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영도대교가 47년 만에 하늘에 올려졌다.
일제 강점기 수탈의 아픔과 6.25전쟁의 애환, 실향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역사의 산물, 영도대교 개통식이 27일 오후 자갈치 매립지와 영도대교에서 열렸다.
개통식에는 7만여 명의 인파가 몰려, 1934년 11월 처음 영도다리가 개통됐을 때 부산 시민 6만여 명이 국내 유일의 도개교를 구경했던 진풍경이 79년 만에 재현됐다. 1000t 이상의 선박의 운항을 위해 내륙쪽 다리 31m30cm를 올릴 수 있도록 시공된 영도대교는 도개 시 영도-내륙간 교통정체의 큰 요인으로 지목돼 1966년 9월 도개가 중단된 후 4개 차로의 공용도로로만 이용되어 왔다. 하지만 부산의 기념물 제56호로 지정되며 옛 모습 그대로를 복원하기로 결정, 47년 만에 다시 하늘로 들렸다.
거센 바람과 중간중간 내린 소나기에도 행사 오전부터 많은 시민들이 영도대교를 찾았다. 역사적인 순간을 더 좋은 자리에서 보기 위해, 그리고 사진으로 남기기 위해 몇 시간 동안 추위에 떠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영도대교의 도개 후 처음으로 다리에 첫 발을 내딛게 된 영도구의 대표 최고령자인 여인갑(83) 씨는 47년 만에 영도다리를 맞기 위해 오랜만에 한복을 고이 차려 입었다. 1930년 생인 여 씨가 4세 무렵 첫 개통된 영도다리는 그에겐 놀이터였다. 여 씨는 5~6세 때 영도다리 바로 옆에 있는 미나카이 백화점(일제 강점기에 세워진 백화점, 현 롯데백화점 광복점 자리) 옥상에 올라가 버려진 물건들을 주워 영도다리 위를 지나 집으로 돌아왔던 순간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참 배고팠던 나날이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영도다리가 ‘만남의 장소’였다. 1.4후퇴로 부산으로 내려온 피란민들은 만약 헤어지게 되면 영도 대교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다. 실제로 영도다리에서 만나 이산가족을 면한 사람도 많이 있다고 한다. 가족을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만나지 못해 이산가족이 되거나 생활고를 견디지 못한 많은 사람들은 영도다리에서 목숨을 끊기도 했다. 남은 사람들도 영도역 근처, 부산 남포동 일대에 단칸방을 구해 어렵게 생활을 이어갔다.
여씨와 함께 영도대교 개통식 행사에 참여한 중구 최고령자 대표 이성순(75) 씨는 영도 다리를 점 치는 곳으로 기억했다. 영도다리 밑 좁은 골목 위에는 길거리에서 자리를 잡고 앉아 점을 보는 노점상, 조그만 판자집, 길게 머리를 땋고 점을 봐주던 장님 아가씨 등 점집이 굉장히 많았다고 한다. 그는 “살기가 너무 힘드니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에 사람들이 영도대교 아래로 점을 보러 갔다”고 설명했다.
국제시장 앞에서 장사를 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사람들, 부산 일대를 빽빽이 채웠던 피란민들은 한국전쟁 1~2년 후 부산을 떠나갔다. 이성순 씨가 친구와 함께 찾았던 영도다리 아래의 점집들도 모두 사라졌고 세월이 흘러 함께 영도다리 위를 뛰놀던 여인갑 씨의 친구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
47년 만에 도개 기능이 회복된 영도대교를 밟은 여인갑 씨는 “옛날에 다리 들어 올려지면 한참 구경하다가 (다시 내려오면) 건너가고 그랬는데 죽기 전에 다시는 못 볼 줄 알았어”라며 옛 시절을 다시 떠올렸다. 그는 “처음에는 사실 여기 행사에 올 생각이 없었는데 생각해 보니 마지막 기회다 싶어서 그냥 건너보려고 왔어. 이게 내 평생 마지막 행사가 되는 거지”라며 담담하게 말했다.
세월이 지나가는 동안 많은 것이 변했다. 1932년 영도대교 개통 전 4000여 가구, 2만여 명에 불과했던 인구는 올 10월 기준 5만 7000여 가구, 13만 6000명으로 늘었다. 영도대교의 총 길이는 214.8m로 변함이 없지만 교랑 폭은 18.3m, 4차로에서 25.3m, 6차로로 확장됐고, 시민들의 보행을 위해 3m에 이르는 양측 보도 폭도 생겼다. 대형선박의 운항을 위해 하루 7회(오전 3회, 오후4회) 들렸던 영도대교는 영도대교를 찾는 관광객들을 위해 매일 낮 12시에 15분간 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