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도시에 새로운 건축물이 들어설 때마다 따라붙는 랜드마크라는 수식어는 이제 더 이상 참신한 표현이 아니다. 크게는 고층 빌딩부터 작게는 개성있게 지어진 아기자기한 건물까지 모두 저마다 그 지역의 랜드마크라는 메시지를 만들어 낸다. 어느 도시나 마찬가지겠지만 삿포로 역시 삿포로를 정의할 수 있는 다양한 건축물들이 많이 생겨났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하지만 삿포로 시민들에게 삿포로의 랜드마크가 어디인지 묻는다면, 대부분의 시민들은 주저없이 ‘시계탑’이라고 말한다. 일본의 뉴스에서도 홋카이도 소식을 전하는 현지 아나운서의 배경 이미지는 늘 시계탑이고, 일기예보 때에도 벚꽃이 만개한 시계탑을 배경으로 기상 캐스터가 홋카이도 날씨를 전한다. 그만큼 삿포로를 상징적이고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아이콘은 시계탑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삿포로 시계탑은 네모 반듯한 삿포로의 도심을 몇 차례 꺾어 지나야 만날 수 있다. 주위의 높은 빌딩들에 비해 작고 아담한 탓에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만약 차를 타고 지나간다면 놓쳐버릴 수도 있다. 시계탑 앞은 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로 늘 만원이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시계탑 앞에서 시계탑과 이를 안고 있는 건물 사진만 찍고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거기까지 가서 사진만 찍고 돌아온다면, 이처럼 작고 낡은 시계탑 건물이 왜 삿포로 시민들에게 랜드마크로 여겨지고 사랑받고 있는지 그 중요한 이유는 놓치고 만다.
시계탑 내부는 전시실로 활용되고 있는데, 1층에는 시계탑의 역사를 차근차근 이해할 수 있도록 각종 자료를 전시해 놓았다. 2층에는 100여 년 전 삿포로 농학교 당시의 강당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데, 마치 교회 예배당 같은 길쭉한 의자들이 놓여있어서 관광객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며 쉬는 모습도 눈에 띈다.
삿포로 시계탑은 엄밀히 말해 탑이 아니라 삼각 지붕에 시계가 달려있는 오래된 목조건물이다. 삿포로 농학교의 2대 교감이었던 윌리엄 휠러가 계획했고, 홋카이도 개척사(開拓使) 사무소의 공업국이 설계하고 지었다. 1878년 처음 건설됐을 때는 현재 위치가 아니라 삿포로 농학교 교내에 지어졌고, 시계탑 건물은 무도 연습장을 겸한 실내체육관으로 사용됐다. 1892년에 삿포로 시내에 큰 불이 나서 도시 전체가 잿더미가 된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삿포로 시계탑 역시 건물의 일부가 훼손됐고, 1906년에는 현재 위치보다 130m 정도 북쪽으로 이전했다. 이후 삿포로 시가 건물을 매입하면서 현재의 도심 속에 위치하게 됐다. 1911년부터 1966년까지는 시계탑 건물이 도서관으로 사용됐고, 1955년 대규모 복원공사를 통해 현재는 내부를 전시실로 활용하고 있다.
시계탑 건설 당시에는 시계 위치에 종이 설치돼 있었다. 시간을 알리기 위해서 밧줄을 당겨 종을 치는 구조였는데, 1881년에 지금의 모습과 같은 시계가 부착되었고, 시계는 추의 힘을 통해 작동한다. 현재도 50kg과 150kg의 거대한 2대의 추가 태엽을 감고 풀기를 반복하면서 시계를 작동시키고 있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삿포로 시계탑은 140년의 시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정확한 시간을 알려준 삿포로의 역사 그 자체다. 예전에는 시계탑의 종소리가 4km 밖까지 크게 울려 퍼졌지만, 지금은 주변 고층 빌딩에 방해가 된다고 해서 주변에서만 들을 수 있도록 작게 울리고 있다. 지금도 삿포로 시내의 초등학교에서는 수업을 알리는 벨소리 대신 녹음된 시계탑의 종소리를 사용하고 있다.
이처럼 삿포로 시의 역사와 함께한 시계탑은 오랜 시간 동안 여러 차례 자리를 옮기기도 했지만, 시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삿포로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시국 강연회가 열리기도 했고, 공연장과 도서관으로 활용되기도 했으며, 최근에는 시민들을 위해 예식장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오랜 시간 동안 삿포로의 연인들에겐 약속 장소로 인기가 많았던 탓에 삿포로 시민들에겐 일종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역할도 한다. 세대를 뛰어 넘어 시민들의 만남의 장소였던 이곳을 삿포로 시민들이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결국 랜드마크란 시민들과 함께한 기억의 공간이고, 도시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이어나가는 시민의 공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