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를 ‘무한경쟁의 시대’라고들 한다. 글자 그대로 끝없이 한없이 경쟁해야하는 시대라는 것이고 잘못하면 무한히 낙오하며 무한히 낭패를 볼 시대라는 것인데, 별 경쟁력 없는 보통사람들에게는 참으로 무서운 협박이 아닐 수 없다. 특히 패자를 위한 사회적 안전망이 부재하거나 미흡한 우리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과연 무한경쟁의 시대인가?
생존경쟁, 먹이경쟁, 짝짓기경쟁. 순위경쟁, 성적경쟁, 입시경쟁, 스펙경쟁, 입사경쟁, 실적경쟁, 연봉경쟁, 매출경쟁, 군비경쟁, 정쟁(政爭), 시청률경쟁, 지하철자리경쟁. 선뜻 머리에 떠오른 경쟁들을 나열해 보았다. 이런 식의 나열이 경쟁이 무한하다는 걸 증명해줄 순 없지만, 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사는 동안 피해갈 수 없이 무시로 만나게 되는 온갖 경쟁이 다 있는 걸로 봐서, 일단 무한경쟁의 시대라고 인정하기로 하자.
경쟁은 필연적인가?
생명이 있는 곳에 경쟁은 늘 존재해왔다.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1859)을 통해 주어진 환경에 적절히 적응한 종만이 살아남고 나머지는 사라진다는 ‘적자생존’과 ‘자연도태’의 법칙을 설파한 이래, 과학은 동식물은 물론이고 단세포 생물 조차도 경쟁을 통해 생존하고 진화해왔다고 말한다. 심지어 분자수준에서 조차도 상호경쟁이 존재하며 이런 경쟁을 통한 선택이 없어진다면 생명활동이 정지되고 만다는 글도 읽은 적이 있다. 이쯤 되면 경쟁이 필연적이고 생명에 필수적이라는 것도 인정해야겠다.
경쟁은 효율적인가?
경쟁을 옹호하는 가장 주요한 논거 중 하나가 경쟁이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활어를 원거리 수송할 때 천적을 함께 넣어 수송하면 고기들이 천적에게 먹히지 않으려고 도망 다니느라 목적지까지 팔팔하게 살아서 도착하게 된다는 얘기나, 미꾸라지를 양식할 때 메기를 함께 넣으면 성장도 번식도 잘한다는 따위의 얘기들을 한 번쯤은 들어 보았을 것이다. 이런 얘기가 아니라도 경쟁의 효율성은 도처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특히 스포츠 분야나 기업 분야에서 경쟁이 어떤 성과를 내는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살아오면 경쟁심으로 인해 스스로 분발해보았던 경험 또한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것도 인정할 밖에.
경쟁으로 충분한가?
경쟁이 생존의 필요조건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생명체는 경쟁만으로는 생존도 진화도 할 수 없는 존재다. 곤충에서부터 인간에 이르는 다양한 생명체의 진화를 추적했던 크로포트킨은 13년에 걸쳐진 그의 연구를 집대성한 상호부조론(1902)에서, 협력과 상호부조 없이는 생명의 진화도 없다고 주장하면서 다양한 생물들이 보여주는 협동과 상호부조의 사례를 넘치도록 제시한 바 있다. 또한 미생물학자 마굴리스에 따르면, 세포 내의 에너지 발전소라 불리는 미토콘드리아는 잡아먹힌 박테리아가 잡아먹었던 박테리아의 체내에서 그대로 살아남아 두 개체가 서로 공생하게 되면서 생겨난 것이라 한다. 즉 생명체를 구성하는 핵심인 세포가 공생과 협력 위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굳이 생물학을 들먹이지 않더라고 경쟁의 사례만큼이나 많은 협력의 사례를 우리는 주위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생명체는 경쟁이 없이 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협력과 상호부조 없이도 살 수 없다. 내 몸 내부의 장기나 세포들이 서로 협력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지 한 번 상상해보면, 또는 당장에 모든 인간이 협력을 중단한다면 내일 내가 휴지 한 장이라도 얻을 수 있지 상상해보면 이는 자명해진다. 경쟁과 협력은 생존과 진화의 쌍두마차이고 양 날개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왜 무한경쟁이 난무하나?
경쟁은 누구에게나 스트레스다. 무한경쟁 상황이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삶은 그야말로 스트레스의 연속일 수밖에 없고 설사 현재 경쟁력을 갖고 있는 자들조차도 언제 도태될지 모를 불안과 긴장 속에서 살아야 한다. 무한경쟁은 지속가능한 경쟁도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신체와 정신은 지속적인 스트레스를 정상적으로 견뎌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약육강식이 지속되어 약자가 모두 사라진다면 강자 또한 사라져서 인간 공동체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한경쟁은 현재 경쟁력을 갖춘 집단을 잠시 행복하게 할지는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거의 모두를 불행하게 하는 무모한 경쟁일 수밖에 없다.
사실 우리는 무한경쟁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지속가능한 생존을 위해 경쟁 쪽으로 심하게 치우친 무게의 추를 협력과 상호부조 쪽으로 시급히 옮겨서 경쟁의 긴장도를 낮출 필요가 있음을 대다수가 느끼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일을 실행에 옮기기는 대단히 어렵다. 그것은 핵보유국 간의 핵무기 감축이 어려운 이유랑 비슷하다. 상대가 우세한 무력을 갖춘다면 내가 결국 공격당하고 말리라는 ‘불안’과 나 먼저 살고 보자는 ‘이기심’ 때문에 핵무기 감축이 어려운 것과 유사한 구조인 것이다. 결국 상대방에 대한 불신과 자기중심주의로 인해 우리는 모두 경쟁의 무한궤도에 붙잡혀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선택은?
상호불신을 상호신뢰로 바꾸기는 어렵다. 자신의 이기심을 버리는 일은 더 어렵다. 결국 단기간에 현재의 무한경쟁 상황이 변화되거나 완화될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불행하지만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다. 되도록 경쟁을 회피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되겠지만 그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이보다는 생존에 필요한 개인적인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고 준비하는 것이 보다 현명한 선택일 것이다.
하지만 좀 더 현명한 자라면 한편으로는 자신의 경쟁력을 높이면서 동시에 협력과 상호부조를 위한 열린 자세를 유지할 것이다. 왜냐하면 개인 경쟁력의 강화만으로는 무한경쟁의 긴장 상태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고, 협력과 연대와 상호부조만이 칠팔십년 이상 지속될 자신의 삶을 좀 덜 긴장되고 불안한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군가 경쟁을 일방적으로 옹호하거나 강요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그것에 저항하고 대항할 필요가 있다. 그가 기업주이거나 직상 상사거나 어르신이거나 선배라서 감히 뭐라 할 수 없다면, 하다못해 ‘좀 불쌍하다’거나 혹은 ‘참 안됐다’는 시선이라도 그들에게 던져주어야 한다. 경쟁주의자들에게 그런 시선을 던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들의 목소리는 점점 잦아들 것이고, 그런 시선이 압도적 다수가 될 때에는 그들도 더 이상 지금처럼 드러내놓고 경쟁을 부추기지는 못할 것이다. 물론 긴 시간이 걸리겠지만 물방울이 바위를 뚫듯이 더 많은 사람들이 이 대열에 동참하여 서로간의 신뢰를 쌓으면서 경쟁주의자들을 수적으로 제압하는 방법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을 것 같다.
경쟁주의자들은 경쟁이 제거됨으로써 정체되고 도태된 끔찍한 미래 사회를 상상할지도 모르지만, 경쟁은 생명체가 존재하는 한 결코 사라지지지 않을 것이므로 그것은 한갓 기우에 불과할 것이다. 다만 경쟁이 지금처럼 우리의 삶을 가혹하게 옥죄지는 않는 그런 방식으로 우리와 함께 하리라 생각한다.
개인의 경쟁력과 팀워크가 잘 조화된 훌륭한 팀들의 축구나 야구경기처럼 우리들의 삶이 그렇게 조화롭고 아름다울 미래를 꿈꿔본다. 우리가 경쟁 이데올로기를 던져버릴 수 있다면 비록 시간은 좀 걸릴지라도 반드시 그런 날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앞으로 경쟁주의자들, 특히 경쟁을 무슨 금과옥조인 냥 혹은 자연의 유일무이한 법칙인 냥 떠벌리는 자들에게 측은한 시선을 지속적으로 던져주실 것을 다시 한 번 당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