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 청소년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 2015년 청소년상담 지원 현황에 따르면, 일탈 및 비행으로 상담을 받은 학생의 수는 44만 8,964명이다. 비행 청소년 수는 줄어들지 않고 있지만 이렇다 할 해결책은 없는 상황이다. 비행 청소년의 선도에 사회의 적극적인 참여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지만 사람들은 비행 청소년들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는다.
“쌤, 맛있는 거 사주세요!” 오늘도 그의 전화기는 쉴 틈이 없다. 그는 전화를 받자마자 맛있는 것을 사주는 약속을 잡는다. 식사 메뉴는 항상 그렇듯이 국밥. 국밥을 한 그릇씩 앞에 두고 그는 누군가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 그들은 자주 만난 사람처럼 스스럼없이 일상 이야기를 나눈다. 그의 앞에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방황 청소년이다. 오늘도 청소년에게 밥을 사주는 그는 목사지만 ‘목사님’보다 ‘쌤’이라고 불린다. 날씨가 추워졌지만, 청소년의 쌤은 오늘도 따뜻한 사랑을 베푼다. 그의 별명은 ‘10대의 셔틀’이다. 셔틀은 심부름해 주는 하인 같은 사람을 가리키는 청소년 은어다. 이음교회 유진석(35) 목사는 비행청소년들의 쌤이고, 셔틀이다.
다사다난했던 학창시절... 음악과 신앙으로 극복
유진석 목사는 1982년 11월 7일 부산 사하구에서 태어났다. 유 목사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전 불의의 사고로 한쪽 팔을 잃었다. 그래서 그는 어릴 적 친구들에게 아버지가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많은 놀림을 받았다. 장애의 몸이 되자 그의 아버지는 사업을 접고 목사가 된 후 노인들을 위해 봉사하며 살았다. 그 때문에 집안 형편이 늘 어려웠고 유 목사는 그런 현실이 매우 싫었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세상에 대한 반항 속에서 자란 그는 절대 목사는 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는 16세 때 교회에서 드럼을 처음 접했다. 그가 세상에 대한 분노를 표출할 수 있는 매개체는 드럼이었다. 문제아였던 그는 드럼을 치면서 처음으로 대학을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는 담임 선생님의 반대로 음악 전공으로 대학을 갈 수 없게 됐다. 담임 선생님은 진학 상담을 하면서 그에게 아버지를 따라서 신학대학 진학을 강요했다. 목사의 길을 가고 싶지 않았던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다. 그의 뜻을 바꾼 것은 속상해 하는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결국 그는 2001년 고신대학교 신학과에 진학했다.
그가 구체적으로 목사라는 꿈을 가지게 된 것은 군대에서였다. 신학과에 진학해서도 꿈 없이 허송세월하던 그는 군대에 갔다. 군대 선임의 말에 큰소리치고 대들기 일쑤였던 군대 내에서 폭력을 당하며 왕따가 돼 힘든 나날을 보냈다. 견디다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던 그는 자신이 믿던 하나님을 떠올렸다. 그는 신앙으로 군대 시절의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목사가 될 결심을 하게 됐다. 25세 때부터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했고, 2015년 목사가 되었다.
군대를 전역하고 아버지께 목사가 되겠다고 말씀드렸을 때 아버지는 그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내가 가진 장애가 참 감사하다”. 이 말을 들은 유 목사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띵해졌다. 학창 시절, 그는 아버지의 장애가 창피했고, 그 때문에 아버지를 원망했다. 그런데 도리어 아버지는 자신의 장애가 참 감사하다고 말한 것이다. 그 한마디가 유 목사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이왕 목사가 되기로 했으니 정말 좋은 목사가 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십대의 셔틀’로 가까워졌던 비행 청소년
사역자로서 청소년 문제에 관심을 가진 것은 4년 전이었다. 그는 아침에 운동을 다녀오던 길에 집에서 아침밥도 못 먹고 급하게 삼각 김밥을 먹으며 학교에 가는 학생들을 보았다. 그런 학생들이 불쌍해 보였다. 학생들에게 아침밥을 먹이고 싶다는 생각으로 학교 앞에서 아침에 학생들에게 주먹밥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색해서 학생들에게 김밥을 건네며 “넌 특별하단다”만 무한 반복했다. 꾸준히 학교 앞에 나가서 김밥을 나눠주다 보니 어느새 학생들은 그를 기억하고 알은 체하기 시작했다.
다음 단계로 유 목사는 간식에 명함을 끼워 학생들에게 나눠 주었다. 명함에는 ‘10대의 셔틀’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청소년들에게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셔틀’이라는 단어를 긍정적인 이미지로 바꿔주고 싶어서 10대의 셔틀이라는 별명을 스스로 썼다. 명함에는 “내가 필요할 때, 나를 불러줘! 언제든지 달려갈게!”라는 글귀도 적혀 있었다. 명함을 나눠준 후 하나 둘 청소년에게서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방황하는 청소년들이었다. 그들은 대개 밥을 사달라고 유 목사에게 전화했다. 유 목사는 밥을 사주면서 아이들의 고민을 들어 주었다.
그가 청소년들을 더 적극적으로 가슴에 품게 된 계기는 한 여학생 때문이었다. 그는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던 비행 청소년들을 발견했다.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그는 학생들에게 말을 걸었고 연락처를 교환했다. 하루는 연락처를 교환한 학생 중 한 여학생이 전화가 왔다. “쌤, 배고파요. 맛있는 거 사주세요.”
하지만 그는 마침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중이어서 그 여학생을 만나지 못했다. 알고 보니, 그 다음 날은 그 여학생이 학교 폭력으로 재판을 받는 날이었다. 그 소식을 듣게 된 유 목사는 마음이 무척 아팠다. 재판을 받고 부산 북구의 덕천동에 있는 ‘여자 쉼터’로 들어간 그 학생은 6개월 뒤 다시 유 목사에게 연락해 왔다. 그는 자신을 잊지 않고 다시 찾아준 여학생이 너무 고마웠다. 그래서 이 여학생을 절대 놓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유 목사는 그 학생을 아직도 도와주고 있다.
“담배도 사주시나요?” 10대의 셔틀이라는 명함을 학생들에게 나눠주다 보니 가끔 이런 난감한 물음도 받곤 한다. 처음엔 이런 전화가 오면 정중하게 거절했지만 지금은 설사 담배를 사주는 한이 있더라도 아이들을 만나러 간다. 한 명의 아이라도 놓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아이들이 장난으로 전화하는 것처럼 보여도 전화하는 것 자체가 큰 용기를 가지고 한 행동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단 한 번이라도 연락 온 아이들은 쉽게 포기할 수 없다.
포기하지 않고 청소년들을 위해 일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은 ‘가족’
유 목사에겐 아내와 4세 된 아들이 있다. 유 목사가 청소년과의 교류를 시작할 때부터 아내는 버팀목이자 응원단이 돼 주었다. 처음에는 아내가 걱정을 많이 했다. 좋은 의도로 시작한 일이지만 주위 사람들이 그를 아니꼬워 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자 아내는 많이 울기도 했다. 하지만 남편의 행동을 말리지 않았다.
금전적인 부담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아내는 방황 청소년들이 변화해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 등 결과가 눈에 보이자 유 목사를 더 응원해 주었다. 마음이 가는 일은 꼭 해야 하는 성격의 유 목사는 돈은 걱정하지 않는다. 그는 “처음에는 돈 걱정을 많이 했지만, 하나님께서 필요한 만큼 채워주시기 때문에 이제는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아이들을 바꾸는 일이 제일 중요하다”고 말했다.
지금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관심과 사랑
오늘도 유 목사의 휴대폰에는 메신저 알림 소리가 계속 울린다. 처음에 아이들은 금전적인 것을 요구하고 때로는 그를 무시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를 의지하고 그를 아빠처럼 대한다. 유 목사는 힘들 때도 많지만 자신을 의지하는 아이들이 정신 차리고 학교로 되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힘이 난다고 했다.
지금 유 목사의 목표는 밥차를 만들어 비행 청소년들에게 따뜻한 밥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는 청소년들이 배가 고파 편의점에서 김밥 등을 훔치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큰 것을 훔치는 게 아니라 배가 고파서 먹을 것을 훔치는 경우가 대다수다. 그는 그들의 배고픔만 해소돼도 범죄율이 낮아질 것이라고 굳게 믿으며 차근차근 밥차를 준비 중이다.
유 목사가 만난 비행 청소년들의 부모들은 대개 맞벌이를 하거나 한 부모 가정이었다. 그래서 사랑이 결핍된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유 목사는 청소년들이 탈선하는 이유 중 하나가 부모의 사랑과 관심을 받고 싶어서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지금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사랑과 관심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는 “따뜻한 사랑으로 아이들은 크게 변화할 수 있다”며 “사회가 비행 청소년에게 사랑을 주고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