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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신문과 방송 접하기가 두렵다. 나만 그런가?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최근 1주일 간 언론에는 윤 일병 구타 살해 사건, 김해 여고생 살인 사건, 포천 빌라 살인 사건, 중학생의 임신 여교사 폭행 사건 등 끔찍한 뉴스들이 연일 보도됐다. 범행 수법이 너무도 잔인하고, TV 화면에 비친 피의자들이 왜 그리 뻔뻔한지, 분에 겨워 잠도 잘 오지 않는다.
도대체 왜 이런 일들이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을까? 여기저기서 원인을 찾고 분석하는 글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대개 우리 사회가 짧은 기간 동안 눈부신 성장을 이루는 과정에서 ‘물질적 압축성장’이 낳은 ‘정신적 황폐함’을 원인으로 보는 시각이 많이 소개되고 있다. 이것들은 우리나라가 물질적으로는 선진국이지만, 그에 상응하는 문화와 가치관, 그리고 윤리의식은 아직 선진국 근처에도 못 미친다는 견해들이다.
우리 사회는 물질적 우월감 속에 빠져 윤리와 가치관이 흔들리고 있다. 특히 요즘 사람들 생각에는 ‘우리’는 없고 ‘나’만 있다. 전통적 공동체주의는 사라지고 현대적 개인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공공성은 없고 개인성만 남았다. 진영논리에 매몰된 이념갈등은 전체를 보지 못하고 나의 '이익'만 보고 있다. 신자유주의 경제의 경쟁 논리는 부의 축적을 위해서 무한경쟁을 유도하고 있다. 여기서도 우리는 없고 나의 '돈'만 있다. 이러한 사회적 상황이 계층 간, 세대 간 갈등을 심화시키고, 사생활 침해가 일상적인 일이 되고, 가족과 학교가 붕괴되고, 결국 인간관계도 파탄으로 치닫고 있다.
우리는 냉정하고 지독하게 나만 사랑하고 나만 배려한다. 남을 잘 쳐다보지 않는다. 무엇이든지 ‘빨리빨리’ 하고 싶은 의식은 ‘내가 불편하니 다들 나를 위해서 빨리빨리 비켜달라’는 의식과 다를 게 없다. 그래서 기초 질서는 무시되기 일쑤다. 내가 끼어들 때는 아양을 떨고 남이 끼어들면 죽일 놈이라고 욕하는 운전자, 소방차나 119 구급차가 경적을 다급히 울려도 본체만체하는 철면피 운전자 등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 식 사고방식은 이미 거론거리도 못된다.
우리는 IT강국이라고 자랑하지만 IT에티켓은 처참할 정도로 후진국 수준이다. 중고등학생들은 선생님 눈을 피해 책상 안으로 손을 넣고 스마트폰으로 카톡이나 ‘문자질’한다. 자판을 보지 않아도 현란하게 손가락을 움직여 그 누군가와 채팅한다. 그 내용은 뭘까? “너 지금 뭐하니?” “응, 나 지금 너와 채팅하고 있어.” “그래? 나도 너와 채팅 중인데, 어쩜 우린 이렇게 닮은 게 많니?” 이런 대화를 선생님 몰래 한다고 무슨 능력의 승리인 것처럼 자랑하는 청소년들의 머릿속에 선생님에 대한 존경이나 교육에 대한 경외심은 기대조차 할 수 없다. 대학 강의실에서도 수업 중 끊임없이 스마트 폰을 사용하는 학생들이 많다. 이제는 교수들마저 수업 중에 스마트폰을 진동으로 해놓고, 스마트폰이 울리면 학생들에게 양해를 구하지도 않고 문자 답변 정도는 수업을 끊고 하는 교수도 있다고 들린다. 이제 개인의 스마트폰이 사회의 예의보다 우선권이 있는 사회가 됐다.
우리는 내가 남에게 맞으면 아프다는 것을 안다. 내가 아프면 남도 아프다는 것을 알면서, 왜 학교폭력, 가정폭력, 성폭력, 군대폭력이 우리 사회에 만연하게 됐을까?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온갖 시험을 통해 남과 경쟁에서 이겨야 하는 삶을 살아 왔다. 사회는 다윈의 적자생존이 지배하는 정글이 됐다. 학교도, 직장도 싸워서 이겨야 할 사각의 링이 됐다. 이 속에서, 남을 배려하고 사랑하면 이길 수 없다. 사회 속에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와 같은 자기성찰을 할 틈이 없다. 우리는 바쁘다. 바쁜 게 남한테는 떳떳한 자랑거리다. 온갖 자기개발서들은 이 사회에서 ‘최고’ ‘최대’ ‘최초’가 돼야 생존한다고 일등 지상주의를 강요하고 있다.
나만큼 우리를 생각하고 나만큼 남을 배려하고 사랑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아마도 용기가 아닐까? 개인주의와 물질주의, 그리고 성공 제일주의가 뿌리가 깊은 데, 각 개인이 그 개인주의와 물질의 덫을 벗어던질 수 있는 계기는 고도의 용기가 아닐까? 우리는 나를 버리고 남을 위해 희생할 용기가 없는 듯하다. 이제까지의 온갖 기득권과 생존방식과 철학이 남을 배려하자마자 모두 상실된다는 두려움으로 인해 우리가 남을 생각하는 용기를 감히 꿈도 꾸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며칠 전, 일본에 있는 김대열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가 쓴 짧은 글귀를 보고 필자는 무릎을 쳤다. 그것은 자녀들에게 ‘아름다운 마음’을 가르치자는 것이었다. 아름다운 마음이야말로 자녀를 진정한 행복의 길로 가게 하기 때문이란다. 그가 말하는 아름다운 마음은 별 게 아니다. 작은 것에 감사하고,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며, 나눌 수 있는 마음이면 족하단다. 그저 남과 어깨동무하며 사이좋게 지내라고 가르치자는 아주 간단한 것이다.
몇 년 전,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혜민 스님 강연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혜민 스님의 특강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올바른 선택’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대한민국의 모든 부모들이 하나부터 열까지 아이들의 선택에 관여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아이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나쁜 결과를 나타냈을 때, “다 엄마 때문이야!” “아빠가 그렇게 하라고 했잖아?”라고 하며 부모 탓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갖은 악폐들을 어디 한순간에 고칠 수 있을까. 아주 서서히, 그리고 아이들 교육부터 우리 기성세대가 바로 잡아야 한다. 아이들에게 아름다운 마음을 가르치고 아이들에게 그들의 선택권을 되돌려 주어야 한다. 부모가 남을 없애야 할 원수나 적으로 보면서 어찌 자신의 아이들에게 남을 배려하는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라고 교육할 수 있을까? 아이들에게 미주알고주알 간섭하면서 어찌 독립심이 강하고 자기 선택에 자기가 책임을 질 수 있은 인격체로 아이가 크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
우리 자신부터, 그리고 옆에 있는 자녀부터 아름다운 마음을 갖도록 용기를 갖고 생각을 바꿔보자. 좀 사회를 따뜻하게 만들어 보자. 관심, 공감, 이해, 화해, 나눔, 정의, 평화, 배려, 사랑의 씨앗을 만들어 보자. 서로 이런 인사로 하루를 시작해 보자. “기쁜 하루 만드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