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글은 졸저 ‘한국의 미디어, 사회갈등, 사회변화(경성대학교 출판부, 2023년 개정판)’의 13장 결론 부분을 일부 발췌해서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신대중사회’ 시리즈는 4부작으로, 이전 글은 [“한국은 지금 신(新)대중사회(1)”: 비이성적 헤게모니 위기 상황이 신대중사회를 초래하다](//liliumpumilum.com/news/articleView.html?idxno=35783), [“한국은 지금 신(新)대중사회(2)”: ‘우리’와 ‘그들’의 끝없는 싸움, 편 가르기](//liliumpumilum.com/news/articleView.html?idxno=35864)였습니다.
두 번째 한국 사회의 신대중사회 현상은 ‘정치의 이미지화’, 혹은 ‘이미지 만능화’다. 헤게모니 장악을 위해 각 정치집단이 미디어를 이용해서 좋은 이미지를 국민에게 심어주려고 할 뿐, 자기주장의 본질로 사람들을 설득하고 동의를 구하려 하지 않는다. 헤게모니 싸움이 정책 설득이 아니고 이미지 전술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미지는 본질이 아니고 본질의 그림자인 겉모습이나 영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미지는 사람의 감정을 움직여 판단 능력을 흐리게 하고 방해한다. 정치의 이미지화는 그래서 시민 개개인의 이성을 파괴해서 비이성적이며, 자신의 판단을 버리고 남과 유사한 생각을 하게 해서 획일적이고, 비판 없이 남 따라 유행에 편승해서 몰개성적이다.
정치의 이미지화와 관계 깊은 게 ‘가짜뉴스’다. 사람들은 가짜뉴스가 위험하다고 한다. 가짜뉴스는 실제 일어나지도 않은 사건이 진짜 일어난 사건처럼 보도되는 뉴스를 말한다. 요새는 영상도 안면합성 기술(deep fake 기술)이나 AI로 조작될 수 있다. 한국 여배우들이 유럽 포르노에 출연했다는 충격적 뉴스는 알고 봤더니 안면합성 기술로 조작된 가짜 영상이었다. 요새는 AI 기술로 사람 목소리와 표정까지 복제할 수 있으니, 가짜뉴스나 가짜 영상은 점점 더 선정적이고, 자극적이며, 유혹적이다.
그런데 가짜뉴스보다 더 위험한 게 있다. 그것은 ‘가짜사건’이다. 가짜사건은 미디어에 보도되기 위해 기획되고 연출된 사건을 말한다. 소위 언론플레이, 미디어 이벤트라고 불리는 행사들이 가짜사건이다. ‘가짜사건(의사 사건, 疑似 사건, pseudo-event)’이란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미국 역사학자 부어스틴은 진짜 사건을 자연발생적 사건, 즉 교통사고나 살인사건이라고 했으며, 미디어를 불러 모아 놓고 미디어가 보도하도록 의도적으로 누군가가 연출한 사건을 인공적 사건, 즉 가짜사건이라고 불렀다.
남북 정상 도보다리 회담, 광화문과 서초동 집회, 조국의 기자회견, 국회 청문회, 대통령의 국민과의 대화, 정치인의 단식, 삭발식, 집회들은 가짜뉴스가 아니다. 실제 일어난 이벤트가 정상적으로 취재되어 뉴스로 보도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벤트 자체는 인공적이다. 고도의 계산에 따라서 의도적으로 연출된 것이며, 100% 자연발생적 사건이 아니다. 가짜사건은 무엇이 진실이고 참모습인지, 그 의도가 무엇인지, 모호하고 알쏭달쏭해서 일반인은 그 본질을 파악하기 어렵다. 워싱턴포스트의 마틴 배런 편집국장은 “정부가 진실을 만들어내고 국민들에게 믿으라고 요구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는 정부가 벌이는 가짜사건의 위험성을 지적한 말이다.
2016년 옥스퍼드 사전은 올해의 단어로 ‘탈진실(post-truth)’을 골랐다. 탈진실은 객관적 사실보다 이데올로기적 편견인 개인적 신념이나 감정에 여론이 휩쓸리는 현상을 가리킨다. 정치학자 김영수 교수는 언론의 칼럼을 통해서 한국 정치가 ‘민주 대 반민주 시대’를 지나서 ‘진실 대 탈진실의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진단했다. 여기서 진실은 확고한 사실이며, 탈진실은 진실이라고 속이고 이미지를 조작하는 행태를 일컫는 말이라고 했다. 예를 들면, 조국 전 장관 가족의 비리나 이재명 대표에 대한 각종 범죄 혐의에서 ‘진실’이 중요한 게 아니라 누가 더 ‘진실처럼 보이게’ 이미지를 미디어를 통해서 잘 포장하느냐의 싸움이라는 것이다.
정치학자 강원택 교수는 한국 정치 풍토에서 오래 정치권에서 활동한 사람은 대개는 국민으로부터 호감을 얻기보다는 비호감 이미지로 불만의 대상이 되기 쉬워서 정치권 밖에서 이미지가 좋은 유명 인사가 갑자기 인기를 얻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과거의 반기문, 안철수, 윤석열, 최근의 한동훈, 인요한 같은 사람이 여기에 속한다. 강원택 교수는 또한 이미지 위주의 한국 정치는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포퓰리즘에 취약하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막강한 대중 선동의 공간인 촛불집회라는 직접 민주주의 형태를 벌이면, 박근혜 대통령처럼 회복하기 힘든 이미지 타격을 입게 된다고 했다. 한국은 이미지로 정치하기가 쉽기도 하고, 한번 이미지에 손상을 얻으면 동시에 회복하기도 어려운 포퓰리즘적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
결국, 한국에서는 모두 본질과 내용의 진지한 토론이 아니라 이미지 끌기 연출 싸움이 우선한다. 한국 사람들은 왜 이념과 정책의 본질은 안 보고 그럴듯한 겉모습인 정치인의 이미지에 더 환호하는 것일까? 영국 기자 마이클 브린은 한국인은 집단지향성이 강해서 타인의 시선이나 타인의 견해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기 때문에 정치인도 타인이 보는 자신의 이미지 관리에 신경을 많이 쓴다고 했다. 그러나 정치의 이미지화는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 이상의 원인이 있을 것이다.
2013년 우리나라 1인당 연간 평균 영화관람 횟수는 4.12편으로 미국을 제치고 세계 1위였고, 2016년은 4.22회로 아이슬란드에 이어 세계 2위였다. 그런데 2004년 우리나라 국민의 연평균 독서 권수는 13.9권, 2009년은 10.9권, 2015년은 9.3권으로 줄고 있다. 2004년 미국인은 한 달에 6.6권을 읽었고, 일본인은 6.1권, 프랑스인은 5.9권, 중국인은 2.6권을 읽었다. 한국은 2004년 한 달에 1.3권을 읽었다. 이는 세계 192개국 가운데 166위에 해당한다. 그리고 20년이 지났다. 대한민국 독서인구가 늘어났다는 얘기는 그 어디에서도 들어 본 적이 없다.
국제미용성형협회의 통계에 따르면, 2010년 인구 1000명당 연간 성형 건수는 한국이 16건으로 세계 1위, 그리스가 14건으로 2위, 이탈리아가 13건으로 3위를 차지했다. 2022년 기준, 명품 소비에서도 한국은 전 세계 1위를 차지했다.
책 안 읽고, 영화 많이 보고, 성형 많이 하고, 명품 많이 사는 나라의 특징은 바로 인성보다는 외모, 내용보다는 형식, 이상보다는 현실, 본질보다는 이미지를 선호하는 국민성 트렌드를 보여준다. 그래서 정치인 지지자들은 연예인 팬클럽처럼 무조건 환호하는 팬덤 문화를 보인다. 정치인들은 정책과 이념으로 국민을 설득해서 표를 얻을 필요가 없다.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이미지 ‘코디’를 통해서 열성 팬을 관리하면,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다. 지성적 리더십, 자발적 존경심 같은 개성 있고 지적인 요소는 선거에서 의미가 없다. 미디어를 타고 흐르는 이미지가 대한민국의 사회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한국 사회는 정치 지지자들이 비이성적이고 유행에 편승하는 신대중사회적 이미지 선도국가가 됐다.
[“한국은 지금 신(新)대중사회(4)”: 큰 정부가 지나치면 중국 같은 ‘고도 관리사회’ 된다(//liliumpumilum.com/news/articleView.html?idxno=36121)]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