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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과 한국문화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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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과 한국문화의 힘
  • 편집국장 강동수
  • 승인 2016.06.19 16:0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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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국장 강동수
게을러서인지, 심사가 꼬여서인지는 몰라도 나는 이른바 ‘베스트셀러’란 것에 약간의 불신을 가지고 사는 편이다. 이를테면, 무슨 영화가 천만 명이 들었네, 어쩌네 하면 애초 그 영화를 보러 갈 생각을 먹었다가도 안 가고 마는 식이다. 뭐, 한 1년쯤 뒤엔 컴퓨터로 다운받아 뒤늦게 볼 때도 있긴 하지만 지인들과의 대화에선 먹통이 될 수밖에. 이른바 흥행대박 작품에 관한 한 나는 대표적인 ‘슬로 어답터’인 거다. 영화만 그런 것도 아니다. 젊어서부터 노래니, 패션이니 할 것 없이 유행에 둔감했던 터다. 명색이 소설가랍시고 문단의 말석을 더럽히고 있는 처지이지만, 문학 작품이라 해서 내 ‘베스트셀러 기피증’의 예외가 될 순 없다. 이를테면 200만 부 넘게 팔렸다는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도, 만나는 사람마다 그 소설 이야기를 꺼내는 통에 짜증(?)이 나서 일부러 안 읽다가 마지못해 한참 뒤에야 읽었다. 최근에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를 읽었다. 한강은 나와 같은 해 등단을 했고 부친 되시는 한승원 선생이 내 신춘문예 심사위원을 맡았으니 일종의 동료애(?) 때문에라도 그의 소설을 찾아 읽었던 폭이긴 했다. 어쨌거나 맨부커 상을 받았다기에 다시 찾아 읽을 생각을 했다가 나온 지 10년도 넘은 책이 갑자기 폭발적인 판매고를 올리고 있다는 소릴 듣고 예의 베스트셀러 기피증이 되살아났다. 그랬는데, 어느 예비 소설가모임으로부터 그 소설의 해설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하는 수 없이(?) 서가 한 구석에 끼인 그 책을 집어 들었던 것. 사실은 10년도 훨씬 전 처음 그 작품이 나왔을 때 읽었으니 기억이 가물가물하기도 했다. 서두가 좀 장황해졌지만, 어쨌든 다시 읽어도 괜찮은 소설이긴 했다. 누군가를 죽이는 꿈을 꾸고 나서 갑자기 육식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한 여성의 상처받은 내면을 섬세한 필치로 묘사한 소설이었다. 단정하고 섬세한 문체이기는 했지만,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나는 엄청나다고 할 만한 감동을 받지는 못했다. 책장을 닫고 나서 나는 이 소설이 이른바 세계 3대 문학상의 하나라는 맨부커상을 받은 이유를 잠깐 생각했다. <채식주의자>가 오늘을 사는 한국인의 마음의 풍경을 잘 그려낸 수작임에는 틀림없지만 적어도 내가 읽은 소설 중에선 그에 못지않은 작품이 적지 않다. 그의 작품이 수상을 한 것은 많은 사람들의 지적대로 작품의 수준과 함께 번역의 힘이 큰 몫을 차지했을 터이다. 신문기사를 읽어보니 아닌 게 아니라 번역자의 노고가 적지 않았다. 번역자로서 맨부커 상을 공동수상한 데버러 스미스 씨는 2010년부터 독학으로 한국어를 익힌 젊은 영국인 번역가다. 그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저는 부나 명예를 위해 번역가가 된 것이 아니라 제가 사랑하는 작품을 보다 많은 이와 공유하고픈 욕구 때문에 번역가가 됐습니다.” 한국인 작가가 한국인 독자를 위해서 한국어로 쓴 소설을 구미인들이 그 주제나, 문체를 원문의 감각대로 음미할 수 있도록 번역한다는 게 쉬운 일은 결코 아니겠다. 한국문학 번역의 실패는 한국어에 너무 충실하게 번역해 외국어가 매끄럽지 않은 경우와 외국어 독자들을 지나치게 고려한 나머지 한국어와 한국문학 고유의 특징을 소거해 버리는 경우로 크게 나뉜다. 스미스 씨도 번역 과정에서 많은 고민을 거쳤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작가와 이메일로 자주 상의를 거쳤다고도 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회식에서 마신 소주’는 ‘회식’이란 개념을 이해하지 못할 영어권 독자들을 위해 ‘저녁식사 중 마신 소주(soju I’d had with dinner)’로 과감히(?) 생략했고 갈비는 ‘rib meat,’ ‘향긋하고 달콤하게 튀긴 삼겹살’은 ‘fragrant, caramelized deep-fried belly pork’로 풀어 설명했다고. 그러면서도 한국의 고유문화를 소개한다는 취지에서 소주, 비빔밥, 김치는 각각 ‘soju,’ ‘bibimbap,’ ‘kimchi’로 번역했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번역이 곧 창작이라는 말을 실감할 수밖에 없겠다. 다들 알다시피, 한국의 대중문화는 글로벌화한 지 오래다. k-pop은 물론이고 영화나 드라마도 일찍부터 외국으로 수출돼 ‘한류열풍’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던가. <강남스타일>이나 <대장금> 따위 오래된 사례를 들먹일 것도 없다. 미술이나 클래식 음악 분야에서도 일찍부터 세계적으로 두각을 드러낸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런데도 문학만이 오랫동안 고립된 섬처럼 한국 땅에 갇혀 있었던 건 작가들의 작품 수준 문제라기보다는 ‘번역’이라는 장애물 탓이 컸던 셈이다. 음악이나 미술처럼 시·청각이라는 보편적인 인간의 지각 능력이 아닌, ‘언어’라는 후천적으로 습득해야 할 인식 도구 차이 때문이란 거다. 문화 정책을 맡은 정부기관들이 ‘한국문학의 번역’ 문제를 내팽개쳐둔 것만도 아니다. 한국번역문학원 등에선 공모를 통해 번역 지원 사업을 펼치고 있고,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같은 국제 도서전에 한국 문학작품이나 작가들을 내보기도 한다. 이문열, 황석영, 김영하 같은 유명 작가들의 작품이 구미어로 번역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가시적 성과를 얻지 못했던 건 아직 서구의 주류 출판계의 벽을 뚫지 못한 한계와 함께 번역 수준의 문제가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바꾸어 말하자면, 번역 작품 숫자를 늘리는 것에 자족하는 단계를 넘어 제대로 된 번역이 나와야 한다는 뜻이다. 정부가 번역 사업에 관심을 갖는 건 나쁘지 않지만 단순히 지원금을 주는 것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란 거다. 한강의 작품을 번역한 데브러 스미스 씨도 한국문학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과 사랑 때문에 스스로 독학해서 한국어를 익혔고, 작가와의 오랜 토론과 교감을 거쳐 수정을 거듭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번역비, 출판비만 던져주는 것으로 끝낼 게 아니라 진정으로 한국문화를, 한국문학을 사랑하는 자발적인 외국인 번역가를 발굴하고 그들에게 한국인의 삶과 문화를 충분히 체험할 기회를 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싶기도 하다. 나아가 작가와 번역가가 1:1로 매칭할 환경을 만들어 주면 어떨까. 번역에 관한 한 일본이 우리의 나침반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일본의 문화를 ‘번역의 문화’라고 통칭하는 사람도 있을 만큼 일본은 만만찮은 번역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일본의 학계는 한국처럼 외국 도서의 번역을 하찮은 일로 여기지 않는다. 번역을 통해 새로운 외국 사조를 습득하게 하는 일도 연구논문에 못지않은 학문적 업적으로 쳐준다는 것. 이미 1734년에 몽테스키외의 <로마성쇠기>가 번역된 나라가 아닌가. 그러니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얻은 대중적인 베스트셀러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조차도 한 개인의 노력을 넘어 로마에 대한 280여 년에 걸친 일본 사회 전체의 지적 축적 덕분일 것이란 추론도 가능하다. 따지고 보면 오늘날 우리가 무심하게 쓰고 있는 숱한 개념어들도 사실은 일본인들의 작품이다. ‘철학,’ ‘변증법,’ ‘인식론’ 따위 우리의 사유를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숱한 단어들은 일본산이다. 뿐인가. ‘기차,' ’축구' 같은 일상어조차도 서양문화를 옮기면서 고심을 거듭한 일본인들의 산물이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우리 학계에선 아직도 외국도서를 번역하는 것을 학자의 본업으로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러니 제대로 된 외국 번역서가 아직도 부족한 것이다. ‘번역’을 하찮은 것이라 무시하면서도 창조적인 학설은커녕 제대로 된 개념어, 학문어 하나 만들어내지 못한 한국 학계를 두고 실제로는 남이 공들여 번역한 성과에 무임승차한다고 비판한다 해도 그다지 망발은 아닐 터이다. 또 있다. 문학을 포함한 한국어 저작물의 외국어 번역출판, 외국어 서적의 한국어 번역만큼 중요한 게 한문으로 된 우리 고전의 번역이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등 주옥같은 옛 기록이 번역돼 나온 건 정부의 무관심 속에서도 꾸준히 국역 사업을 펴온 민족문화추진위원회 등 민간의 노력에 힘입은 바 크다. <국역 조선왕조실록>이 없었다면 드라마 <대장금>이나 영화 <왕의 남자>도 나오지 못했을 것이라는 지적이 있다. 눈길을 조금만 더 돌리면 우리 고전은 한류를 떠받칠 문화 콘텐츠의 보고다. 신예학자들이 고전을 현대 어법으로 번역해 잇따라 펴내고 있지만 아직은 부족하다. 정부의 체계적인 노력이 필요한 대목이다. 언젠가 만났던 한 문학평론가가 문명국 치고 제대로 된 어원사전 하나 없는 나라는 우리나라 뿐일 것이라고, 그런 기본적인 ‘공구 서적’의 부재를 안타까워하지도 않는 우리의 지적 풍토는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번역도 학문의 공구 역할을 하기는 마찬가지다. 제대로 옮겨진 외국 번역서가 많을수록, 현대인들이 읽기에 부담 없는 고전 번역서가 늘어날수록 학문의 영역이 넓어지게 될 것이다. k-pop도 좋고, 영화와 드라마의 수출도 중요하다. 그러나, 대중가요나 영화, 드라마가 한국문화의 전부인 것도 아니다. 한 나라의 진정한 문화수출은 사유와 말의 수출이다. 그래야 외국이 우리를 진짜 존중한다. 갑자기 경제성장을 이룬 졸부의 나라, 휘황찬란하고 ‘비까번쩍’한 사이키델릭 조명만 번쩍거리는 나라가 아니라 오랜 전통과 문화의 힘을 갖춘 나라라는 걸 보여 줄 때도 되지 않았을까. 그러려면 작가들도, 학자들도 더 깊은 고민과 치열한 글쓰기를 통해 인류 보편의 가치를 창조해 내려는 노력이 필요함은 말할 나위도 없다. 더불어 그것을 전파하는 ‘번역’의 문제에도 국가적·사회적 관심과 지원이 필요할 터이다. 사유와 말을 창조하고 그것을 다시 수출하기 위해선 우선 제대로 된 ‘수입’에부터 눈을 돌릴 일이다. 나아가, 우리의 사유와 말을 담는 '번역'이란 그릇을 더 충실히 빚어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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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2016-06-20 14:21:27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