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가 힘들다. 요즘 들어 글을 쓴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새삼 많이 느낀다. 글을 쓰면 쓸수록 부끄럽기만 하고 자신감은 어느새 가을 하늘에 담배연기 날아가듯 사라진 다. 직업상 관련된 글(그것도 많지는 않지만) 말고는 고등학교 동기회 홈피에 올리는 수필성 잡문이 내가 쓰는 글의 전부일 것이다.
여름이면 진료(필자는 한국에서 손꼽히는 이비인후과 의사/ 편집자 주) 도중 책 읽을 시간이 비교적 많아 읽은 책을 정리할 겸 글을 자주 써서 홈피에 올린다. 나름대로 심혈을 기울여 글을 쓰고, 고치고 또 고친다. 글을 잘 쓰고 싶은 욕망은 내 책장에 꽃혀 있는 글쓰기에 관한 책들이 말해준다. 욕망이 클수록 결핍감도 함께 커져서 글쓰기에 관련된 책이 새로 나오면 참지 못하고 서점에 달려가 또 사가지고 온다. 그렇게 모은 책이 벌써 스무권이 넘는다. 세계적인 글쓰기 달인으로 불리는 윌리엄 진저의 ‘글쓰기 생각하기’ 등 웬만한 책은 다 사모았다. 물론 모두 정독하지는 못했지만 열심히 읽었다. 그리고 그 책에 나온 가르침대로 글쓰기 연습을 해왔고,지금도 하고 있다. 하지만 결과는 기대 이하다. 항상 글쓰기 실력이 제자리라는 느낌이다.
대개의 책들에 일반적으로 나오는 글쓰기 지침은 짧고 간단하게 쓰라는 것이다. 기자 출신으로 지방대학에서 신방과 교수를 하고 있는 한 친구는 이를 KISS & KILL로 표현했다. 007 스파이 영화 제목 같지만 그게 아니라 “Keep It Short, Simple”, “Keep It Large, Legible’의 두문자 모음이라 한다. “되도록이면 짧고 간단하게”라는 것이 글쓰기 달인들의 공통된 충고다. 그래야 읽는 사람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글은 읽는 사람을 위해서, 배려해서, 결국 읽는 사람으로부터 공감을 얻어 내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을 쓰기로 하면 글의 소재도, 글을 어떻게 풀어 나갈지도 깊이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요즘은 이 모든 것이 엉망이 된 느낌이다. 잘 써야겠다는 욕심만 앞설 뿐, 글의 소재도, 글의 흐름을 어떻게 이끌어 갈까도 전혀 감이 잡히질 않는다.
한국에서도 많은 독자를 갖고 있는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의 산문집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에서 에세이를 쓰는 어려움을 이렇게 이야기 한다. “소설가는 소설을 쓸 때 머릿속에 많은 서랍이 필요합니다. 자잘한 에피소드, 사소한 지식, 작은 기억, 개인적인 세계관(같은 것).... 소설을 쓸 때면 그런 소재가 여기저기서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그런 여러 가지를 에세이 같은 데서 쭉쭉 뽑아 써버리면 소설을 자유롭게 쓸 수 없게 되죠. 그래서 아껴서(랄까), 서랍에 꼭꼭 감춰두게 됩니다. 그러나 소설을 다 쓰고 보면, 결국은 쓰지 않은 서랍이 몇 개씩 나옵니다. 그리고 그 중 몇 개인가는 에세이 재료로 쓸 만하군, 싶은 것도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러면서도 '에세이 쓰기는 어렵다' 고 말한다. 소설을 쓰고, 번역도 하지만 에세이는 본업도 아니고 취미도 아니어서 누구를 향해, 무엇을 쓸까에 대해 방향을 잡지 못해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에세이를 쓸 때의 지침을 나름대로 두고 있다고 한다.
“그렇긴 하지만 내게도 에세이를 쓸 때의 원칙, 방침 같은 건 일단 있다. 첫째, 남의 악담을 구체적으로 쓰지 않기(귀찮은 일을 늘리고 싶지 않다). 둘째, 변명과 자랑을 되도록 쓰지 않기(뭐가 자랑에 해당하는지 정의를 내리기는 꽤 복잡하지만). 셋째, 시사적인 화제는 피하기(물론 내게도 개인적인 의견은 있지만, 그걸 쓰기 시작하면 얘기가 길어진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조건을 지키며 에세이를 연재하려고 하니 결과적으로 화제는 상당히 한정된다. 요컨대 '쓸데없는 이야기' 에 한없이 가까워지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쓸데없는 이야기' 를 비교적 좋아하니 그건 그것대로 상관 없지만, 때로 "당신 에세이에는 아무런 메시지도 없다. 흐물거리기나 하고 사상성도 없고 종이 낭비다"와 같은 비판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정말 그런가?' 싶어 반성하기도 한다. 소설에 관해서는 어떤 비판을 받아도 '흥, 알 게 뭐야' 하고 툭툭 털어내 버리는데 에세이의 경우만큼은 그렇게까지 뻔뻔스러워지지 못한다.”
그런데 무라카미는 스스로 '쓸데없는 이야기' 라고 하는 소재를 재미있게 쓴다. 읽다보면 미소가 머금어 지기도 하고 때로는 풋 하고 움음을 참지 못하기도 하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기도 한다. “글쓰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하고 생각하지만 도대체 무엇이 다른지 알 수가 없다. 글쓰는 스타일, 남을 배려하면서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기술, 은유와 비유를 적절하게 사용하는 묘사 등 흉내는 내보지만 도저히 따라할 수 없고 글의 맛을 살릴 수가 없다.
롤랑 바르트는 자신의 책 <밝은 방(La Chambre Claire)- 사진에 관한 노트> 에서 기호로서 사진을 읽을 때 중요한 요소인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 에 대하여 설명한다. 사진을 보고 가질 수 있는 느낌을 결정하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로 스투디움과 푼크툼을 이야기한다. 길들여지고 규격화된, 정보를 주는, 친숙하게 지각되는 느낌이 스투디움이라면, 이러한 요소를 깨트리고, 보는 사람의 마음을 화살처럼 관통하는 요소를 푼크툼이라 했다. 두 가지 요소를 구분함으로써 롤랑 바르트는 사진에 계속 관심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사진이 내 눈에는 생기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어떤 존재감을 보이는 것들에서조차, 그 대부분이 내 안에서 야기하는 것은 일반적이고, 말하자면 예의상의 관심뿐이다. 그것들에는 아무런 푼크툼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내 마음에 들거나 들지않지만 나를 찌르지 못한다. 그것들은 오직 스투디움만 부여된다. 스투디움은 나는 좋아한다/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정도의 나른한 욕망, 다양한 관심, 일관성 없는 취미의 매우 방대한 영역이다. 스투디움은 사랑하기가 아니라 좋아하기에 속한다. 그것은 반쯤의 욕망, 반쯤의 의지를 동원한다. 그것은 우리가 '좋다' 고 생각하는 사람들, 광경들, 옷들, 책들에 대해 느끼는 동일한 종류의 막연하고 잔잔하며 무책임한 관심이다.”
글도 사진과 마찬가지로 스투디움과 푼크툼의 두 가지 요소가 있다고 생각한다. 무라카미가 말하는 '쓸데없는 이야기' 를 독자들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쓸 수 있는 것은 그의 '쓸데없는 이야기' 가 그냥 일반적이고 예의상의 관심만을 불러 일으키는 글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쓸데없는 이야기' 는 '나는 좋아한다/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정도의 나른한 욕망이나 너무나 다양해서 집중력을 잃어버릴 정도의 산만한 관심이나 일관성을 놓쳐버린 방대한 취미가 아니고, 가슴을 흔들고, 찌르고, 관통하는 푼크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루하지 않고 재미를 느낄 수 있고 동감할 수 있다.
동기 홈피 등 외부에 글을 써 올리면 여러가지 평가가 뒤따른다. 대개는 주례사형의 칭찬과 격려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남이 애써 올린 글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웬만한 실력과 교양과 용기가 없이는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설령 용기를 가지고 진실된 비평을 한다 하더라도 신랄한 비평 후에는 마음씨 착한 우리 동기들 모두로부터 평생 외면당할 각오를 해야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진실된 비평은 어두움이 내린 시간에 흘린 맥주로 바닥이 축축해진 호프집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문학 비평가 김현 선생님도 신랄한 비평은 '반포치킨'에서 한다며 평론가에게 술집은 꼭 필요한 장소라고 말했다.
달리기를 지금까지 계속 해왔듯이 글쓰기도 멈추고 싶지 않다. 나는 빨리 달리지는 못하지만 '잘 달린다'고 자부한다. 아니 꾸준하게 성실하게 달린다. 글을 잘 쓸 자신은 없다. 하지만 꾸준하게 성실하게 '푼크툼' 이 있는 글을 쓰고 싶다. “능력도 안되는 사람이 달리기하느라 고생이 많수!” 아내가 빨리 달리지도 못하면서 열심히 달리는 나에게 늘상 하는 말이다. 그렇게 15년이 되어 달리기는 내 몸의 일부분이 되었다. 푼크툼을 좇아 글감을 고르고 글을 쓰다보면 마음을 움직이는, 마음을 관통하는 글이 나오지 않을까. 달리기를 해서 덤으로 건강을 얻듯이, 글을 쓰다보면 덤으로 사색의 깊이가 깊어질 것이다. 다시 말해서 관조하는 삶에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다.
평소 동기회 홈피를 통해 내 글에 항상 댓글을 달아 '주례사형' 칭찬이나 넉넉한 격려를 아끼지 않은 친구가 있다. 언론사에서 논설위원으로 다년간 일했다는 이 친구는 글쓰기에 관한 한 제나름의 일가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우리 동기들 모두 인정한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친구가 호프집에서 맥주를 한 잔 하면서 나에게 통렬한 충고를 했다.
“솔직히 말해 처음 자네 글을 보고 너무 현학적이라고 생각했다. 책에서 읽은 것을 제대로 소화시키지 않고 그대로 뱉어낸 듯한 느낌이었다. 심지어 남의 글을 이것저것 짜집기한 누더기 옷이 연상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자네 글은 읽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깊은 사색과 고뇌의 흔적이 엿보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최근들어 부쩍 글 흐름이 자연스러워지고 있다. 글을 기워낸 바늘 자국이 점점 엷어져 가고 있다. 천의무봉(天衣無縫)의 글을 쓰고 싶다고 했던가? 그래, 조금만 더 노력해보시게나. 머지않아 바늘자국 하나 없이 매끈한 천의무봉의 글을 뽑아 낼수 있을 것이야”
험담인듯 덕담인듯 헷갈렸지만, 내 뇌리를 때리는 강도는 엄청났다. 한 며칠 동안 그 울림으로 얼얼했다. 훗날 내가 정신줄을 놓는 날이 올 때까지 그 친구가 해준 '호프집 비평'은 잊을 수 없을 듯 싶다. 앞으로 내 글이 푼크툼을 가진 글로 나아간다면 그것은 그 친구 도움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남에 대한 악담을 쓰지 말고, 자신의 자랑이나 변명을 늘어 놓지 않고, 가급적 시사적인 내용을 피한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름 의미있게 쓸 수 있으면 좋겠다.
흔히들 현대를 신을 잃어버린 시대라고 한다. 신과 함께 의미도 잃어 버렸다. 그래서 시간은 지속되게 흐르지 못하고 원자처럼 쪼개지고 말았다. 시간이 잘게 쪼개져서 연결이 안되니 과거와 미래는 없어지고 단지 '지금 여기' 만이 존재한다. 허무와 냉소만이 판을 치는 이 시대에 의미를 찾아서, 잃어버린 파토스,'놀라움과 감사'에 충실한 삶을 산다면 어떨지?
*유영상 시빅뉴스 객원 칼럼니스트 / 서울 잠실소재 <유영상 이비인후과> 원장, 경남고 • 서울의대 졸업.
울산대 의대 서울 아산병원 이비인후과학 교수 역임. 달리기와 글쓰기에 매료되어 거의 매일 달리고, 글을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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