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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들 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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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들 하십니까?
  • 정태철 시빅뉴스 대표
  • 승인 2014.01.06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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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에 KBS는 신년특집 다큐멘터리 한 편을 방영했다. 이 다큐는 충남 태안의 천리포수목원을 조성한 귀화 미국인 민병갈 원장에 대한 것이었다. 2002년 타계한 민병갈 수목원장은 한국전에 참전한 미군병사 출신으로 전후에도 계속 한국에 남아 제대한 뒤 증권투자자로 살면서 평생 번 거금으로 태안 시골에 1만 4000여 그루의 나무를 심어 세계적으로 빼어난 수목원을 조성했다. 민 원장은 워낙 유명하고 훌륭한 분이어서 책이나 언론에서 여러 번 소개됐다. 나는 이번 다큐멘터리에서 그 분이 왜 한반도 서쪽 끝자락에 나무를 심었는지를 밝힌 이유를 듣게 되었다. 그는 평소에 수목원 직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단다. “내가 전후에 수목원을 만든 이유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 절망에 빠진 한국인들에게 아름다운 숲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이 파란 눈의 민 원장 말이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 비록 작심 3일이 되는 한이 있어도 연초가 되면 사람들은 각자 새해 계획을 짜느라 골몰한다. 올해 정초에 불현듯 나는 한국이란 나라를 돌아보고 싶어졌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절망에 빠진 한국인들에게 아름다운 숲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민병갈 수목원장의 말이 나의 ‘거창한’ 나라 걱정의 계기가 되었다. 2차 세계대전 후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바쁘고 치열하게 생존을 위해 몸부림친 나라였다. 우리 정치 지도자들은 국가재건, 조국 근대화, 또는 산업화를 부르짖었다. 민주화도 오랜 기간 동안 우리의 국가 목표였다. 산업화와 민주화가 이룩될 무렵, 정보화가 국가적 화두로 대두됐다. 그 결과 우리는 ‘한강의 기적’에 이어 ‘IT 강국’이란 별명도 갖게 됐다. 선진화나 통일은 최근 정치가들의 단골 구호가 되고 있다. 이렇게 숨 가쁘게 역사를 산 오늘의 한국은 ‘원조 받던 나라에서 원조하는 지구 상 유일한 나라’가 됐고 한류 드라마와 K-pop을 접하고 코리안 드림을 꾸는 가난한 나라 사람들의 우상이 됐다. 그런데 산업화, 민주화, 정보화를 이룬 한국 사람들은 도무지 행복하지 않다. 2013년 OECD 조사에 따르면, OECD 34개 국 중 덴마크가 행복도 1위, 한국은 32위였다. 과연 무엇이 한국 사람들을 이처럼 불행하게 만들었을까? 산업화와 민주화 같은 국가 목표를 쟁취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큰 것을 얻었지만 동시에 중요한 것을 잃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나는 떨칠 수 없다. 수년전, 제주도 해녀 할머니에게 한 방송국이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다. 어렵게 숨을 참고 전복 몇 개를 채취하느니 차라리 산소통을 메고 들어가 바다 밑을 싹쓸이하면 떼돈을 벌 수 있지 않겠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 못 배운 해녀 할머니는 “한 숨을 참고 들어가 딸 수 있는 양만큼만 캤으니 수천 년 동안 해녀질을 할 수 있지 않았느냐”고 대답했다. 우리 한국인은 해녀 할머니 말과는 정반대로 마치 내일 없는 사람들처럼 모조리, 그리고 ‘빨리빨리’ 먹어 치우는 조급한 욕망의 화신처럼 살았다. 이 해녀 할머니는 우리가 세계를 놀래킨 압축성장 과정에서 잃어버린 ‘이성’을 질타했던 것이다. 이렇게 한국인은 ‘하면 된다’는 성취욕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었다. 한국인의 욕심은 이제 신의 영역을 넘보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게 무슨 말인가?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한국 사람들은 부모가 준 얼굴, 삼신할머니가 점지해준 자녀 성별도 바꿀 수 있다고 자신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성형 공화국, 낙태 천국이 될 수가 없다. 히딩크 감독도 회춘 성형하러 한국에 온다고 하지 않던가. ‘사당삼락(四當三落)’이란 말도 등장했다. 이는 4년 앞서 선행 학습해야 서울대 가고 3년 앞서 하면 서울대 떨어진다는 말이다. 그래서 학원가에서는 초등학교 6학년이 4학년 앞인 고1 진도를 나가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세상에! 신이 준 인간의 두뇌 능력도 거스르려는 게 한국인의 못 말리는 욕심인가보다. 아무리 타고난 관상을 성형으로 바꿔도 운명이 변하지 않는다고 ‘관상도사’들이 일러도, 한국인들은 젊으나 늙으나 얼굴에 칼을 대서 마구 원판을 바꾼다. 졸업 후 처음 만난 대학 여자 동기의 얼굴이 몰라보게 바뀌어 당황했던 기억은 해프닝에 불과하다. 인기 TV 토크쇼 <안녕하세요> 프로그램에는 고민에 빠진 사람들이 나오는데, 어느 날 자신이 살쪄서 얼굴과 체형이 미워진다고 엄마가 음식 못 먹게 하고 인격모독적 구박을 준다는 ‘고민녀’가 나온 적이 있다. 의외로 고민녀 얼굴은 평균 이상의 미모였다. 그런데 왜 그리도 그 엄마는 딸의 외모에 집착할까? 책 안 읽는다고 자녀를 다그치는 부모는 이해가 돼도 외모에 신경 안 쓴다고 딸을 닦달하는 엄마는 정상이 아니다. 그 엄마에게 이 말을 가훈으로 권하고 싶다. 그것은 바로 ‘관상불여서상(觀相不如書相)’이다. 이 말은 관상(얼굴 모양)이 서상(책의 모양)보다 못하다는 것으로, 그 뜻은 한 집안 사람들의 얼굴 생김새보다도 그 집안의 책꽂이에 어떤 책들이 꽂혀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성형 공화국 현상은 외면의 이미지로 먹고사는 스타 따라하기와 관계가 있다. 요즘 TV에 나오는 운동선수나 연예인들은 인터뷰 마이크가 들어오면, 입을 모아 “좋은 모습 보여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운동이나 연기를 열심히 하겠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들은 실제 자신이 ‘열심히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열심히 하는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칼럼을 읽는 독자들은 칼럼 속 뜻을 공감하기 위해 칼럼을 읽는 것이지 칼럼을 읽는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려고 칼럼을 읽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많은 우리나라 스타들은 이렇게 남에게 열심히 한다는 이미지를 보여주려고 언론플레이에 목을 맨다. 그리고 그들을 따라하는 한국인들 내면의 주인은 ‘나’가 아니라 ‘남’이 되었다. 미국 역사학자 다니엘 부어스틴이 지은 <이미지와 환상>이란 책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1960년대의 미국 배우 게리 쿠퍼의 팬클럽 회원들이 게리 쿠퍼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자는 운동을 벌인 적이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게리 쿠퍼는 그가 출연한 영화에서 대통령 연기를 잘 해내서 실제로 훌륭한 대통령이 될 자격이 있다고 팬들이 확신했기 때문이란다. 그후 레이건이란 배우 출신이 실제로 미국 대통령이 되기도 했지만, 그는 정치 역량이 입증되어 대통령에 선출된 것이지 어느 영화에서 대통령 연기를 잘 했기 때문에 대통령이 된 것이 아니다. 청순가련한 여인의 표상이었던 한 연예인이 최음제를 복용했다는 여러 해 전의 뉴스도 있었고 프로포폴 주사를 맞거나 성매매와 도박에 관여된 연예인 뉴스도 있었다. 이런 뉴스들은 이미지로 먹고 사는 연예인에게 과도한 가치를 부여하는 우리나라 풍조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요새는 연예인도 모자라 연예인들의 배우자, 자녀, 부모, 심지어 시부모도 TV에 등장한다. 이게 연예인 공화국이 아니고 무어란 말인가. 이런 TV 프로를 보는 사람은 양식 있는 사람이 아니다. 이미지는 실체가 아니다. 부어스틴은 이미지는 실체의 그림자라고 했다. 사람이 실체가 아니고 실체의 그림자인 이미지를 가꾸기 위해 딸에게 외모를 가꾸라고 구박하거나 연예인의 언행을 모방하는 행위는 넌센스다. 입고 있는 특정 브랜드의 패딩점퍼 가격에 따라 계급이 갈린다는 요즘 청소년들도 환상 속에 갇혔다. 프랑스의 포스트모더니스트 브들리야르는 <시뮬라시옹(Simulation)>이란 저서에서 이미지는 실체의 모사(模寫), 즉 모방에 불과하다고 했다. 보들리야르는 현대인은 실체가 아닌 실체의 모방인 이미지에 근거해서 물건을 선택한다고 했다. 이는 자동차, 맥주, 화장품의 기능 차이가 아니라 그 상품을 광고하는 모델이나 브랜드 이미지가 사람들을 유혹한다는 뜻이다. 사실 우리는 왜 자신이 특정 소주만을 고집해서 마시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 소주가 그 소주인데 말이다. 결국 이미지만 쫓아다니다가는 정신이 황폐화된다. 내가 출퇴근 때 이용하는 학교 건물의 한 엘리베이터가 있다. 1층과 6층만을 직행으로 왕복하는 이 엘리베이터가 편도 운행에 걸리는 시간이 20초 남짓이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매우 신기한 모습을 자주 접한다. 여학생이든 남학생이든, 한 명이든 두 명이든, 이들이 엘리베이터를 타면 한결 같이 문 반대편 전신 거울을 쳐다본다. 그들이 거울 한 번 흘낏 보고 머리나 옷매무새를 고치고만다면 신기할 리 없다. 그 학생들은 그 20초 동안 꼼짝 않고 거울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그들은 거울 속 자신을 그냥 쳐다볼 뿐이다. 옆에 있는 나를 의식하지도 않는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미소년 나르키소스는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도취되어 그만 물에 빠져 죽었다. ‘자기도취’라는 영어는 미소년 나르키소스의 이름에서 따온 나르시시즘(narcissism)이다. 나르키소스가 죽은 뒤 핀 꽃이 수선화였다는데, 수선화의 영어 이름도 그래서 나르시서스(narcissus)다. 요즘 우리 젊은이들은 외모에 집착하는 자기도취적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게 분명하다. 손거울을 늘 휴대하고 다니면서 수업 중에 수시로 거울을 들여다보는 여대생도 부지기수니, 더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할까. 한국 사회에 만연한 이미지 추종 현상은 단지 외모지상주의에 국한되지 않는다. 지난 해 어느 날, 고등학생들이 ‘대학탐방’이란 특별활동 시간의 일환으로 내 학과를 방문했다. 나는 고등학생들에게 그들의 장래 희망을 물었다. 한 학생이 검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 이유가 뭐냐고 질문하자, 그 학생은 “폼 나잖아요”라고 대답했다. 사회 정의 실현이라는 검사의 본질보다는 폼 난다는 검사의 이미지 때문에 그 학생은 검사가 되고 싶어 했다. 그러고 보니, 친구를 때리고 금품을 빼앗는 왕따와 학교폭력이 발생하는 이유를 알 듯도 하다. 그냥 신나고 폼 나니까. 심지어, 피의자를 겁탈한 검사, 환자를 성폭행한 의사, 여학생 몰카를 찍은 대학 교수, 애국한다고 외치다가 줄줄이 감옥 가는 비리 정치인들은 모두 똑똑해서 성공했다고 자부할지 모르지만 그 직업의 소명의식보다는 그 직업의 사회적 이미지 때문에 직업을 택하는 한국의 요즘 세태가 낳은 비극의 표본들이다. 왜 우리나라가 이처럼 겉치레나 보여주기에 집착하게 되었을까? 1960년대 미국은 빈민들도 구호물품을 타러 가면서 자가용을 끌고 갈 정도로 당시 세계에서 유일한 부자이면서 정치적 권리를 구가하는 나라였다. 미국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상태에서 과거 귀족이나 부호에게나 가능했던 무엇이든 가지고 싶고 즐기고 싶다는 욕망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런 과도한 욕망은 채워질 수 없었다. 그래서 미국인들의 이런 비현실적 욕망은 이미지와 같은 환상으로밖에 채울 수 없었다는 것이 부어스틴의 진단이었다. 21세기 한국도 유사 이래 가장 잘 살고 자유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황금연휴가 되면 공항이 만원이다. 그만큼 해외여행이니, 골프니, 스키니, 명품이니 하는 것들은 이제 사치품목에 끼지도 못한다. 산업화와 민주화 뒤의 한국도 과거 미국처럼 과도한 욕망의 덫에 빠졌으며, 현실적으로 채워질 수 없는 그 과도한 욕망을 폼과 허세와 환상으로 채우고 있다. 70년대에 ‘국민교육헌장’이라는 게 있었다. 정부는 모든 공식행사에서 국민의례 다음에 국민교육헌장을 꼭 낭독하도록 강요했다. 당시 정부는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국민들을 경제개발 현장에 동원해야 했다. 그래서 만든 국민교육헌장에는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고...”라는 대목이 나온다. 과거 우리 조상들이 추구했던 가치는 ‘명분’과 ‘이상’이었지 ‘능률’과 ‘실질’이 아니었다. 고려의 최영 장군은 “황금 보기를 돌과 같이 하라”고 했다. 불행히도 그런 정신자세로는 경제개발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전통적인 명분과 이상을 버리고 ‘돈에 환장하라’고 요구한 것이 국민교육헌장이었다. 그 덕에 경제는 윤택해졌지만, 우리는 물질만능주의와 성공제일주의의 노예가 되고 말았다. 여기서 나는 민병갈 원장이 절망에 빠진 한국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숲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말을 다시 떠올린다. 우리는 기적처럼 땀 흘려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또 다른 절망의 늪에 빠졌다. 그것은 가치와 여유와 이성과 인간성 상실의 늪이다. 민병갈 원장은 수십 년 동안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를 인격이 있는 사람처럼 정성스럽게 다뤘고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키웠다고 한다. 그는 단 한 그루의 나무도 쓸모없다고 절대로 성급하게 자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민 원장의 뜻과는 다르게 못난 나무는 자르고 못 크는 나무를 버리는 방식으로 남과 싸우고 경쟁해서 신속하게 승리를 얻었고 절망을 극복했다. 그게 부메랑이 되어, 지금 우리는 얻은 것만큼 많은 것을 잃었다. 우리 심성을 지배해온 증오와 허영과 비인간성은 한 때는 꿀맛이었으나 이제는 뱉어야 할 독약이다. 이제 대한민국의 국가 목표는 한마디로 ‘인간화’다. 그래야 우리가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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