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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잔재 남은 가덕도 ‘외양포’로 자전거 여행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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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잔재 남은 가덕도 ‘외양포’로 자전거 여행 떠나다
  • 취재기자 이세호
  • 승인 2015.08.31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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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젊은이들은 우리나라 역사를 알려는 마음보다는 자소서에 한 줄 더 쓰기 위해 한국사 자격증을 준비하는 경향이 있다. 학원에서 한국사를 강의하는 한 강사는 강의 중 “역사에 무임승차하지 맙시다”라고 말했다. 강사의 그 말이 기자를 움찔하게 했다. 그 동안 역사에 무임승차해온 사람들 중에 기자가 속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군들의 사투를 그린 영화 <암살>이 1000만 관객을 돌파했다. 기자가 밟고 서 있는 이 나라가 존재할 수 있도록 자신의 존재를 바친 우리 선조들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창피했다. <암살>이 비교적 현재와 가까운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임에도 기자가 알고 있는 극중 위인은 김구 선생 한 분이 있을 뿐, 나머지 실존 인물들은 모두가 생소했기 때문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처칠이 말했다. 이 말에 의하면, 기자는 대한민국의 미래에는 콧등만큼도 관심 없는 사람이다. 그 동안 기자는 역사를 잊고 살았다. 역사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역사에 무임승차하지 않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장 위의 앉은 먼지를 털어내고 자전거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자전거 두 바퀴는 가덕도 외양포를 향했다.
▲ 출발지인 을숙도를 기점으로 목적지 가덕도 외항포로 가는 길을 나타내는 지도 (출처: 네이버 길찾기 지도)
가덕도는 부산시에서 가장 큰 섬, 선사시대 때부터 사람들이 산 흔적이 발견되는 섬, 낙동강 하구 서쪽 남해 상에 있는 섬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1904년 러일전쟁 때 러시안 함대를 막을 목적으로 일본군이 섬을 강점하고 주민들을 내쫓아 요새화했던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다. 만주와 한반도에서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러시아와 일본이 맞붙은 러일전쟁은 1904년 발발했다. 당시 일본군은 러시아군의 발트함대를 막기 위한 요새가 필요했고, 그 요새로 선택된 가덕도 외양포가 일본군에 의해 강탈당한다. 그들은 섬 주민들을 모두 강제이주시키고, 평화롭던 작은 마을들에 각종 화약고, 탄약고, 진지 등 군부대 시설을 만들었다. 일제가 패망하고 주민들이 하나둘 마을로 돌아왔지만, 외양포 지역은 국방부의 소유가 되었고, 일본군의 흔적들은 외부인이 손 댈 수 없는 상태에서 우리의 아픈 역사를 그대로 간직한 채 머물러 있게 됐다. 을숙도를 기점으로 가덕대교, 눌차대교, 그리고 가덕터널을 진입해 거가대로를 따라 달리다 보면, 은은하지만 코를 잡아 끄는 바다 냄새가 강해지면서 가덕도 ‘대항마을’이 나타난다. 하지만 외양포는 대항마을을 지나면서 바닥난 체력으론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 높은 언덕을 넘었었어도 쉽사리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외양포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묻자, 대항마을의 한 식당 주인은 눈 앞에 언덕 하나 넘으면 외양포라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곧바로 외양포와 러일전쟁에 관련된 역사 이야기를 펼친다. 이 섬 주민들에게는 외양포의 아픈 역사조차 그들의 삶의 일부인 것이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고개를 거의 넘을 즈음, 우리나라 전통 가옥과 흡사한 모습을 지닌 일본식 기와를 얹은 집들이 나타난다. 드디어 외양포 마을이다. 그 집들은 평범한 일반 가정집이 아니다. 그 집들은 제각각 사연을 가지고 있다.
▲ 위 사진의 건물은 목조 건물로 벽은 함석을 덧대었고, 지붕엔 일본식 기와를 올렸다. 이 집은 마을 이장의 집이다. 아래 사진의 집 역시 일본식 기와로 지붕은 얹은 일본식 가옥이다. 이들 집들은 일본의 탄약고와 숙소 등으로 사용되었다(사진: 취재기자 이세호).
외양포 마을의 이성택 이장이 사는 첫 번째 사진의 가옥은 당시 무기창고로 쓰였던 곳이다. 그리고 다른 집들 대부분은 화약고 또는 일본군의 숙소로 사용되었고, 감옥으로 사용됐던 곳도 있다. 외양포에 관한 역사적 사실들을 공식적으로 접할 수 있는 기관이 없어, 마을의 노인정에 들렀더니, 그곳에서 마을 주민들은 마을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정보들을 들려 주었다. 노인정에 있던 한 주민은 건물 밖으로 나와 “저기 앞에 보이는 검은 지붕 얹은 집으로 가봐. 저기 가면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거야”라고 말했다. 주민이 가리키는 집을 찾았지만, 그 집 주인은 건강이 좋지 않아 말을 잘 잊지 못했다. 그 집 앞 바다에 있던 마을 주민 김모(68) 씨가 좀 더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린 시절부터 이곳에서 성장한 김 씨는 마을 집들이 약간의 보수공사만 진행됐을 뿐 마을 집 대부분이 그때 그 시절 그대로라고 했다. 그는 자신의 부모, 조부모들로부터 듣고 자란 그 시대 얘기를 풀어놓았다. 그는 마을의 포대 진지는 관계 기관에서 나와서 정기적으로 관리하는 사람이 있어서 비교적 잘 관리가 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이 마을이 역사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더 철저하게 관리되어야 하는데 예산 문제 때문인지 방치되는 곳이 많아 안타깝다”고 했다. 김 씨의 이야기를 뒤로 하고, 이 마을 집들을 지나 발걸음을 옮긴 곳은 포대 진지였다. 포대 진지 입구에는 일제가 이곳을 점유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기술한 안내판과 ‘사령부발상지지’라고 쓰여 있는 일본군 요새사령부의 건립비가 덩그러니 자리를 잡고 있었다. 비교적 관리가 잘되고 있는 포대 진지는 탄약고와 화약고로 쓰였을 듯한 시설들과 포진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 포대진지 입구에 있는 ‘사령부발상지지’라고 써있는 비석(사진: 취재기자 이세호).
   
▲ 포대진지 모습(사진: 취재기자 이세호)
현대적인 부산의 모습으로부터 그리 멀리 가지 않아도 올 수 있는 이곳 가덕도 외양포에 이렇게 시간이 멈춘 듯한 마을이 있고, 그 멈춘 시계 바늘이 우리 민족들이 악마 같은 일본군에게 고통을 받던 때를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이 마을을 찾는 이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외양포를 보기 위해 섬에 왔다는 김기완(26) 씨는 평소 어디를 갈 때마다 소위 ‘인증사진’을 찍는 것이 취미 중 하나이지만,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마을인 외양포에서는 인증사진을 남기는 행위가 너무 가벼운 행동같이 여겨져 인증 사진 찍기가 주저된다고 했다. 1945년 8월 15일에 우리 민족은 나라를 되찾았고, 올해 그 광복절이 70년 째 되는 해이다. 우리는 우리 땅과 주권을 되찾았지만, 여전히 찾고 회복해야 할 것들은 많아 보인다. 최근 일본의 아베 총리가 전후 70주년 담화를 발표했다. 그 동안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증언하고, 역사적 사실들이 많이 뒷받침해도, 일본 정부는 “자신들은 강제로 위안부를 동원하지 않았다”며 두 손으로 하늘을 가리고 있다. 더는 일본의 총리에게 엎드려 절 받기 식의 사과를 듣고자 애태우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우리 역사’를 잊지 않고, 밝은 미래가 있는 민족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겠다. 각자 있는 자리에서 노력을 다해 역사에 무임승차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1904년의 시절을 그대로 머금고 있는 가덕도 외양포를 보고 오니 더욱 그런 자세가 절실해졌다 “조국을 위해서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이 유일한 슬픔”이라는 유관순 열사의 말이 더욱 가슴에 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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