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우리나라에서 출발하는 국제선 탑승객에게 5년 기한으로 기존 1,000원씩 걷던 '국제빈곤퇴치기여금'을 좌석 등급에 따라 최대 1만 원까지 영구적으로 차등 부과하는 방식으로 바꾼 법안을 입법예고하자, 충분한 여론 수렴이나 홍보 절차 없이 사실상의 '준조세'를 지나치게 과다하게 인상한 게 아니냐는 불만이 쏟아지고 있다.
이 달 8일 정부는 이같은 내용을 골자로 하는 '항공권연대질병퇴치기금법안'을 입법예고했다. 기금 명칭 역시 '국제빈곤퇴치기여금'에서 ‘항공권연대질병퇴치기여금’으로 변경해 지카 바이러스, 메르스, 에볼라 등 국제 전염병 예방에 쓰기로 했다. 정부 계획대로 올해 말까지 입법 작업이 완료되면 내년 초 시행될 것으로 보인다. 정부 예산외로 운영되던 기존 기여금을 정식 기금으로 국가재정에 편입하는 한편, '빈곤퇴치' 명목이었던 용도도 개도국에 대한 국제 감염병 예방 지원으로 초점을 옮긴 것.
국제빈곤퇴치기여금은 전 세계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2001년 유엔 정상 회의에서 세계가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실천목표로 ‘새천년개발목표’가 채택된 이래, 2006년 7월 프랑스는 국제선 항공권에 소액의 기여금을 부과하는 ‘항공권연대기여금’ 제도를 처음 도입하여 시행했다.
우리나라도 2007년 9월 17일 ‘한국국제협력단법 시행령’을 공포했고, 항공권연대기여금이 국제빈곤퇴치기여금이라는 국내 명칭으로 도입되었다. 상기 법률에 의거, 우리나라에서 출발하는 내/외국인 국제선 탑승객을 대상으로 탑승권에 1,000원씩 기여금을 일괄 부과해 왔으며, 이 기여금은 국제보건기구, UN기구, NGO와 함께 HIV/AIDS, 말라리아, 결핵 퇴치 등 아프리카의 빈곤과 질병 퇴치를 위해 사용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를 비롯해 브라질, 칠레 등 약 20여개 국가에서 이 제도를 도입하거나 도입을 검토 중이다.
이 기금은 2007년 도입 당시 5년간 한시 징수로 규정됐다가 이후 한 차례 운영 기간이 연장돼 내년 9월 시한 종료를 앞두고 있다. 정부가 새로 입법예고한 법안은 기존 한시조항을 폐지하고 별도 법률을 제정해 기금의 영구적 징수 근거를 만들기 위한 것이다.
문제는 이처럼 한시적 징수를 준조세 형태의 영구 징수로 바꾸면서도 충분한 여론 수렴 절차나 대국민 홍보가 부족했다는 대목. 정부는 입법예고한 것 만으로 여론 수렴을 다한 것으로 뒷짐을 지고 있어서 이같은 준조세가 부과되는 줄도 모르는 국민이 적지 않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또 좌석 구분 없이 기존 1,000원씩 부과되던 이 기금이 앞으로는 좌석 등급에 따라 최고 1만 원까지 차등 부과되는 것으로 변경됨으로써 퍼스트클래스나 비즈니스석을 이용할 경우 현행보다 최고 10배나 더 납부하는 등 인상폭이 지나치게 크지 않느냐는 불만도 제기되고 있다. 게다가 막대한 돈을 거둬들이면서도 이 기금의 향후 쓰임새 등을 포함한 인상 이유를 제대로 알려주지 않고 있는 것도 문제란 지적도 나오고 있다.
올여름 태국으로 여행을 다녀온 대학생 이지연(23, 서울시 중구) 씨는 “국제빈곤퇴치기여금에 대해 처음 알았다. 좋은 취지인 건 알겠지만, 항공권을 예매할 때도 그에 대한 설명이 전혀 보지 못했다. 이에 대한 홍보가 필요할 것 같다”고 말했다. 주부 김경란(45, 부산시 해운대구) 씨 역시 “해외여행을 수차례 가봤지만, 이에 대해 몰랐다”며 “출국객들에게 출국납부금을 걷고 있지만 실제 출국객들에게 돌아가는 혜택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해외여행객에게 '출국납부금,' '공항이용료' 등 다양한 명목의 부과금을 징수하고 있는 마당에 ‘항공권연대질병퇴치기여금’이란 이름으로 새로운 기금을 징수하는 것 역시 해외출국자를 봉으로 보는 발상이 아니냐는 불만도 나오고 있다.
출국납부금은 관광진흥개발기금법에 의거한 관광진흥개발기금으로, 관광사업의 효율적 발전 및 관광외화수입 증대사업에 필요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출국 시 징수하는 공과금이다. 금액은 1인당 1만 원이다. 경향신문의 2016년 8월 29일 자 기사에 따르면, 문화체육관광부는 인천공항에서만 2004년부터 12년간 총 1조 6,698억 원을 걷는 등 김해공항, 제주공항 등에서 출국납부금으로 매년 2,000여억 원을 걷고 있다. 이 돈 가운데 공항 이용객을 위해 쓰이는 것은 올해 인천공항 자동출입국심사대 구축사업에 고작 0.25%인 5억 3,000만 원만 집행하기로 한 것이 전부. 거의 대부분 공항 이용객과 상관 없는 정부의 관광진흥 사업에 쓰였는데도 구체적인 사용 내역조차 공개되지 않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여권 발급 시 여권 발급 수수료 이외에 ‘국제교류기여금’이 청구되는데, 이 역시 준조세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같은 준조세 성격의 각종 부과금 내역이 항공권 등에 기재되지도 않아 대부분의 국민들은 자신들이 이같은 돈을 납부하는지조차 모르는 상태.
이런 마당에 '항공권연대질병퇴치기금'까지 영구적으로 징수하는 것은 해외여행객에게 지나친 부담을 지우는 것이란 반발도 나온다. 십수 년 전에는 해외여행을 일종의 특혜로 보고 각종 부과금을 징수해온 것이 국민 정서에 부합하는 측면이 있었지만, 한 해 출국자가 2,000만 명(지난해 해외출국자 수 1,931만여 명)에 가까운 지금에까지 해외여행객에게 정부의 각종 재정 소요를 덤터기 씌우는 것이 과연 적절한가 하는 논란이 따르는 것.
담당 직원에게 물어 국제교류기금의 존재를 알게 된 대학생 윤남호(23, 울산시 남구)는 “예전이라면 상대적으로 형편이 좋은 해외여행자들이 일종의 기부금을 낸다고 생각했겠지만, 해외여행자 수가 2,000만 명에 육박하는 지금은 취지에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에 외교부 관계자는 “국제교류기금과 국제빈곤퇴치기여금은 법적 근거도 있고, 국제 교류를 위해 지속적으로 지속될 것”이라며, “공익사업을 하는 만큼 국민 여러분들이 협조해 주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문화체육관광부 관계자도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출국납부금은 국내 관광 인프라 개발 등 관광활성화를 위해 사용하고 있으며, 인천공항에서도 출국객들에게 여행정보를 안내하는 등 간접적으로 서비스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