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뉴스에는 젊은이들의 자살 사건이 보도되고 있다. 누구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라고 했지만, 일부 젊은이들은 죽음을 선택했다. 이제 인생의 반도 시작해보지 않았으면서 그들은 너무나도 쉽게 끝을 맺고 말았다.
그래서 내 눈에 이 책이 눈에 확 띈 걸 수도 있다. <스물아홉 생일, 1년 후 죽기로 결심했다>란 책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처음 제목을 보는 순간부터,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이 책의 저자 역시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죽음을 택하려는 청춘인 걸까? 그런데 왜 스물아홉 생일의 1년 후에 죽으려는 것일까? 서른 살이라는 나이가 싫어서 죽으려는 걸까? 30대는 그만큼 암울한 나이인 걸까? 이 책의 스물아홉 생일과 죽음은 연관성이 없어 보이면서도 무언가가 있을 것만 같은 묘한 느낌을 주었다. 그와 동시에 좌절하고 있는 청춘들에게 무언가의 메시지를 줄 것만 같았다.
하야마 아마리는 자신의 스물아홉 살 생일에 자살을 시도한다. 좁고 더운 방, 쓸쓸하게 꽂힌 초가 위태로워 보이는 조각 케이크, 생일 축하 노래 대신 방 안을 울리는 TV 소리, 그리고 이 모든 것에 익숙한 그녀.
아마리의 삶이 비참한 건 그 때문만이 아니었다. 보통 스물아홉은 안정된 직장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을 꿈꾸거나 혹은 이루는 나이지만, 그녀는 달랐다. 파견 사원으로 3개월마다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겨우겨우 입에 풀칠할 수 있을 정도로 돈을 벌었다. 당연히 남자 친구는 없었다. 날이 갈수록 살은 더 쪄갔고, 외모 또한 형편 없어졌다. 그녀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이 되었다.
아마리는 순간적인 충동으로 자살을 다짐한다. 평소엔 아무 생각 없이 들던 식칼을 그 순간엔 자신을 죽이는 무기로 택한다. 하지만 죽음이라는 것이 쉽게 선택한다 해서 되는 일은 아니지 않은가. 아마리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결국 자살을 포기한다. 그녀는 살아갈 용기도, 죽을 용기도 없었다. 그녀는 그 어떤 것에 대한 용기도 없는 자신을 원망하는 일 말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 때 TV에서 화려한 라스베이거스가 나오기 시작한다. 아마리는 TV 속 라스베이거스를 보며 이상하리만치 전율을 느낀다. 죽으려 다짐하던 그 순간, 그녀는 처음으로 하고 싶은 일을 찾은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을 위해 마지막으로 스스로에게 1년이란 시간을 준다.
그 이후, 책에서 나타나는 아마리의 변화는 실로 놀랍다. 파견직 사원으로 그저 주어진 일만큼 해내고 살던 때와는 달리 정확한 목표를 가지고 최선을 다해 살다 보니, 외모도, 성격도, 태도도 모두 다른 사람으로 보일 만큼 달라진다. 아마리는 더 이상 외톨이도 아니었고, 불행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 기적은 다름 아닌 그녀 스스로가 만들어낸 그녀의 ‘생일 선물’이기에 더욱 놀라운 것이다.
비록 그녀가 선택한 일이 남들은 손가락질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무엇이 문제겠는가. 그녀는 스스로 변화를 택했다. 남들은 좌절하고 충분히 포기할 수 있는 인생에서 그녀는 스스로를 구제했다. 그 무엇보다 도전과 모험이 필요한 청춘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그녀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삶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라는 말이 있다. 이 책을 덮기 전 나에게 마지막으로 전율을 준 문구다. 그렇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희망이라는 말을 잊어버리고 사는 듯하다. 스물아홉 생일의 아마리처럼, 우리는 하고 싶은 일도 없이 무력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희망을 내 등 뒤에 숨긴 채, 우리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나에게 주어진 상황만을 보며 한숨 쉬는 것은 아닌가.
희망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등 뒤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그 어떤 보험보다 든든하지 않은가. 그러니 잠시만이라도 뒤를 돌아보는 여유를 갖도록 하자.
희망을 품고서 사람들이 만든 잣대에 휘둘리기보다는 나 자신만의 목표를 향해 질주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가치 있는 결단력임을 생각하자. 이 결단력은 남들과 똑같은 목표에 매진하는 무력한 청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