표는 다음과 같다. 우리 학교가 부산지역 사립대학 중 1위를 차지한 해는 1995년과 2000년 두 번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경쟁 사립대학 신방과와는 그후 지속적으로 엎치락뒷치락 시소 열전을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