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인터뷰 시점이 2014년이었습니다. 하 안토니오 몬시뇰은 2017년 10월 14일 선종하셨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일부 내용은 현 시점과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명예 부산시민 하 안토니오 몬시뇰은 늦은 나이에 사제 서품을 받고 전후 부산에 부임, 피난민 구호와 복지∙교육∙의료사업에 헌신하다 2017년 94세를 일기로 선종했다. 지난 58년 여, 사도의 영역을 넘어, 온 몸으로 부산을 사랑했다. 파티마의 세계 사도직 한국본부를 조직하고, 마리아 성심수녀회를 창설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명예고위 성직자(몬시뇰)로, 부산광역시는 명예시민으로 그를 추앙, 굳은 신심과 값진 평생봉사를 상찬했다.
하 몬시뇰은 강론ㆍ피정지도ㆍ신심행사 등으로 항상 바빴다.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포로를 경험했던 독일인 사제, 그는 왜 첫 임지로 전쟁 후의 부산을 선택했을까? 사랑과 평화를 전하는 사도로서, 그는 부산에서 어떤 사명을 느끼며 가난한 사람과 어울려왔을까? 협성봉사대상을 수상하곤 수상소감 대신 애국가를 부르고, 죽을 때까지 부산을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노(老) 성직자. 그 끝없는 ‘부산사랑’의 힘은 과연 무엇인가? 그가 생전에 가진 인터뷰에 귀를 기울여 본다.
부산 우암동 부산항을 내려다보는 야트막한 산동네, 동항성당이 있다. 하 묜시뇰은 이 곳에서 성당의 나이만큼 오래도록 사도의 삶을 살았다. 크고 강인해 보이는 체격, 호호백발에 온화한 할아버지, 그는 그곳에 찾는 누구든 손을 맞잡으며 일상 같은 미소로 반겼다. 귀화를 하지 않은 독일인이 어떻게 한국식 이름 ‘하 안토니오’를 쓰는가?
“내가 부산을 처음 찾았을 때 당시 천주교 부산교구장(초대) 최재선 신부가 물으셨다. 내 본명 Trauner Anton Joseph 중 성(姓, trauner)은 무슨 뜻이냐고. 그 뜻은 ‘강물’이다. 교구장 신부님의 제안에 따라 성을 ‘물’이라는 뜻의 ‘하(河)’로 짓고 성+세례명을 이름으로 썼다.”
전쟁 참전 독일신부, 부산 오기까지
Q. 독일인 Trauner 신부는 왜 전후 한국 찾았나?
“난,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전쟁 후의 한국행을 결심했다.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다 귀국한 지베르츠(Sieberz)신부(한국명 ‘지 신부’)의 슬라이드 영상강론에 결정적 영향을 받았다. 나도 그 곳에서 사목활동을 펼쳐야겠다고....” 신부는 광복 직후 2년간 북한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했다. 그는 참담한 한국사회에서 사랑의 봉사활동이 절실함을 강조했다.
강론을 들은 1년 뒤, 지 신부의 연락을 받았다. "부산교구가 출범했다. 신부가 모자란다"는 부산교구장의 편지를 받았다는 내용이다. 묜시뇰은 한국으로 갈 것을 결심했다. 그가 한국으로 떠날 즈음 그의 집 마당에는 큰 사과나무가 한창 꽃을 피웠다. 이웃들은 그가 아름다운 집과 사과나무를 두고 떠나는 것을 아쉬워했다. 그는 대답했다, “나는 한국에서 이보다 더 큰 영적 사과나무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게 할 것”이라고-. 몬시뇰은 1958년 5월 일본행 화물선에 몸을 싣고 독일 북부를 출발, 7주일 만에 미지의 땅 부산항에 도착했다.
하 몬시뇰은 세계 제2차대전 때 독일군의 일원으로 참전했다, 종전 무렵부터 3년 8개월여 소련군의 포로생활을 경험했다. 몇 차례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기도 했고. 이때의 극한적 경험이 한국행에의 결심과 성공적인 신부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Q. 부산 처음 찾았을 때 첫인상 어떠했나?
“부산의 첫인상? ’와, 사람이 정말 많구나’였다. 아이들도 많았다. 내가 일하는 동항 성당 앞이 온통 아이들 놀이터였다. 성당 유리창이 깨지는 일도 많았고. 그래도 아이들을 야단치지 말라고 했다. 아이들은 유리창보다 더 소중하니까. 아이들은 신이 천국에서 보내신 가장 귀한 선물 아닌가.”
그는 부산에서 ‘살기로’ 결심했으므로, 독일어를 하는 한 대학생으로부터 1년여 동안 한국어를 배웠다. “그 한국어 교사가 나를 어렵게 여겨 웬만하면 ‘잘한다’고 하는 바람에, 지금도 한국어 발음이 부정확하다.” 그는 참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달동네의 성자’로 피난민 돕기부터
그는 1년 여 준비 끝에 신부가 없던 동항성당에 주임신부로 부임했다. 부산의 사제생활은 빈민구휼사업부터. “당시 우암동 일대에는 전국에서 몰려든 수많은 피난민이 살았다. 모두 너무 가난했다. 당연히 구휼사업이 절실했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미군 원조품인 옥수수와 밀가루, 독일에서 보내온 옷가지를 나눠주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는 가난한 이들을 도우며 그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했다. 당시 주민들은 기억한다, “우암동 일대 판자촌에 살았던 5만여 피난민 중 몬시뇰님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몬시뇰의 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독일에서 수많은 옷과 식량을, 미군도 각종 구호품을 성당으로 보내와,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식량을 배급하느라 정신이 없었다는 것이다.
하 몬시뇰, 그의 다음 관심은 보육. 식량배급을 다니다 길거리를 배회하던 소아마비 여자아이(10)와 시각장애 소년(9)까지, 소년소녀 7명을 데려와 사제관 한방에서 자며 직접 키웠다. 그중 한 사람이 파티마의 세계사도직(성모의 메시지를 충실히 지키고 전파하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국제단체) 배경준(62) 사무국장이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15세 때 몬시뇰의 손에 끌려 성당생활을 시작, 성공적인 사회생활을 마친 뒤 현재 하 몬시뇰을 곁에서 돕고 있다. “신부님은 물질적 부분으로 채울 수 없는 공허함까지, 친아버지처럼 채워주셨다. 덕분에 우린 사회의 일원으로 넉넉하게 성장했다.” 그의 회고다.
‘이웃 사랑 실천’ 산 증인, 교육․의료사업 앞장
Q. 한독여자실업학교(현 부산문화여고)를 설립한 과정은?
“역시, 당시 부산에 그런 교육시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1960년대 초반 독일에서 보내온 재봉틀 10대를 밑천으로 학원을 차려 주부 대상의 봉제교육을 했다. 그러다 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독일로 가 한국의 참담한 상황을 전하고 각계각층의 지원을 받아냈다. 1965년 3월 성당 뒤편 여유부지에 한독여자실업학교를 설립했다.”
학교가 문을 열자 학생들이 몰려왔다. 전교생이 2000명에 달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학교는 1970년대 중반 해운대구 우동으로 이전했다. 이후 독일에서 온 청년 자원봉사자 칼 슈밋케(2005년 타계) 씨와 한국인 정순택(전 부산시 교육감) 씨가 운영을 맡으면서 더욱 발전했다. 특히 1960년대 후반 한독실업학교 졸업생 중 매년 100여 명이 독일에 간호사로 취업,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종자돈이 된 천금같은 외화를 송금했다.
Q. 조산원도 설립, 운영하셨던데....
“돈이 없어 병원을 가지 못하는 이들이 무료로 아이를 낳을 수 있어야 했다. 마침 한독여자실업학교가 옮겨간 자리를 조산원으로 개조했다. 생명보다 소중한 것은 없지 않은가?”
하 몬시뇰은 1977년 교회 조산원을 설립, 1993년 문을 닫을 때까지 신생아 2만 6665명의 출산을 도왔다. ‘어린이날’마다 그해 태어난 아기와 어머니를 초대, ‘어린이 대잔치’를 열어 주며 각별한 열정을 쏟았다. 당시 정부는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산아제한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할 때. 몬시뇰은 정책에 반기를 들어가며 생명외경을 강조하고 실천한 것이다.
몬시뇰의 사회공헌에는 그의 어머니의 정성도 들어있다. 독일의 어머니는 전 재산을 팔아 아들에게 보낸 뒤 양로원으로 들어갔다. 묜시뇰은 그 돈 3억여 원으로 지하 1층∙지상 4층짜리 대형 교육관(현재 마리아 피정센터)을 건립했다. 그의 어머니가 별세한 뒤, 동항성당 교우들은 교육관 현관에 감사의 뜻을 새긴 동판을 붙였다. “외아들 하 안토니오 신부님을 한국 땅에 보내시고, 전 재산을 바쳐 사랑의 집을 건립해준 데 대해 감사한다”는 요지의 글이다.
부산 명예시민 몬시뇰… 변치 않는 부산사랑
독일인 하 안토니오 몬시뇰, 부산광역시는 ‘11년 그를 ‘명예시민’으로 대우했다. 허남식 부산시장은 그에게 명예시민증을 수여하며, 빈민구휼사업과 교육사업 등을 통해 그 동안 부산에 기여한 공적에 감사를 전했다. 앞서 부산 남구는 그를 ‘명예구민’ 제1호로 예우했다.
Q. 2011년 협성봉사대상 시상식에서 수상소감 대신 애국가를 4절까지 불러 주변을 숙연케 한 적이 있다. 왜 그랬는가?
“한국을 사랑하는 속내를 그렇게 표현했을 뿐이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애국가는 너무 마음에 드는 아름다운 노래다. 쓸데없는 내 얘기 몇 마디보다 함께 자주 불러야 할 노래라는 생각이다.” 그는 그의 어눌한 한국말 노래를 쑥스러워했지만, 한국이 세계무대에 등장할 때 나온 그 노래, 애국가를 ‘한국을 세계에 알린 작은 메신저’로 본다.
‘한국사랑’에 그야말로 일생을 바친 성직자, 그는 그 열정의 뿌리를 담담히 회고한다. “내가 궁극적으로 하고자 한 일은 사랑과 평화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는 사도의 사명에 따른 것”이라고,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헌신적 봉사를 하면서 이를 통해 사랑과 평화를 느낀 수많은 사람들을 봤다”는 것이다.
참혹한 포로생활 경험… 성직자 길 결심
하 몬시뇰, 그는 알려진 대로 포로생활의 경험 끝에 성직자의 길을 선택했다. 1941년 고교 졸업 직후 독일 공군 통신병으로 입대, 1945년 소련군의 포로로 붙들려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느낀 경험이다.
“하루는 통나무에 다리가 깔려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그러나 난, 살고 싶었다. 성모마리아가 떠올랐다. ‘성모 마리아님! 이 다리를 빼낼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저는 살아서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신부가 되고 싶습니다’, 간절한 기도가 통했을까? 내가 다리를 움직이자 그 다리는 기적처럼 쑥 빠져나왔다.” 그와 동료 독일군인들은 참혹한 포로생활 3년 8개월 만에, 독-러 포로교환을 거쳐 구사일생으로 귀향했다.
Q. 포로생활 경험이 성직자의 길을 걷는 계기 되었나?
“그렇다. 포로 때의 맹세와 어머니의 뜻에 따라 신학공부를 시작했다. 학교를 졸업한 뒤 직업학교에서 신학교사로 3년여 동안 일했다. 그러다 스승 신부의 권유에 따라 신학대학에 진학, 우여곡절 끝에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첫 미사 집전에서 인사말을 통해 선언한다, “하느님과 성모마리아의 도움, 여러분의 기도로 신부가 됐다. 이제 한국에 가기로 결심했다”고-.
그는 오랜 포로생활에서 굶주림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체득했다. 그가 낯선 한국에서 사랑과 평화의 사도로 첫발을 디딘 것은 그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부산은 6∙25전쟁 이후 모여든 피난민들이 구호물자로 끼니를 이어나가던 상황이었으니, 그의 사제활동은 자연스레 상황에 맞는 헌신봉사로 방향을 잡아 나간 것이다.
Q. 당시와 지금의 부산을 비교했을 때 어떤 점이 달라졌나?
"모든 면에서, 완전히 달라졌다. 외형적으로, 미국보다 더 앞서간다 할 정도로 발전했다.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착한 사람들의 도시’로 성장했다. 난, 처음 이 곳에서 북한을 탈출한 피난민을 주로 만났지만, 그 중에도 좋은 사람은 많았다.“ 그가 ‘사랑의 사도’를 넘어 ‘평화의 사도’를 자임하는 뜻을 짐작할 만하다. 그는 그 ‘좋은 사람’들의 고향 북녘 땅이 오늘 공산주의 체제에서 신음하고 있는 데 측은한 애정을 갖고 있다.
같은 언어와 역사, 풍속을 나눠야 할 국가의 분단, 그는 ”남녘은 형의 입장에서 동생 같은 북녘을 껴안아가야 할 것“이라고 주문한다. 그는 그 참혹했던 포로생활 때 ‘우리 고향사람들은 우리를 잊고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 때의 슬픔과 좌절을 잊지 못한다. ‘남쪽사람’들은 ‘북쪽사람’들을 잊지 않고 포용해가야 한다는 신념이다.
“겸손하고 정 많은 부산사람 자랑스러워”
Q. 한국의 언어, 문화, 사고방식은 독일과 달랐을 터, 부산생활 적응하고 정착하는 데 어려운 점은 없었나?
“없었다. 포로 시절 생사의 기로를 경험한 나는 어떤 난관도 감수할 수 있었지만, 부산은 나에게 별 어려움을 주지 않았다. 특히 한국사람은 독일사람과 달리 유달리 정이 많다. 난 부산에서 좁게는 신자, 넓게는 부산사람들에게 늘 도움을 받으며 살고 있다.” 그는 ‘본업’인 구호활동과 자선사업을 하면서도 특히 어렵고 힘들었던 점은 없었다고 기억한다.
Q. 왜, 부산에 그렇게 집착하셨는가?
“부산을 사랑하며 헌신하는 것 자체가 내 사명이었다. 난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산에 올라가 기도했다, ‘여기 많은 사람들을 사랑으로 대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그 기도는 통했다. 난 봉사대상을 받고 애국가를 부를 때도 새삼 다짐했다, ‘부산이 (성경구절처럼) 산 위에서 빛나는 도시’로 영원하도록 헌신할 것을-.”
Q. 2011년 부산의 ‘명예시민’이 되셨다. 어떤 생각 들던가?
“부산사람들이 나를, 나의 헌신을 인정해주는데 감사했다. 당연히 기분은 참 좋았고....”
그는 늘 부산사람들을 ‘좋은 사람’으로 기억하는 만큼, 평소 고향 독일사람에게도 부산사람의 정과 아름다움을 전하는데 열심이다. 고향사람들이 부산을 찾았을 때, 동항성당 신도들이 한복을 입고 환영해 주는 것, 독일사람에게 한복을 입혀 주는 것, 이런 모습에 대한 감동은 크다.
부산사람에 대한 자부와 자랑도 거침이 없다. “부산만의 매력은 무엇인가?”고 물었을 때, 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부산사람들은 서울사람보다 겸손하다”고. 부산사람들은 토박이와 북한 각지에서 몰려든 피난민, 일본에서 돌아온 귀환민까지 어울려 살며, ‘사람다운 사람이 모여 함께 나누는 문화’를 가꿔왔다는 찬사다. 그는 부산, 부산사람, 부산문화의 특징 역시 한 마디로 정의한다, ‘개방성‘이라고-.
호칭에서 보듯, 그는 천주교 ‘몬시뇰’이다. 2005년 천주교 교황으로부터 명예 고위 성직자(Prelate of Honor, 몬시뇰) 임명장을 받았다. 사제품을 받자마자 한국을 선택, 부산교구에 입적한 그, '교황의 명예 전속 사제'(Chaplain of Honour of His Holiness)보다 한 단계 더 영예로운 성직자 반열에 오른 것이다.
건강비결? 신자들의 기도+바쁜 일과
Q. 건강 유지하는 비결은 무엇인가?
“늘 오래 살도록 해 달라고 기도한다, 난 아직 할 일이 많으니. 여러 신자들도 ‘하 몬시뇰 오래 살도록 해 달라’고 기도한다, 남은 꿈을 꼭 이룰 수 있도록. 그 기도에 힘입어 난 건강하다.” 그는 건강관리를 위해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아도 건강하다. 요즘 아침 6시 45분에 수녀미사를 집전하고, 9시면 신자들과 기도하고, 낮엔 집필활동에 매달리고, 밤 9시 30분이면 잠자리에 든다. 쉴 새 없이 일을 하는 것, 오랜 생활방식이다.
그는 ‘파티마의 세계사도직’ 한국본부장이었다. 1917년 포르투칼 파티마에서 발현한 성모 마리아의 메시지(세계평화에의 헌신)를 전파하며 실천하는 기도모임이다. 1964년부터 이 직무를 수행하며 출판사업도 병행, 한국사람과 외국 교포사회에 정신적 도움을 주었다. 회원은 20만 여명.
Q. 꼭 이루고 싶은 일이 있다면? 오래 살도록 기도하는 그 할 일은 뭔가?
“남북통일에의 여망을 담은 책자(가제 <우리나라 만세>)를 발간하는 일, 북녘을 마주한 임진각 인근에 기도하는 성당을 짓는 일이다.” 그의 남북통일에 대한 여망은 얘기한대로다. 그 염원을 실현하기 위해 1974년부터 파주 임진각 자유의 다리에서 ‘한국 평화통일 기원미사’를 전국행사로 봉헌했다. 이 기원미사를 위해 임진각 평화누리 부근에 부지를 매입, ‘한국통일 기원 성모순례 성전’ 건립공사를 진행했다.
“앞으로도 부산에서 사랑∙평화 실천할 것”
Q. 부산에서 살아 행복한가?
“행복하다. 내가 ‘좋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부산에서 일생을 보냈으니 행복할 수 밖에. 행복을 느끼는 것은 건강을 유지하는데도 큰 도움을 준다.” 그는 한국은 세계 속에 더 많이 알려져야 한다고 믿는다. 특히 ‘좋은 사람들의 나라’로 널리 알려져야 한다고.
Q. 부산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었으면 좋을까?
“내 사명처럼, ‘사랑의 사도’ ‘평화의 사도’로 기억해 주면 더없이 좋겠다.”
그는 “죽을 때까지 독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한다. 한국에 도착했을 때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고 이곳 사람들과 약속했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또 한국에서 할 일이 남았으니 부산에 계속 머물러야 한다는 생각이다.
하 몬시뇰은 ‘이웃사랑 실천’의 산 증인이다. 첫 임지로 전후 피난민촌을 선택, 자신을 위해선 허름한 단벌옷이면 족했고, 받은 선물 하나도 아낌없이 이웃에게 내어주는 삶이다. 남을 위해 쉼 없이 봉사하고 영적 지도에 끊임없이 헌신해온 값진 삶이다.
하 몬시뇰은 묻는다. 천주교 신자와 회교도 신자가 우물을 팔 때, 땅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물은 천주교 물인가 회교도 물인가를. 그것은 그냥 ‘사람을 위한 물’이라는 것이다. 그는 안타깝게 생각한다. 하나의 진리를 두고 종교, 인종, 물질문명 때문에 서로 벽을 만드는 것을. 그의 바람은 오직 한 가지, 온 세상 사람이 한 가족으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었다. 그는 평생을 부산에서 사랑과 평화를 실천하며 살다가 부산을 떠나 위대한 영면의 길로 가셨다.
하 안토니오 몬시뇰 (Trauner Anton Joseph) 1922년 독일 출생. 본명 Trauner Anton Joseph. 제2차 세계대전 참전, 3년 8개월여 패전포로 경험. 포로생활 때의 고난과 한국 근무 신부의 강론의 영향으로, 36세의 나이에 사제 서품을 받고 한국 근무 자원. 1959년 부산 우암동 동항성당 주임신부로 부임, 피난민 구호와 다양한 복지∙교육∙의료사업에 헌신. 2005년 가톨릭 명예 고위 성직자(몬시뇰), 2011년 명예 부산시민 추앙 받음. 한국식 이름을 쓰며 “죽을 때까지 부산을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부산사람 못지않게 부산을 사랑하는 ‘부산사람’으루 살다 2017년 10월 14일 선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