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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 안희제 선생의 항일 독립운동정신이 깃든 곳...부산 중구 백산기념관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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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 안희제 선생의 항일 독립운동정신이 깃든 곳...부산 중구 백산기념관에 가다
  • 취재기자 민소진
  • 승인 2024.12.12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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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백이라 불리는 독립운동가들이 있다. 백범 김구(1876-1949), 백야 김좌진(1889-1930). 다른 한 명은 누구인가? 백산 안희제이다.

앞선 두 명에 비해 백산 안희제(1885-1943) 선생에 대해서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대한독립의 숨은 영웅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이런 그의 애국심을 기리고 후세에 그 뜻을 전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 부산광역시 중구에 위치한 백산기념관이다.

백산기념관 입구의 모습이다(사진: 취재기자 민소진).
부산 중구에 있는 백산기념관 입구의 모습이다(사진: 취재기자 민소진).

국권회복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신교육 기관을 설립한 ‘백산 안희제’

그는 어려서 고향에서 한학을 수학했는데 특히 문장에 뛰어났다. 그러다 러일전쟁과 일제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계몽주의로 전환한 그는 국권 회복을 위해선 스스로 실력을 기르고 계몽하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하여 보성전문학교 경제과에 입학한다. 이후 양정의숙 경제과로 옮겨 졸업을 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그는 신학문 교육이 필요한 학생들이 많다고 느껴 1907년 소학교 설립 운동에 뛰어들어 구명학교와 의신학교, 창남학교를 세운다.

학교를 세우는 것은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그 당시 창남학교를 세운 경남 의령은 다른 지역보다 보수성향이 짙었던 곳이라 집안 어른들의 반대가 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포기하지 않고 식음을 전폐하며 끝까지 버틴 결과 집안 어른들을 설득하는데 성공한다. 교육에 대한 그의 의지가 보이는 순간이다.

양정의숙의 경제과와 관련한 기사 자료이다(사진: 취재기자 민소진).
백산 안희재가 수학한 양정의숙의 경제과와 관련한 대한매일신보 기사 자료이다(사진: 취재기자 민소진).

그의 발자취를 따라서

기념관 입구를 지나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제1전시실이 나타난다. 그리고 바로 눈 앞에 그의 조각상이 나타난다. 그의 조각상을 바라본 상태에서 오른쪽부터 본격적인 전시를 만날 수 있다. 그의 출생과 성장, 교육구국운동을 지나면 그가 활동했던 국내 비밀결사단체와 관련된 자료들을 만날 수 있다.

제1전시실로 들어가면 보이는 백산 안희제 선생의 조각상이다(사진: 취재기자 민소진).
제1전시실로 들어가면 보이는 백산 안희제 선생의 조각상이다(사진: 취재기자 민소진).

1909년 그는 서상일, 이원식, 남형우 등 경상남도의 계몽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비밀결사단체인 ‘대동청년당’을 결성했다. 이후 그는 러시아로 망명하여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국외에서 항일투쟁과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해서는 국내의 비밀 연락망과 독립운동 자금 조달이 절실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고향의 논을 팔고 동지를 규합하게된다. 이후 1914년 귀국하여 부산에 ‘백산상회’를 설립한 뒤 자금을 마련하였다.

대동청년당은 결성 이후 1920년대 중반까지 활동하면서 경찰에 노출되지 않고 보전했다. 대동청년단의 실체는 해방 후에야 관련자의 증언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조직이 비밀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단규(團規)를 통해 엿볼 수 있었다. 첫 번째, 단원은 반드시 피로 맹세할 것. 두 번째, 새 단원의 가입은 단원 두 명 이상 추천을 받을 것. 세 번째, 단명이나 단에 관한 사항은 문자로 표시하지 말 것. 네 번째, 경찰, 기타 기관에 체포될 경우 그 사건은 본인에만 한하고 다른 단원에게 연루시키지 말 것. 이것을 보면 그들이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다.

국내 비밀결사단체였던 대동청년당과 관련한 자료와 설명이다(사진: 취재기자 민소진).
국내 비밀결사단체였던 대동청년당과 관련한 자료와 설명이다(사진: 취재기자 민소진).

국내의 중요한 독립운동기지였던 백산상회

백산상회는 해외 독립운동세력의 국내 연락 거점인 동시에 독립운동 전파소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설립 초기 곡물, 면포, 해산물 등을 판매하는 소규모 개인 상회로 일제의 눈을 피해 자금을 마련하였고, 이후 1919년 백산상회는 백산무역 주식회사로 확대 개편하였다.

그러면서 안희제는 회사 경영과 더불어 인재 양성에도 앞장서 장학재단인 ‘기미육영회’를 조직해 인재를 양성하고 우수한 청년을 선발해 국내외로 유학을 보낸다. 또한 여론의 중요성을 자각하여 동아일보 부산지국장을 역임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국내 보급 통로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매일신보에 게재된 백산상회 광고 자료이다(사진: 취재기자 민소진).
매일신보에 게재된 백산상회 광고 자료이다(사진: 취재기자 민소진).

백산상회는 회사의 수익과 관계없이 독립운동 자금을 공급하다 보니 경영난을 겪게 되었다. 그 상황에서 그곳이 독립운동 자금의 공급처라는 것을 눈치챈 일본 경찰이 끈질기게 수색, 감금, 고문, 장부 검열 등 탄압을 하자 결국 백산상회는 이를 견디지 못하고 1928년 문을 닫는다.

대학생 양영은(21, 부산시 북구) 씨는 “부산에 살고 있지만 이런 독립운동가가 있는지 잘 몰랐고 기념관이 존재했는지는 더더욱 몰랐다”며 “독립을 위해 이렇게 힘써주신 분을 몰랐다는 게 부끄럽고 죄송하다. 안희제 선생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시민이 있다면 앞으로는 조금이라도 더 관심을 기울이면 좋겠다”고 바람을 나타내기도 했다.

국내외 독립운동의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백산상회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우리는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했던 노력을 찾고 기릴 수 있다. 백산기념관이 옛날 백산상회가 존재하던 자리이기 때문이다. 비록 규모는 크지 않지만 그의 독립에 대한 의지를 느끼기엔 충분한 공간이다.

백산기념관은 휴관일인 월요일과 공휴일을 제외하면 평일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주말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누구나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전시실은 총 두 개로 상설전시실과 특별전시실로 이루어져 있지만 특별전시실은 특별전이 아니면 평소에는 일반인들에게 개방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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