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이의 뮤직비디오 ‘젠틀맨’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해외에서는 발표 2주만인 4월말 현재 빌보드 차트 5위에 오르는 등 전작 ‘강남스타일’에 이어 또 한차례의 글로벌 돌풍을 불러일으키고 있지만, 정작 국내에서는 네티즌이나 일부 문화평론가들로부터 혹독한 비평의 화살을 받고 있는 것이다.
주된 비판 대상은 지나친 선정성과 저급성이다. 노래 가사나 비디오에 담긴 내용이 거의 포르노그래피에 가깝고, 기성 권위를 파괴하기 위한 해학이라 하지만 너무 저질스럽다는 것이다.
문화평론가로 이름이 높은 동아대 정희준 교수는 얼마전 “싸이의 포르노 한류, 자랑스럽습니까?”란 제목의 칼럼으로 돌직구를 날렸다. 인터넷 언론 프레시안에 실린 이 칼럼을 통해 정 교수는 “선정성의 수준이 섹시나 에로틱 차원을 넘어 포르노 수준”이라고 비판하고 “외국에서도 싸구려 저질(cheap and low), 역겹다(disgusting)”라는 평이 나오고 있다고 소개했다.
사실 우리 같은 기성세대의 눈으로 보기에 뮤비 젠틀맨은 불편한 구석이 있다. 러닝머신 속도를 높여 여성을 뒤로 자빠지게 하고, 여성이 앉는 것을 도와주는 척하다가 의자를 뒤로 빼버리고, 선탠을 하는 여성 비키니 끈을 풀어버리고, 커피 마시는 여성의 커피잔을 툭 치고… 특히 방귀를 뀌고 그 가스를 여성 코앞에서 터뜨리는 장면에선 차라리 눈을 감고 싶을 정도의 민망함을 느낀다. 이 뮤비에 담긴 문화코드가 ‘여성학대’, ‘여성 혐오’라는 비판에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또 우동을 허겁지겁 먹고 있는 싸이 앞에서 여성이 하얀 마요네즈를 듬뿍 묻힌 오뎅 바를 입에 물고 있는 장면은 구강 성교를 노골적으로 은유한 것에 다름 아니다. 게다가 이 뮤비의 가사 속에서 거듭 표현되는 “mother father gentleman”은 영어문화권에서 가장 지독한 욕설인 ‘mother f***er’를 패러디한 것이라 한다. 우리로 치면 “A18”쯤 된다고 할까? 스펠 몇 개를 비틀었다고 하지만 미국에서도 함부로 입에서 내뱉을 수 없는 이 나쁜 말을 수억 명이 볼 수 있는 뮤직 비디오에 담았다는 그 담대함이 놀랍기만 하다.
그럼에도 나는 싸이를 응원한다. 그리고 그의 음악을 좋아한다. 디지털 기계음이 내는 그 요란한 소리가 결코 편안한 것은 아니지만, 그 리듬을 타고 나도 모르게 어깨가 들썩거려진다. 강남스타일의 말춤에 이어 이번 시건방 춤도 언제 한번 흉내 내볼까 생각도 하고 있다.
나는 뮤비 젠틀맨이 B급 대중 문화라는 지적엔 동의하지만 저질이라는 혹평엔 반대한다. 표현이 저질스러울지는 몰라도 그 작품 자체는 질이 결코 낮지 않다. 뮤비 강남스타일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후 싸이가 영국의 한 명문 대학에서 강연했을 때 “(강남스타일의) 후속곡 구상에 지금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번에 발표된 젠틀맨이 그 오랜 고뇌의 결과물이며 창작의 에스프리가 응축된 걸작이라는 점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예술의 본질에 관해 많은 철학자들이 다양한 견해를 내놓았지만 ‘카타르시스’이론이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다. 예술은 인간이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푸는 ‘배설행위’라는 것이다. 한국의 대표지성 이어령 교수는 <상상력 비판>이란 논문에서 문학과 예술을 ‘무반동총의 원리’로 설명했다. 총을 쏠 때 그 반동을 스프링이 흡수하듯 문학이나 예술은 뭔가 표현하고 싶은 인간의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심적 완충장치라는 것이다. 침묵을 강요받은 이발사가 갈대밭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쳤을 때 그 자체가 카타르시스, 즉 배설행위다. 그리고 그 이발사의 외침을 널리 퍼지게 해주는 갈대는 예술의 한 장르, 즉 문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은 다양한 장르, 다양한 층위를 갖는다. 음악만 하더라도 클라식 중심의 취향이 있는 반면 발라드나 뽕짝 등 대중적이며 소박한 취향도 있다. 이를 질의 높고 낮음으로 분류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주로 소비하는 사람들의 취향이 다를 뿐이다. 베토벤이나 모짜르트를 즐긴다고 해서 조용필이나 나훈아의 노래를 듣고 눈믈을 흘리는 사람의 정서를 저질이라고 비난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
여기에다 기성세대들은 미처 이해하지 못하는 젊은 층의 폭발적인 정서가 또 따로 있을 것이다. 그것이 빠른 리듬과 패러디 텍스트를 통해 분출되는 게 이번 젠틀맨과 같은 뮤직비디오가 아닐까 싶다. 욕설이 난무하고 기성세대에 대한 야유가 넘쳐나며 포르노에 가까운 섹스코드가 담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이 장르는 젊은 층의 억눌린 불만과 스트레스를 해소시키기 위한 정화조이기 때문이다. B급 문화라는 레테르는 붙일 수 있지만 ‘카타르시스’라는 점에서는 클라식 음악과 같은 항렬에 놓아도 그리 큰 무리가 없다.
‘키치(Kitsh)’라는 문화 장르가 있다. “쓰레기를 수집하다”라는 뜻의 독어 ‘키쉔(kischen)’에서 유래된 것으로 저질스럽고 유치한 것이 특징이다. 유치함, 천박함을 이용해 기성 예술주의의 엄숙함, 근엄함을 위트있게 비꼬고 조롱하는 예술의 한 형식이다. 20세기 초 독일에서 성행했으나 20세기 중후반 미국에서 꽃을 피웠다. 대량생산되는 생활용품 등을 소재로 다양한 작품을 그려 미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잘 표현했다는 평을 듣는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이 대표적인 키치 에술가이다. 키치라 해서 싸구려냐? 천만의 말씀이다. 워홀의 작품은 소더비 등에서 고흐나 피카소에 맞먹는 천문학적인 가격으로 거래된다.
워홀이 남긴 유명한 아포리즘이 있다. “미국 대통령이나 리즈 테일러가 마시는 코카콜라와 거리의 노숙자가 마시는 코카콜라는 모두 같은 것으로 맛있다”. 문화 소비의 보편성을 표현한 말이다. 예술이 가져다 주는 카타르시스에 질의 고하와 계급이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워홀의 예술세계는 “고급문화라 생각된 예술, 패션 등의 높은 콧대를 꺾어 버린 일종의 혁명”으로 불린다.
장 미셀 바스키아(1960~1988)는 27세로 요절한 미국의 흑인 화가다. 슬럼가 벽화에나 어울릴듯한 만화나, 낙서, 인체 해부학 도상 등을 그렸다. 그의 그림을 얼핏 보면 어린 아이의 장난 같다는 느낌을 갖는다. 그러나 그는 미국의 신표현주의의 대가로 불리며 그의 작품은 한 점에 100여억원을 호가한다. 워홀은 바스키아의 생전에 그의 작품에 반해 멘토를 자처했고 그를 “검은 피카소”로 극찬한 바 있다.
지난 2월 서울 광화문 옆 소격동 화랑거리의 한 갤러리에서 바스키아 특별전이 개최됐다. 어느날 저녁 약속까지 시간이 좀 남아있는 듯해 그 갤러리에 들렀다. 작품 해설서를 읽고 그의 작품 앞에 섰는데도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슨 그림이 저래? 초등학생이 그렸다고 하면 딱 맞겠네”라며 주마간산 식으로 쭉 둘러보고 나오려는데 지인을 한 명 만났다. 중앙 언론사 미술 전문기자 출신이며 현재도 미술 평론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베테랑이다. 바스키아 작품이 보고 싶어 세번째 이 화랑에 들렀다는 그는 “이 작가의 작품이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는 나의 푸념에 이렇게 말했다. “눈으로 이해하려 하지 말고 가슴으로 느끼세요” 아, 그렇구나. 가슴으로 느껴야 하는구나.
지금 다소 문화적 엄숙주의에 젖어 싸이와 젠틀맨을 비판하고 있는 문화비평가나 네티즌들도 귀로 이해하려 하지 말고 그냥 가슴으로 느껴보라고 권유하고 싶다. 그 음악에 따라 시건방 춤을 추면서 몸을 한 번 흔들면 속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느낄지도 모른다.
물론 나도 이렇게 말은 하지만 아직 싸이를, 싸이의 음악을 제대로 흡수할 마음의 문은 열려있지 않은 것 같다. 리듬을 타고 몸은 들썩거려지지만 가슴속 울림은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바로 며칠 전 발표된 가왕 조용필의 신작 앨범 <헬로>엔 정말 가슴 깊은 감흥을 느꼈다.
내 18번 노래는 조용필의 <그 겨울의 찻집>이다. “아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그대 나의 사랑아”로 끝나는 양인자 작사의 그 시어와 김희갑 작곡의 애절한 선율을 들을 때마다, 부를 때마다 내 가슴 속도 눈물에 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