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평창에선 동계올림픽이 한창이다. 경기장에선 선수들이 4년 동안 닦아온 기량을 열심히 펼치고 있지만 경기장 밖에선 국익을 앞세운 각국 고위 사절단이 눈에 보이지 않는 치열한 막후 외교전을 펼쳤다. 어쨌든 평창올림픽의 최대 하이라이트는 북한의 참가가 아닐 수 없다.
북한이 끝내 참가하지 않았다면 이번 올림픽은 세계인들의 주목을 끌지 못한 그렇고 그런 행사가 되고 말았을 거다. 북한이 막판에 선수단을 파견함으로써 한반도기를 앞세운 남북 공동입장이 성사되고 남북한 여성선수들이 공동으로 성화봉을 들고 메인스타디움을 달리는 광경이 연출됐다. 여자 하키에서도 남북한 공동선수단이 구성돼 함께 경기를 펼치는 모습이 화제를 모았다. 뿐인가. 북한은 선수단, 응원단, 공연단, 태권도시범단 등 500여 명을 남한으로 파견했을 뿐 아니라 김영남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과 김정은의 여동생이자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인 김여정을 특사로 파견해 일거에 세계 뉴스의 중심에 섰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더라고 올림픽 이후 남북, 북미관계가 어떻게 재편될지가 과제이긴 하지만, 일단 평창올림픽이 ‘북한 핵무기 개발’로 갈등이 최고조에 이른 한반도의 긴장 완화에 일종의 방파제 역할을 한 것만은 사실이다. 글쎄, 끝내 서로 외면하기는 했지만, 김영남·김여정과 미국의 펜스 부통령이 올림픽 스타디움의 지근거리에 앉아 있는 장면은 올림픽이 아니고선 좀체 상상하기 어려운 그림이 아닌가.
IOC도 이런 상황 전개가 싫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그들 자신이 올림픽 개회 이전 북한의 참가를 두고 스위스 로잔에서 남북한 대표단과의 중재에 적극 나서지 않았던가. IOC 입장에선 평창올림픽이 경기외적 이슈로라도 세계의 주목을 받는 것이 결코 나쁘지 않다. 어쨌든 들여다 보는 사람이 많아야 장터가 흥청거릴 게 아니겠나. 올림픽이 강대국의 세력 과시, 지나친 상업화로 멍들어가고 있다는 비판이 비등한 터에 남북한 긴장 완화, 평화 정착에 도움을 줬다는 명분을 내세울 수 있다면 그들로서도 좋은 일이다. 엊그제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의 발언을 뜯어보면 이 같은 자부심(?)이 묻어난다.
바흐는 A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평창 겨울올림픽에서 남북한이 함께 참가하도록 하는데 있어 IOC가 해야 할 역할은 다 했다. 앞으로 기회를 살려나가는 것은 남북 간 정치에 달렸다”고 말했다. 그는 "오는 25일 올림픽 성화가 꺼진 뒤에도 올림픽으로 이뤄진 남북 간 긴장 완화가 계속되기를 IOC는 희망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한편에선 평창올림픽이 지나치게 정치화되고 있지 않느냐는 우려의 시선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국내 보수진영은 “힘들여 잔칫상을 차렸더니 느닷없이 북한이 숟가락 하나 들고 나타나 음식을 다 쓸어먹는다”고 못마땅해 하고 있다. 올림픽이 북한의 위장 평화 공세의 선전장으로 악용되고 있다는 비판도 빠지지 않는다. 젊은이들은 젊은이들대로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을 만들면서 북한 선수의 몫을 빼내기 위해 한국 선수들의 몫을 빼앗았다”며 “이는 공정성을 침해하는 행위”라고 비판적 시선을 던지기도 했다.
미국과 일본도 평창올림픽이 불러온 남북 데탕트 분위기가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박과 제제’의 단일대오를 흩트리지나 않을까 경계하는 시선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평창에 온 펜스 미국 부통령이나 아베 일본 총리가 문재인 정부에 끊임없이 견제구를 날린 터다.
보수진영의 불만이나 일부 젊은이들의 시선이 지나치게 소극적이고 피해 의식에 젖은 게 아닌가 싶기는 하다. 그러나 보수진영이나 젊은이도 국민의 일부인 만큼 정부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기보다는 이들을 잘 설득하고 다독거릴 일이다. 미국이나 일본에 대한 설득도 소홀해선 안 될 일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어쨌거나, 평창올림픽도 여느 올림픽과 다를 바 없이 정치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달까, 국제정치의 막후 협상장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2.
스포츠를 평화의 전령사라고들 하지만, 원래 스포츠는 전쟁의 대체물이다. 초집적 반도체가 만들어낸 인공지능 문명 속에 사는 현대인이지만 DNA 속에는 돌도끼를 들고 초원을 달리던 원시인의 야성이 아직도 숨어 있다.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전쟁을 벌일 수는 없으니 스포츠란 ‘대리 전쟁’으로 야성을 달래는 거다. 스포츠가 인간의 야성을 충족시키는 ‘근육 활동’인 만큼 현대사회에서 적용하기 위해선 공정성과 엄격한 룰이 필요하다. 그리고 ‘명예’와 ‘평등’을 강조하고도 있다. 스포츠에 정치적 오염이 가해지는 것을 경계하는 것도 그 때문일 터.
스포츠는 돈벌이 수단이 아니라며 ‘아마추어리즘’을 강조하고 공정성에 기반한 화합과 조화, 비정치주의를 강조하지만, 사실 근대 올림픽은 여러 측면에서 돈과 인종 차별, 정치에 오염된 게 사실이다. 하기야 근대 올림픽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BC 776년 전후에 창설됐다는 고대 올림피아도 정치와 돈에 물들었기는 마찬가지.
고대 올림픽은 올림피아에 신전이 있는 그리스의 주신 제우스에게 바치는 제전 경기다. 오늘날로 따져 7~9월 사이 만월(滿月)이 있는 날을 중심으로 실시되었는데 전성기에는 5일 동안 계속되었다고. 경기 종목은 초기에는 경기장 끝에서 끝까지 달리는 단거리 경주(요즘 실측으로는 192.27m) 뿐이었는데 제1회 대회 우승자는 에리스의 크로에포스였다. BC 724년 제14회부터 경기장을 왕복하는 경주, BC 708년 제18회부터 레슬링과 5종경기 (멀리뛰기·창던지기·단거리경주·원반던지기·레슬링) 등 점차 경기 종목이 늘어나 전성기에는 13종목에 이르렀다고. BC 632년 제37회부터는 소년경기(青年競技)가 추가됐다.
올림픽에서는 시인·철학자·예술가들이 문학·시가·예술·연극 등을 겨루었다니 요즘으로 따지면 개폐회식 문화공연도 치러졌던 셈이다. 올림픽 참가자 자격은 그리스의 도시국가에서 시민권이 있고, 범법행위가 없으며, 주신 제우스에 대한 모독행위가 없었던 자에 한정됐다. 여자는 참가가 금지됐으며, 기혼여성은 관람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제전 전후 3개월간은 그리스 모든 폴리스(polis: 도시국가)가 휴전했으니 임시적이나마 평화의 기제가 되기도 했던 것.
경기는 전라(半裸)에 맨발로 했으며, 우승자에게는 올리브 잎으로 만든 관을 주었다. 부상으론 올리브유가 든 도자기 하나. 그러나 후세로 가면서 각국에서 우승자에게 거액의 상금을 주는 풍습이 나타나 그 순수성이 훼손됐다. 올림피아가 당시 도시국가들의 국력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변질했기 때문이다. 아테네에선 올림피아 제전경기의 우승자에게 500드라크마의 포상금을 주었다는데 1드라크마는 양 한 마리의 가치가 있었다고. 이 정도면 당대로 따져 팔자를 고칠만한 돈이었다. 신성한 제전이라던 올림피아에서도 우승자에게 상금이나 연금이 주어지면서 마침내 프로선수에게도 그 문호가 개방되기에 이르렀다. 제전경기가 외형적으로 융성해짐에 따라 점차 세속화, 상업화됐던 것. 요즘 올림픽 금메달을 따면 나라별로 거액의 포상금을 주거나, 평생 연금을 지급하는 것과 비슷한 양상이다.
3.
근대 올림픽의 중요한 모토는 정치에 의한 스포츠의 오염 방지다. 이는 올림픽 헌장에도 잘 나타나 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올림픽 헌장 제5장 51조 3항에는 "어떤 종류의 정치, 종교, 인종차별적 선전도 금지한다"고 명시돼 있다. 하지만 올림픽 역사를 보면 올림픽이 치열한 국제 외교무대의 장이 아니었던 적이 거의 없다. 올림픽은 각국의 발전상을 홍보하는 선전장이 됐고 이념의 대결장, 때로는 총성이 오가는 전쟁터까지 돼 버렸다. 지난 1956년 에이버리 브런디지 당시 IOC위원장이 “스포츠는 정치와 전적으로 무관하다”란 발언을 한 이후, IOC는 대체로 국제나 지역 정치에 올림픽이 이용되는 것을 원칙적으로는 금지하고 있지만, IOC 위원장이 직접 이런 말을 남겨야 했을 정도로 근대 올림픽은 출발부터 정치적이었다.
프랑스의 민족주의자였던 쿠베르탱 남작이 근대 올림픽을 부활시킨 것은 잘 알려진 일. 쿠베르탱은 1870∼71년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한 이유가 군인들의 체력이 약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프랑스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이기려면 체육을 교육 제도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방편의 하나로 근대 올림픽을 주창했던 겻.
1896년 제1회 올림픽은 초대 올림픽위원장을 맡은 그리스인 디미트리오스 비켈라스와 그리스 왕가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아테네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터키의 지배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그리스는 국민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올림픽 개최를 강하게 원했던 것. 이처럼 근대 올림픽의 시작은 쿠베르탱과 그리스의 민족주의가 맞물려 탄생했던 거다. 고대 올림픽 발상지인 그리스 아테네에서 개최됐다.
그 해 4월 6일부터 4월 15일까지 열린 1회 올림픽은 성공적이란 평가를 받았다. 올림픽 경기장으로 쓰인 파나티나이코 경기장은 관객 수만 명이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개최국인 그리스는 마라톤 경기에서 자국 선수인 스피리돈 루이스가 우승하면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대회가 끝난 후 이후의 올림픽을 계속 그리스에서 개최할 것인가를 놓고 피에르 드 쿠베르탱 남작과 그리스 왕인 요르요스 1세 사이에서 갈등이 있었으나 1900년 대회가 이미 파리에서 열리기로 결정된 상태여서 올림픽의 세계 순환 개최 원칙이 확립됐다. 고대 올림픽의 이상을 이어받아 창설됐다지만 제1회 올림픽엔 여성들의 참가가 금지되는 등 한계도 많았다. 선수단이 행렬을 이루어 입장은 했으나 성화 릴레이, 올림픽 선서 등은 그때까진 없었다.
올림픽은 이미 제2회 대회부터 상업적 목적 때문에 본래의 취지가 왜곡되기 시작했다. 파리에서 열린 제2회 대회는 당시 파리에서 열리고 있었던 세계박람회의 부속 행사로 전락해 버린 것. 올림픽이 만국박람회 일정에 맞춰 6개월로 늘어뜨려졌고, 종목도 분산 개최됐으며 만국박람회 볼거리 공연들까지 대회 종목에 포함되는 등 엉망이 됐다. 1904년의 제3회 세인트루이스 대회도 사실상 루이지애나 상업박람회의 눈요기 거리에 불과했다.
뭐니 해도 올림픽이 정치적으로 가장 크게 오염된 것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베를린 올림픽은 독재자 히틀러가 주도한 나치 독일의 노골적인 정치선전의 장이었다. 이 대회는 인종차별, 배타적 민족주의를 아예 명분에 세워두고 개최했다. 보이콧을 하려던 영국, 프랑스, 미국 등도 당시 험악한 독일 분위기에 어쩔 수 없이 참가했다. 나치 정권은 유태계 독일 선수들의 참가를 막고 육상 4관왕 제시 오언스를 비롯해 유색인종에 대한 노골적인 인종차별을 저질렀다. 베를린 시내 곳곳에 고대 올림픽 영웅들의 동상을 세워 상징 조작에 나서기도 했다. 대회장 곳곳의 화장실에는 ‘개와 유대인은 출입 금지’라고 쓰인 경고문이 붙어 있었을 정도. 처음으로 성화 봉송이 시작됐고, 최초로 텔레비전으로 현장 중계가 시작된 것도 이때였다. 히틀러는 올림픽을 나치의 폭력적 이미지를 희석시키는 기회로 삼고 아리안 민족의 우수성을 자랑하는 기회로 삼았다. 히틀러는 3년 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4.
제2차 세계대전 후 속개된 올림픽은 미국과 소련의 냉전주의의 대결장으로 전락했다. 이스라엘과 중동의 갈등이 유발한 끔찍한 폭력의 살육의 현장이 되기도 했다.
‘피의 올림픽’이라 불린 1972년 뮌헨 올림픽은 올림픽 역사상 가장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1972년 9월 5일 이른 아침, 올림픽 선수촌의 이스라엘 선수 숙소에 무장한 검은 9월단 멤버 8명이 난입했다. 검은 9월단은 팔레스타인 극좌파 테러단체. 이들은 이스라엘인 선수 1명과 코치 1명을 살해하고, 남은 9명을 인질로 붙잡았다. 물론 올림픽 경기는 중단됐다. 검은 9월단은 이스라엘에 수감된 팔레스타인 정치범 234명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스라엘 수상 골다 메이어는 이 요구를 단호히 거절했다. 서독 당국과 범행 단체는 교섭을 시작해 인질범들이 비행기로 이집트 수도 카이로로 탈출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선수촌에서 비행기가 준비된 뮌헨 국제공항까지는 2대의 헬리콥터로 이동하고, 그 후 준비된 비행기에 탑승하여 국외로 탈출하도록 한다는 것. 그러나 서독은 공군기지로 이동한 상태에서 경찰특공대와 저격수들이 인질범을 사살하고 인질을 구출한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헬리콥터가 퓌어슈텐펠트브루크 공군 기지에 착륙하고, 인질범 2명이 준비된 비행기를 확인했을 때쯤 저격수가 발포했다. 그러나 범인들은 헬리콥터 1대를 수류탄으로 파괴하는 등 격렬하게 저항했다. 이 때문에 인질 9명 전원 및 경찰관 1명이 사망하는 등 사건은 최악의 결과로 종결되고 말았다. 올림픽가 정치에 의해 테러를 당한 사상 최악의 사건이었던 것.
그런가 하면 1980년대 올림픽은 미국과 소련 양 초강대국의 패권 경쟁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방아쇠는 미국이 먼저 당겼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당시 미국의 지미 카터 정권은 그 전 해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문제 삼아 올림픽을 보이콧했다. 미국의 입김을 받은 서방 67개국도 이에 동조해 올림픽이 두 동강 나고 말았다. 우리나라, 서독, 일본, 캐나다 등은 선수들의 출전을 완전히 거부했고,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등은 경기에서 국기 대신 올림픽기나 올림픽 위원회기를 내세워 개인적으로 출전했다. 대회조직위원회 발표에 의하면 참가국은 81개국, 참가인원은 6948명. 폐막식 때는 미국의 거부로 차기 개최국의 깃발로 미국의 국기가 아닌 개최 도시인 로스앤젤레스 시의 기가 게양됐고 국가 대신 올림픽 찬가가 연주됐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이 침략 행위임은 분명하지만 그 문제를 올림픽 무대로 끌어들여 올림픽을 멍들인 것은 두고두고 카터 정권의 실책으로 꼽힌다.
그랬으니 소련이 가만있을 리 있나. 차기 대회인 1984년 미국 LA올림픽에서 똑 같은 방식으로 보복에 나섰던 것. 소련을 비롯해 동구권 국가, 북한, 쿠바 등 14개국이 불참했다. 그래도 140여 국이 참가하긴 했다. 이때 중국이 처음으로 올림픽 무대에 등장했다.
그리고 1988년 서울올림픽. 두 차례에 걸쳐 번갈아 ‘반쪽 대회’로 멍들었던 올림픽은 이때야 160개국이 참가하는 등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광주민주화운동을 군홧발로 짓밟고 들어선 전두환 정권은 국제사회의 인정을 올림픽 유치에서 찾으려 했다. 1981년 독일 바덴바덴에서 서울의 올림픽 유치가 결정됐을 때 IOC가 전두환 군사정권의 분칠을 도와준 게 아니냐는 비판이 많았다. 그러나 1987년 6·10 항쟁이 일어났을 때 전두환 정권이 시민의 저항을 무력으로 진압하지 못하고 결국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한 것은 다음해 열릴 올림픽을 의식했기 때문이었으니 서울 올림픽이 한국의 민주화를 앞당기는 데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다.
5.
냉전 이후 올림픽의 가장 큰 고민은 지나치게 상업화돼 가고 있다는 대목이다. 특히 중계권을 틀어쥔 미디어 자본이 올림픽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지난 2016년 리우 올림픽에선 여름 올림픽의 꽃인 육상, 수영 경기가 현지시간으로 밤 10시에 열렸다. 무엇 때문이었겠는가. 미국 동부의 프라임 타임인 오후 8시에 맞추기 위한 것. 이번 평창 겨울올림픽의 피겨 남녀 싱글 경기도 한국시간 오전 10시에 열렸다. 역시 마찬가지 이유다. IOC가 미국 동부에 경기 시간을 맞추는 이유는 중계권료 수입 때문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 올림픽이 정치적 이해관계에 종속되지 않아야 한다는 건 이상이다. 하지만 앞에서 살펴본 대로 당대의 정치 상황에 좌우되지 않은 올림픽은 사실상 없었다.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올림픽이 모든 종류의 정치에 초연해야 한다는 주장도 반드시 옳은 건 아닌 것 같다. 어차피 인간의 모든 삶이 정치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판에 올림픽처럼 초거대 스포츠 행사가 독자적으로 순수하게 열릴 수는 없는 게 아닌가.
그럴 바에야 올림픽이 ‘좋은 정치’의 디딤돌이 되는 게 나을 것이다. 테러에 의해 피바다가 되거나 슈퍼 파워의 힘겨룸에 의해 올림픽 보이콧이 남발되는 그런 정치 말고 세계와 지역 국가들의 평화와 공존에 도움을 주는 정치 말이다.
평창올림픽은 그런 점에서 나쁘지 않다. 북한은 미국 본토를 핵공격을 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뻥뻥 치고 미국은 이런 북한에 ‘제재와 압박’을 넘어서 선제타격 운운하는 마당이다. 죽는 것은 조조 군사라고 행여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진다면 그 아비규환은 상상조차 어렵다. 올림픽이 남북 대화, 나아가 북미 대화의 계기가 돼 한반도의 평화를 가져오는 데 공헌한다면 그 또한 ‘평화’와 ‘공존’이라는 올림픽의 이상에 부합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올림픽 이후의 한반도 정세에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