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성(동서대 교수, 전 부산MBC 보도국장·상무이사)
영화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을 보고 나면 “나이는 정말 숫자에 불과하고 세상은 참으로 넓고 할 일은 많구나!” 이런 생각이 든다. 백 살이 된 어르신이 무료하기 짝이 없는 양로원을 나와 무작정 길을 나서면서 겪는 이야기인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연들이 기상천외하다.
주인공 알란 칼손을 맡은 로버트 구스타프슨은 1964년생으로 촬영 당시 채 쉰 살이 안 되었지만 능청스럽게 백 살 노인을 감쪽같이 연기해 화제를 모았다. 2013년 동명의 인기 소설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다양한 볼거리와 익살맞은 대사로 관객을 깔깔대며 웃게 만드는 유쾌한 영화이다. 설정 자체가 대단히 기발한데, 요약하면 이렇다.
주인공 알란 칼손은 양로원에서 100세 생일을 맞이한다. 양로원 도우미들은 보기 드문 장수노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대형 케이크를 준비해 생일잔치를 하느라 분주하고, 지역유지들과 기자들도 찾아 와 떠들썩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하지만 알란은 전혀 기쁘지 않은데, 평생 모험을 즐겨온 그에게 양로원은 따분하기 그지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생일잔치도 마다하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자신의 방 창문을 넘어 길을 나선다. 무작정 기차역을 찾아간 그는 근교로 가는 버스를 잡아타고 도시를 벗어난다. 문제는 그가 폭주족이 잠시 맡아달라며 건네고 간 여행 가방을 가지고 버스를 타면서 시작된다. 가방 안에는 검은 돈이 분명한 엄청난 액수의 현금이 잔뜩 들어 있었던 것이다.
폭주족은 알란을 쫓아가지만 번번이 알란을 잡지 못하고 손해만 본다. 마치 톰과 제리의 추격전을 보는 듯 한 상황이 이어지는데, 이와 함께 백 살이 되기까지 알란의 파란만장한 삶이 교차되면서 이야기는 더욱 흥미진진하게 진행된다.
‘100세 노인’ 알란 칼손의 이야기는 나이 들어서도 할 일이 얼마나 많은 지를 웅변하고 있다. 체력만 허락된다면 스웨덴에서 발리까지 얼마든지 다니면서 즐겁고 유쾌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체력도 체력이지만 이는 알란의 독특한 인생관이 큰 몫을 차지하는데, 그의 인생관은 부모님의 삶, 특히 어머니의 유언이 큰 영향을 미쳤다.
알란이 어렸을 때 아버지가 먼저 떠난 뒤 병석에 누운 어머니는 힘든 숨을 쉬면서 알란에게 이런 말을 남긴다. “얘야, 인생을 고민하지 말아라. 너희 아버지가 보여줬듯이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 있는 거란다.” 고아가 된 알란은 어머니의 유언대로 아주 낙천적인 인생관을 갖게 되었고 그 후로 세계를 누비면서 마음껏 자신의 삶을 살았다.
백 살 어르신이 몸소 보여준 인생사는 비록 픽션이지만 우리들에게 ‘버킷 리스트’를 연상하게 한다. 할 일을 찾아 세상으로 나가라고 등 떠밀던 어느 재벌 총수가 연상되는 것은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일상에 지친 사람들에게 여행과 모험은 남의 나라 얘기처럼 낯설기만 하다. 체력은 물론이고 경제적 여력과 시간적·정신적 여유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사실 나 역시 나의 버킷 리스트를 아직 만들지 못했다. 아직은 현역이라는 생각이 강하고 여러 가지 사정도 녹록치 않기 때문이다.
사전을 찾아보면, ‘버킷 리스트(Bucket List)’는 ‘죽기 전에 해야 하는 또는 하고 싶은 일을 적은 목록’이라고 나온다. 영어의 ‘kick the bucket’(양동이를 차다)에서 나온 뜻이라고 한다. 서양에서 높은 곳에 밧줄을 걸어 놓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경우 발밑에 양동이를 두었다가 차버렸다고 한다.
버킷 리스트란 그 양동이에 올라서기 전에 해야 할(또는 하고 싶은) 일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버킷 리스트가 본격적으로 인구에 회자된 것은 아무래도 2007년 영화 <버킷 리스트 :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원제: The Bucket List)이 개봉된 이후의 일인 듯하다. 국내 개봉에서 큰 인기를 모으지는 못했지만 할리우드 스타 잭 니콜슨과 모건 프리먼이 출연해 화제를 모은 작품이다. 암에 걸려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은 두 노인이 중환자실에서 만나 의기투합해 평생 해보지 못한 일을 하기 위해 나서는 이야기이다.
현실에서 찾아보기 쉽지 않지만 누구나 한 번 해보고 싶은 그럴 법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2000년대 이후 한국에서도 경제사정이 좋은 노인 인구가 크게 늘어나면서 버킷 리스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는데, 젊은 층에서도 일찌감치 인생구도를 잡는데 활용하였다.
최근 한 대기업이 직원들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세계일주 떠나기’와 ‘다른 나라 언어 마스터하기’, ‘악기 하나 마스터하기’가 죽기 전에 가장 하고 싶은 일 즉 버킷 리스트 톱3에 올랐다고 한다. 여행과 언어, 악기가 한국인의 3대 희망사항이라는 것인데, 나 역시 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단지 유행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노력도 필요하고 여러 가지 사정이 허락해야 하기 때문이다.
버킷 리스트의 효능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자신을 돌아볼 기회가 되며, 구체적인 삶의 목표를 설정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생활에 활기를 불어 넣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한 번 만들고 싶다. 그런데, 국립국어원이 정한 ‘버킷 리스트’의 순화어는 ‘양동이 목록’이 아니라 ‘소망 목록’이다.
영어의 원래 뜻은 ‘해야 하는 또는 하고 싶은’ 일이니까 ‘소원 또는 소망’이 되어야 하는데 둘 다 선택할 수 없으니까 ‘소망’을 선택한 것이라 본다. 백범 선생은 ‘대한 독립’을 소원한 다음 ‘통일’을 소망했는데, 그런 거창한 것이 아니라도 자그마한 무언가를 소망하고 싶다. 더 늦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을 수첩에 적어두어야 할 듯하다. 나의 버킷 리스트는 아직 공백이고 미완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