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흘 간 열리는 부산국제영화제의 진짜 주인공은 관객들이다. 관객들이 있음으로서 영화제는 비로소 생기를 띤다. 해운대는 갖가지 이유로 영화제를 찾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그 중엔 ‘내 배우’를 보기 위해 영화제를 찾는 진짜 마니아들도 적지 않다. 이 중에서 이병헌과 박소담의 '열혈 팬'을 자처하는 관객 두 사람의 하루를 동행 취재했다.
서울의 대학생 김유정(22, 서울시 양천구) 씨는 주말을 맞아 부산으로 내려왔다. 곧 시험기간이 닥쳐오지만 김 씨가 무리해서 부산을 찾은 건 그가 사랑하는 배우 이병헌을 보기 위해서다. 김 씨는 “금요일 3시에 오빠의 오픈토크가 있어서 마음이 급했어요”라고 말했다. 왜 마음이 급한 걸까. 배우를 보기 위해 줄을 서는 사람들 때문이다. 적어도 대여섯 시간은 일찍 가서 줄을 서야 좋은 자리에서 배우를 볼 수 있다는 것.
결국 그는 목요일인 6일 저녁 학교 수업이 끝난 후 김포 공항으로 향했다. '내 배우'를 만나기 위해서라면 비행기 값이 아깝지 않다는 김 씨. 하교 후 부리나케 공항으로 달려갔다. 비행기를 기다리며 설렘에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비행기 출발이 1시간이나 지연됐다. 우여곡절 끝에 부산에 도착한 김 씨는 곧바로 숙소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줄을 서야 했기 때문이다.
7일 금요일 아침 일찍 일어난 김 씨는 예전부터 친하게 지내던 이병헌 팬들과 만나 해운대 영화의전당으로 갔다. 도착한 시간은 겨우 오전 10시. 행사가 열리려면 5시간이나 남았지만 두레라움 광장에는 먼저온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래도 앞쪽에 자리를 잡은 김 씨 일행은 그제서야 밥을 챙긴다. 자리를 비울 수 없어 근처 카페에서 샌드위치를 사와 간단하게 식사를 했다. “이 정도는 당연한거죠.” 부산에 왔으면 국밥이든 밀면이든 부산 음식을 먹고 싶을 법도 한데 열정이 대단하다.
<춘몽>, <커피메이트>, <두 남자> 야외 무대인사가 진행됐다. 김 씨는 “한예리, 박소담 같은 요즘 뜨는 배우들을 실제로 보니까 TV에서보다 더 예뻤어요”라며 좋아했다. 열심히 박수 치고 사진을 찍으며 신나는 시간을 보내는데 오후 3시가 됐다. 드디어 두레라움 광장에 이병헌이 등장했다. 그를 기다리던 500명의 영화팬들은 환호했다. 한시간 남짓한 행사 동안 이병헌을 보는 그들의 눈은 어느 때보다 반짝거렸다. 영화 <내부자들>, <밀정>에 관한 출연 소감 등의 질문이 이어졌다. 누군가가 "아들이 크면 어느 영화를 같이 보고 싶냐"는 질문을 던졌다. 이병헌은 "<악마를 보았다>를 함께 보겠다"고 농담했지만 반응이 좀 썰렁했다. 김 씨는 “오빠 조크가 원래 대중들한테 잘 안 먹혀요”라고 씁쓸해했다.
이병헌의 출연 행사가 끝났을 땐 4시. 김 씨와 일행들은 이병헌의 동선을 따라 바로 ‘부일영화상’ 행사장을 찾아갔다. 벡스코 오디토리움에서 진행된 제25회 부일영화상에서 이병헌은 <내부자들>의 안상구 역으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김 씨는 마치 자신이 상을 받은 것처럼 기뻐하며 “오빠!”를 외쳤다. 이들은 수상 순간순간을 캠코더와 카메라로 담으며 이병헌의 부산 발자취를 기록했다.
시상식 행사가 끝나자 이들은 그제야 한숨 돌리는 모습. 오전 10시부터 저녁 10시까지 12시간 가까이 배우를 보기 위해 보낸 시간이었다. 이제 일정이 끝났으니 부산의 밤을 즐길 수 있겠다고 말을 건네니, “이제 또 해운대 포차에 가서 내 배우를 찾아봐야죠”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부산에 왔는데 부산은 없고 배우만 있다. 새벽이 되도록 그들은 포차와 술집을 돌아다녔지만 더는 이병헌을 만날 수 없었다. 김 씨는 “김의성 씨만 잠깐 봤어요”라며 아쉬워했다.
먼발치에서라도 배우를 만나는 것이 즐거움이라는 이들. 몸은 고되지만 배우에게서 에너지를 받아 간다고 했다. 중간고사가 걱정이지만, 그래도 기말고사에서 만회할 기회가 있으니 다행이란다. 김 씨는 “다음에는 갈등 없고 보이콧도 없는 영화제에 오고 싶네요”라며 토요일 오전, 과제를 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가 하면 박소담을 쫒아다니는 '광팬'도 있다. “박소담! 예쁘다!” 8일 CGV 센텀시티 영화관. ‘대세배우 박소담’이란 문구가 적힌 손수 만든 플래카드를 들고 소리치는 한 관객. 올해 배우 박소담을 보기 위해 전국 곳곳을 찾아다녔다는 이진기(27, 울산시 남구) 씨다. 이 씨는 “백화점 행사도 찾아 가고 해서 벌써 다섯 번은 봤어요”라며 싱글벙글 웃었다.
회사원인 이 씨는 7일 오후 반차를 쓰고 부산으로 내려왔다. 부일영화상을 보기 위해서다. “부일영화상은 표를 구해서 보러 왔어요. 영화제 개막식도 보려고 했는데 예매에 실패했어요”라고 아쉬워했다. 이 씨는 7일 부일영화상, 8일 <검은 사제들> 야외 무대인사, 영화관 GV(guest visit)까지 쉼 없이 이어지는 행사를 따라다니며 배우를 응원했다.
"한 번 봤으면 됐지 왜 박소담을 계속 따라다니냐"는 질문에 그는 “가는 곳마다 새로운 인터뷰를 들을 수 있고, 의상도 다 새로 갈아입고 나와요”라며 “소담 씨를 찍기 위해 카메라도 새로로 샀어요”라고 자랑했다. 이 씨는 “하루 종일 기다려서 10분, 15분 봐도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아요. 좋아하는 배우를 보면 정말 엄청난 힘이 솟아나는 게 저도 신기한 걸요”고 말했다.
하루 남짓한 짧은 일정을 마치고 이 씨는 일상으로 돌아갔다. “좋아하는 배우를 만나는 게 내 삶의 이유라고까지야 할 수는 없지만 정말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요”라며 “다른 사람들이 취미활동에 돈과 시간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죠. 배우를 보면 즐거우니까. 일할 의지도 생기고요. 열심히 돈 벌어서 카메라도 더 좋은 걸로 바꾸고 싶고 행사도 더 많이 다니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이 씨의 얼굴은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