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수인번호 ‘503’을 달고 감옥에 갇혀 있는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탄과 비난의 대상으로 전락했다가 대통령 선거가 본격화되자 어느듯 ‘잊혀진 인물’이 돼버렸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가 대한민국에 남긴 업적(?)도 상당하다. 물론 그 업적에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나큰 정치·사회적 비용이 뒤따랐지만.
박근혜의 업적 가운데 가장 으뜸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등의 헌법 조항을 국민 개개인이 자신의 실존적 결단을 통해 온몸으로 이해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박근혜의 헌정파괴 행위에 분노한 수백만 촛불 대오의 위엄에 청와대, 국회, 헌법재판소 등 모든 관련 국가기관들은 차례로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 공직자에게는 반드시 혹독한 사전 검증을 실시해야 한다는 사실을 거듭 일깨워준 것도 박근혜의 공로라고 할 만한다. 따지고 보면 박근혜와 최태민·최순실 일가의 기괴한 관계는 오래전부터 수면 위로 어느 정도 드러나 있었는데도 언론이나 정치권은 이를 제대로 파헤치지 않았고, 그러한 직무유기의 재앙적 결과를 지금 이 순간 우리는 똑똑이 목도하고 있다.
집권세력의 마음에 들지 않는 문화예술인들을 차별하고 범죄시하는 블랙리스트 작성이 얼마나 무서운 범죄인지, 정치권력과 기업이 검은 돈을 매개로 야합하는 정경유착이 얼마나 국가에 해악이 되는 것인지를 알려준 것도 박근혜 게이트의 교훈일 것이다. 박근혜의 업적과 공로는 이 밖에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겠지만 또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5월 9일 실시되는 대통령 선거에 ‘장미’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선사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박근혜나 그의 추종세력이 ‘장미 대선’이라는 이름을 지은 것은 아니다. 헌법재판소의 탄핵인용 결정에 따라 투표일이 4월이면 ‘벚꽃 대선’, 5월이면 ‘장미 대선’이라고 언론이 명명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이른바 1987년 체제 수립 이후 역대 대선은 12월 중순에 치러졌고, 이러한 한겨울 대선이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로 바뀐 것도 탄핵 때문이었으니, 이를 박근혜의 공로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터이다.
‘장미 대선’의 명명자들이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장미는 진보 또는 진보정당의 상징이기도 하다. 정당 정치의 역사가 오랜 서유럽의 진보 정당들은 붉은 장미를 당의 상징으로 삼고 있고, 총선 등에서 당선자에게 장미꽃을 선사하곤 한다.
장미가 진보의 상징이 된 것은 19세기 서유럽 노동자들의 시위에서 유래한다. 당시 노동자들은 정부와 자본의 횡포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일 때면 가슴에 붉은 장미꽃을 달았다. 그들은 촘촘히 붙어있는 장미 꽃잎에서 단결을, 날카로운 가시에서 투쟁을, 붉은 빛깔에서는 노동자의 피라는 비유를 읽어냈다. 시간이 흐르면서 붉은 장미는 폭압적 정치권력과 거대자본에 맞서 싸우는 노동자들의 꽃으로 자리잡았다.
1886년 5월 미국 시카고에서는 하루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시위가 연일 벌어지고 있었다. 평화로웠던 집회는 5월 4일 폭력사태로 비화됐다. 해산을 명령한 경찰에게 누군가 폭탄을 던졌고, 이 사건으로 기소된 노동운동 지도자 8명 중 5명이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에 노동자들은 8명에 대한 연대의식을 표시하기 위해 옷깃에 붉은 장미를 달았고, 이것은 세계 근대사에서 장미가 진보를 상징하는 기점이 됐다.
장미꽃의 정치적 지위가 공식화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유럽 각국의 사회주의·사민주의 정당들이 당의 엠블럼으로 붉은 장미를 채택하면서부터였다. 선발 주자는 ‘인터내셔널(국제노동자협회) 프랑스 지회(SFIO)’의 후신으로서 1969년 출범한 프랑스 사회당이었다.
한국에서는 민주노동당의 전신인 국민승리 21이 이러한 장미 컨셉을 처음으로 대중들에게 선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7년 대선을 앞둔 어느날 권영길 당시 국민승리 21 대선후보는 부천역 앞에서 유세를 마친 뒤 청중들에게 장미꽃 100송이를 나눠주며 지지를 호소했다. 매일 아침 보도자료와 장미 한 송이를 들고 언론사를 방문하는 ‘아침 장미팀’이 당내에 꾸려지기도 했다.
제도권 정치에서 장미꽃이, 그것도 열 송이가 한꺼번에 피어난 것은 2004년 4월 실시된 제17대 총선에서였다. 당시 민주노동당은 지역구와 비례대표를 합쳐 무려 10석을 획득했다. 선거 상황판의 당선자 얼굴 밑에 장미가 아름답게 피어있던 광경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진보정당이 최초로 원내에 진입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당시 민주노동당은 13%를 득표했는데 이를 독일식 정당명부제로 환산하면 39석에 해당하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번 장미 대선의 승자는 과연 누가 될까.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시점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와 국민의 당 안철수 후보가 지지율 1, 2위를 달리고 있으니 누가 당선되건 정권교체는 되는 셈이다. 유럽식 기준으로 보면 민주당이나 국민의 당을 결코 진보정당이라고 부를 수는 없겠지만 한국의 정치지형이 워낙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보니 그래도 상대적으로 진보색채를 띤 집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두 정당 가운데 누가 집권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장미꽃의 의미에 부합한다고 하겠다. ‘진보 장미꽃’의 진정한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정의당의 심상정 후보는 비록 집권 가능성은 낮지만 선거운동 기간 내내 진보의 가치와 지향을 한국사회에 널리 전파하고 일깨워주기를 기대한다.
그런데 나는 이번 대선이 진보나 보수를 떠나 궁극적으로는 원칙과 상식의 가치가 한국사회 곳곳에 널리 전파되고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계기가 되기를 원한다. 따지고 보면 박근혜가 파멸한 것은 지나치게 보수적이라거나 진보적이 아니어서가 아니다.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하고, 주권자인 국민이 자신에게 부여한 권력을 송두리째 사유화했으며, 헌법에서 규정한 대통령의 의무를 철저히 저버린 박근혜의 행위는 진보 보수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다. 그야말로 원칙과 상식을 저버리고 국민의 신임을 배신한 행위였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5월 9일 피어날 장미가 진보의 꽃이나 보수의 꽃이기보다는 원칙과 상식의 꽃, 인권과 민주주의 꽃, 공정함과 정의로움의 꽃, 평화와 화해의 꽃이 되었으면 좋겠다. 5월 9일, 장미 피어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