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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우연히 땅바닥에 등을 대고 밤하늘을 바라봤다. 마지막으로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본 때가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구름 사이로 반짝이는 물체가 보였는데, 그것이 별인지 인공위성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별이라면 그것이 도대체 몇 광년이나 멀리 떨어져있는지 나는 알지 못했고, 어쩌면 그 별에 얽혀있을지도 모를 신화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었다. 그저 도시의 불빛 속에서 올려다 본 희미한 별 빛이 왠지 쓸쓸해 보였을 뿐이다.
수백만 년 전 최초의 인간이 올려다 본 밤하늘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내 부족한 상상력으로는 그것이 어떤 모습이었을지 도무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올려다 본 밤하늘이 불과 수백 년 전까지 나의 조상이 바라보았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만은 분명해 보였다. 수백만 년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을 지구에서 살았던 모든 인간들은 네온사인이나 비행기나 인공위성 같은 문명의 불빛에 방해받지 않은 태고의 밤하늘을 공유했을 것이다. 까마득한 과거로부터 불과 수백 년 전까지 이 땅에 살았었던 전 인류가 공유했을 밤하늘을 그날 나는 공유할 수 없다고 느꼈고, 그 사실이 왠지 나를 슬프게 했다.
기술 문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지 불과 수백 년 만에 우리는 우리의 모든 조상들이 공유했던 밤하늘을 잃었다. 그것은 기계가 대규모로 우리의 신체 기관과 노동을 대신하면서 생겨난 수많은 변화들 중에 아주 사소하고 별 것 아닌 변화일지 모른다. 전화, 세탁기, 냉장고, 자동차, 텔레비전, 컴퓨터, 산업용 로봇, 인터넷, 스마트폰 등 이루 셀 수없이 많은 기계 장비와 그 운영 시스템이 우리의 삶을 조상들의 그것과 뚜렷하게 구분 짓고 있다.
우리가 누리는 일상생활의 소소한 편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로 대변되는 물질적 풍요, 지구의 시공간을 축소시켜버린 교통과 통신의 발달, 그로 인한 (물질적, 정신적, 문화적) 교류와 소통의 전 지구적 확대 등은 물론이고, 인권의 신장이나, 종교의 자유나, 정치적 민주화까지도 사실상 기술 문명의 발달에 힘입은 바 크다. 나이 지긋한 세대들이 툭하면 내뱉는 ‘세상 참 좋아졌다!’는 말은 그들의 경험 밑바닥에서 우러나온 내면의 진심일 것임에 틀림없고, 실재로도 세상 참 많이 좋아졌다.
이메일에 첨부하는 것만으로도 필요한 돈을 송금하거나(구글지갑), 안경을 통해 바라본 대상의 관련 정보를 안경 속 스크린 위에 실시간으로 제공받기도 하고(구글글래스), 실험 단계이긴 하지만 드론(군사적 목적으로 개발된 소형 무인 비행체)을 이용해서 피자를 배달하는(도미노 피자) 등의 새로운 기술과 서비스가 자고나면 생겨나 있는 게 오늘이다. 상황이 이러니, SF소설(영화)에서나 보았던, 우리랑 비슷하게 생긴 로봇(그것이 가사 도우미일 수도 있고, 개인 비서일 수도 있고, 어쩌면 친구나 애인일 수도 있겠다)들과 함께 살아가게 될 날도 머지않은 듯싶다. 몇 백 년이라는 시간은 인류의 전체 역사로 보면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불과한데, 그 짧은 시간에 기술 문명이 보여준 변화상은 특히 그 규모의 거대함과 속도의 아찔함에서 그저 경이로울 뿐이다.
기술 문명이 우리에게 선사한 이기와 편의들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고, 그것의 대부분은 이미 우리 존재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이제 그것들이 없는 세상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두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병만족’의 오지생존기를 TV로 지켜보는 것은 흥미롭지만 그 세상에 내가 맨몸으로 던져진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끔찍한 것이다. 그날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내가 느꼈던 쓸쓸함은 그것들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반쪽짜리 존재가 되어버린 듯한 나 자신에 대한 자괴감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거기에 더불어, 곳곳에 설치된 CCTV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고, 쇼핑은 물론 통신이나 진료 기록 등 내밀한 정보들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개인 활동들이 기록되고, 그렇게 기록된 데이터를 통합하고 가공 처리할 수 있는 빅데이터 처리 기술이 점점 발달하면서, 소설 '1984'를 통해 조지 오웰이 창조했던 허구적 존재 ‘빅브라더’가 점점 더 실재적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는 내 개인적 느낌 또한 한 몫을 했을 것이다.
미래에 대한 나의 디스토피아적 예측과 그로 인한 내 내면의 불안감과는 무관하게, 기술 문명은 그 자체의 동력으로 지구 문명이 끝나는 날까지 아마 계속해서 발달해 갈 것이다. 이런 도도한 기술 문명 발달의 흐름을 끊거나 거스를 힘이 내겐 없을뿐더러, 설사 내가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지금 당장 그렇게 하는 것이 반드시 바람직해 보이지도 않는다.
그날 밤 내가 할 수 있었던 거라고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면서 그저 우리 인류가 끝까지 기술을 적절히 통제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뿐이었다. 나는 기술 문명이 우리를 더 풍요롭고, 더 자유롭고, 더 건강하고, 더 행복하게 해줄 수 있기를 기원한다. 하지만 적어도 내 눈에는 기술 문명이 지금 그런 방향으로만 우리를 데려가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풍요가 빈곤을, 관계망이 고독을, 자유가 통제를 낳는 기술 문명의 역설을 나 혼자만 느끼고 있는 건 아닐 것이다.
어딘가에 또는 누군가에게 기원하는 것 말고, 기술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그것이 무엇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좁은 소견으로는, 이 물음에 우리가 어떤 합의된 답을 찾아내고 그것을 공동으로 실천할 수 없다면, 브레이크 없는 이 폭주 기관차는 우리를 싣고 제 스스로의 길을 끝까지 내달리게 될 것 같다. 우리의 바람이나 소망 따위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다.
조만간 어느 하늘 맑은 날을 만나거든, 오랜만에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이 물음에 대한 각자의 해답을 한번 찾아보시길 모두에게 권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