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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팔이지만 브레이크 댄스, 킥복싱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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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팔이지만 브레이크 댄스, 킥복싱도 한다
  • 취재기자 이광욱
  • 승인 2014.02.18 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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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사고로 오른팔 잃은 대학생의 인간승리 이야기
아침 7시, 한 청년이 이어폰을 끼고 영어 단어를 외우면서 씩씩하게 도서관을 오른다. 그를 보는 주위의 시선이 그의 없는 한 팔에 쏠린다. 사람들의 안타까운 표정과 놀라운 표정이 교차한다. 그러나 그 청년은 주위의 시선을 아랑곳 하지 않고 열람실로 향한다. 그리곤 자리에 앉아 한 손으로 가방을 풀고 옷을 벗는다. 그는 외팔 장애우 대학생 임일현(가명, 25) 씨다. 그는 요새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도서관으로 출근한다. 임 씨는 공무원인 아버지(51)와 초등학교 교사인 어머니(50)의 외동아들로 태어나 귀여움을 듬뿍 받고 자랐다. 그러나 그 행복도 잠시. 1994년 여름, 그는 네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지나가는 트럭에 치여 넘어지면서 오른팔을 밟혔다. 바로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뼈가 약한 네 살박이에게 수술의 희망은 애초부터 없었다. 절단밖에 길이 없다는 의사의 말은 부모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그는 “너무 어릴 적 일이라 사고 당시 기억은 없어요. 다만, 기억이 나는 것은 정신을 차렸을 때 병원에 누워있다는 것과 옆에서 어머니가 울고 계신 것 뿐이었어요”라고 말했다.
그 날 이후로 그는 모든 일상생활을 한 팔, 한 손으로 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모든 것이 더디고 서툴렀다. 그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옷을 입고 벗는 것과 왼손으로 펜을 잡고, 수저를 잡는 등 어머니 없이도 해야 할 것을 계속 연습했어요”라고 말했다. 이런 특훈 덕으로 1997년, 그는 특수학교가 아닌 일반 초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임 씨는 아무 문제 없이 학교생활을 해냈다. 초등학교 시절 어느 날, 사라진 그의 오른팔이 시작되는 곳에서 엄청난 고통이 시작됐다. 온 몸의 뼈가 왕성하게 자라는 초등학생인 임 씨의 오른쪽 어깻죽지에서 성장통이 시작된 것이다. 아무리 절단됐어도 오른팔 시작 부분의 뼈가 성장하면서 살을 찢는 고통이 그를 괴롭혔다. 같은 또래 아이들은 뼈를 키우기 위해 성적촉진 주사를 맞는다는데, 그는 6개월에 한 번씩 성장억제 주사를 맞았다. 약 효과가 떨어지면 밤에 잠드는 것도 힘들었다. 이런 그를 지켜보는 어머니는 “정말 기도를 많이 했어요. 아들이 밤에 아프지 않게 잠들게 해달라고, 매일 잠드는 것을 지켜보면서 잘린 오른팔을 만지는데, 하루도 눈물이 마르지 않은 날이 없었어요”라고 당시를 회상하며 말했다. 초등학교 6학년, 점점 세상의 많은 것들을 알아가기 시작했을 때, 그는 또 다른 문제와 부딪쳤다. 남들이 자신에 대해 수군거리는 소리를 인지하기 시작했다. 주위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을 쓰는 사춘기가 그에게 찾아온 것이다. 그는 없는 팔이 원망스러웠다. 괜히 심술이 났다.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이 생긴 것도 바로 이때였다. 임 씨는 당시에 ‘나는 팔이 없어 불행하고 민폐만 끼친다’고 생각해 집에만 있었다. 그는 “그 때는 모든 것이 싫었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 중에서 신나고 행복한 일은 하나도 없었어요”라고 말했다. 2003년 3월, 웃음을 잃어버릴 즈음 그는 중학교에 진학했다. 한 동네에 몰려 있는 초중고등학교를 어릴 적부터 같이 다녔던 친구들 중 그를 이해해주는 친구들이 있었다. 그 친구들은 의리와 우정이 있었다. 그에게는 천운이었다. 그의 마음도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잊었던 웃음도 되살아났다. 임 씨는 “어릴 적 친구들이 같은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저를 매일 찾아왔어요. 등교부터 하교까지 항상 옆에 있어 줬어요”라며 “친구들의 관심이 저를 긍정적이게 만들었어요. 덕분에 나도 남들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어요”라고 말했다. 급기야 그는 친구 따라 강남 가듯 친구들과 함께 특별한 취미를 즐기게 됐다. 바로 브레이크 댄스다. 친구들의 격려와 칭찬이 그를 춤추게 했다. 팔과 다리를 모두 써도 힘든 격렬한 춤을 방과 후에 친구들과 매일 연습했다. 온 몸에 멍이 들었다. 그러나 브레이크 댄스는 그에게 삶의 기쁨을 선사했다. 1년 쯤 브레이크 댄스를 연습한 후, 그는 학교에서 열리는 장기자랑에 친구들과 출전했다. 만인의 박수는 아직도 그를 설레게 한다. 임 씨는 “방황하던 시기에 친구들과의 유대감을 갖게 되고 팔이 없어도 브레이크 댄스를 출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어요”라고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의 열정과 긍정적인 태도가 남자로서의 매력도 키웠나보다. 2009년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여자 친구가 생긴 것이다. 그는 당시 교회에서 만난 여자 친구(26)와 5년간 열애 중이다. 연상인 그의 여자 친구는 처음에는 약간 거부감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자주 보고 얘기를 나눌수록 그의 착한 인성에 끌렸다. 그녀는 “누나인 저보다 더 오빠 같고 세심하게 잘 챙겨주는 모습이 보기 좋아요”라고 말했다. 그는 항상 그녀에게 고마워한다. 장애를 가진 자신을 아무렇지 않게 봐주는 바로 그 마음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복 받았다고 말한다. 임 씨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이제 그녀는 저의 없는 오른팔이에요. 혼자서 할 수 없는 부분도 그녀가 도와주기 때문이죠”라고 말했다. 그는 2년째 휴학하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이다. 그러나 오후가 되면 킥복싱 도장에 나간다. 벌써 4개월째다. 이제는 실력이 꽤 늘었다. 그는 자신과의 또 다른 도전을 해보고 싶었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는 그는 “조금이라도 젊을 때, 내가 못해본 것,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생각이에요. 그것이 무엇이 되든지 간에요”라고 말했다. 그는 반년을 더 킥복싱을 연마하여 아마추어 대회에 출전할 욕심도 내고 있다. 그에게 킥복싱을 가르쳐 주는 관장 이모(45) 씨는 “보통 젊은이들도 한 달 정도면 못하겠다고 그만두는데, 일현이 끈기는 대단합니다”라며 “이미 그의 주먹이 강해져 아마 주먹 한 대 맞으면 보통 사람은 골로 갈 겁니다”라고 웃으며 말했다. 공무원 시험 준비는 어떻게 됐을까? 그는 9급 지방직 공무원 시험에 한 차례 낙방의 쓴잔을 마셨다. 그러나 곧 두 번째 시험에서 필기시험에 합격했다. 그는 현재 최종 면접시험에 대비하고 있다. 그는 “올해 꼭 합격을 마무리해서 아직도 저를 남들과 다른 눈으로 쳐다보는 시선에 맞설 거에요”라고 말했다.

그는 남들과 조금 다른 모습을 가졌지만 이젠 실망하지 않는다. 그는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행복하다’는 말을 항상 가슴에 새기고 있다. 오늘도 임 씨는 공무원의 꿈을 꾸며 킥복싱 도장으로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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