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7일은 신문의 날이다. 1896년 한국 최초의 민간신문 독립신문이 창간된 날이다. 독립신문은 서재필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서재필의 일생을 먼저 정리해보자.
구한말, 실학으로 눈을 뜬 양반가의 전도 유망한 박영효, 유길준, 김옥균 등의 열혈청년들은 1880년과 1881년 영선사, 조사시찰단(구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과 청국의 문물을 구경하고 견문을 넓힌다. 그리고 이들 개화파 젊은이들은 조정에 선진 제도 도입을 건의한다. 그게 학교 건립, 신식군대 신설, 그리고 신문 창간 등이었다.
고종은 1883년 한국 최초의 근대신문인 한성순보(漢城旬報)의 발행을 허가한다. 당시 한성판윤이었던 박영효가 주도한 한성순보는 일본인들의 기술적 도움을 받아 정부 인쇄소인 박문국에서 발행됐으며, 순한문이었다. 정부가 발행 주체였으니 정부 소식지인 ‘관보’이지 근대신문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한성순보 내용이 국내관보(官報, 정부소식)도 있지만, 그 밖에도 국내사보(私報, 사건사고), 각국근사(近史, 역사), 잡록(雜錄, 천문과 지리), 시직탐보(市直探報, 물가) 등을 담았으니, 뉴스의 다양성, 정기성, 독립된 제호 등 근대신문의 조건에 부합한다. 한성순보는 한국 최초의 근대신문이 맞다.
1884년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서재필 등 양반 출신 개화파 청년 지식인들이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입헌군주제를 통한 그들의 국가 개조 꿈은 3일천하로 무너졌다. 박문국이 그 와중에 불타면서, 한성순보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갑신정변에 참여한 서재필은 김옥균 등과 같이 일본으로 망명했으나, 모반죄를 범한 그의 아버지는 참수됐고, 어머니, 형, 아내는 음독자살했으며, 두 살배기 아들은 굶어 죽는 등 가문이 몰락했다.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한 서재필은 선교사의 도움으로 고등학교와 의대를 거쳐 의사가 된 후, 1894년 갑오경장으로 역적의 누명이 벗겨지자, 망명한 지 10년 만인 1895년 미국 국적을 갖고 귀국한다. 그후 1896년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독립신문을 창간한다. ‘최초의 근대신문’은 한성순보가 맞지만, 정부가 주도했다는 태생적 한계를 고려한 학계는 독립신문을 ‘최초의 민간 신문’으로 규정했다. 한국신문협회는 독립신문 창간일인 4월 7일을 1957년부터 한국 신문의 날로 정해서 매년 경축하고 있다.
독립신문은 순한글판과 영문판을 동시에 발행했으며, 한글 띄어쓰기가 시작된 최초의 문헌이라고 한다. 한글 띄어쓰기는 영어를 접한 서재필의 아이디어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발간사에는 백성을 깨우치고,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키며, 서구 문물을 배우자는 등의 계몽적 신문 목적이 뚜렷이 제시되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서재필이 직접 기사도 썼고 인쇄기도 돌렸다고 하며, “한 장에 한 푼인 신문이요! 읽고 나면 창호지도 되고, 밥상덮개도 되는 신문이 한 장에 한 푼이요!”라고 외치며 신문에 낯선 일반 민중들에게 신문의 효용성(?)을 목청껏 홍보했다고 한다. 서재필은 발행인, 기자, 인쇄공, 그리고 신문가판원 역까지 맡은 ‘다잡(多job) 언론인’이었다.
그러나 서재필의 조정 비판이 심해지자, 조정 수구파들이 일본과 러시아의 힘을 빌려 서재필 추방운동을 벌였고, 이에 미국이 미국 시민권자인 서재필을 미국으로 강제 송환시키기에 이르렀다. 목숨 걸고 혁명을 일으켰다가 멸문지화를 당한 풍운아 서재필은 또 다시 두 번째로 타의에 의해 미국으로 쫓겨났다. 그후, 1919년에는 상해임시정부의 외교 고문을 맡아 해외 독립 운동에 기여했고, 미군 군의관으로 복무한 적도 있었으며, 1947년 미군청청의 초청으로 다시 한국으로 귀국하여 군정청 고문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국내 시국 정쟁의 혼란함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원치 않은 세 번째 미국행이었다. 서재필은 그후 필라델피아의 주택에서 여생을 보내다 1951년 타계했다.
우리 정부는 1977년 서재필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했고, 1994년에는 타계한 지 43년 만에 유해를 환국시켜 서울 현충원에 안장했다. 2008년 미국 워싱턴 시는 5월 6일 서재필 동상을 건립했고 이 날을 ‘서재필의 날’로 선포했다. 그해 우리 정부는 그의 고향인 전남 보성에 서재필 기념 공원을 조성했다.
미디어 학자 뉴만(Neuman)은 “전통 신문(종이신문)이 살아남을 것인가라는 물음 자체가 무의미하다. 어떤 곡선을 그리면서 사라지는가 만이 문제”라고 했다. 전 세계적으로 종이신문 발행부수는 크게 줄지 않았다. 이는 인구 많은 중국과 인도 등 신흥 경제개발국들의 종이신문 발전 덕분이다. 그러나 미국, 유럽, 한국, 일본 등 선진국에서 종이신문 발행부수는 급격하게 줄고 있다. 2016년 유료부수 기준으로 1일 100만 부가 넘는 국내 일간신문은 전국에서 단 하나뿐이었다. 20만 부가 넘는 일간신문은 겨우 7개, 10만 부가 넘는 일간신문은 16개에 불과했다.
1990년대에 ‘X세대’로 불리면서 초창기 인터넷 세대, 닌텐도 게임보이 세대가 이제 40대가 됐으며, 그들은 읽는 것보다는 영상을 더 좋아해서 거의 종이신문을 읽지 않는다. 요새는 50대, 60대도 세련되게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스크롤하고 있으니, 종이신문의 독자는 물론 정기 구독자는 더더욱 사양 추세다.
거기에다 유튜브,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블로그가 판을 치면서 전 국민이 기자가 돼서 한 마디씩하고, 전 국민이 칼럼리스트가 돼서 자기 주장을 편다. 기자의 뉴스 독점 생산, 독점 유통 체제가 종말을 고했다. 종이신문 몇 개, TV 채널 몇 개가 다였던 시대가 가고 어느새 인터넷신문 1000개에 TV채널 수십 개가 설치니, 1개 언론사에 돌아가는 광고 수익은 줄고 또 줄어 재정적으로 풍족한 언론사가 드물게 됐다.
종이 전화번호부가 사라졌다. 종이 사전도, 종이 백과사전도 사라졌다. 종이신문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 전자책이 있어도 종이책이 의외로 끈질기게 생존하는 현상을 보고, 종이신문의 잉크냄새와 '바스락' 하는 종이질감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종이신문은 일부 아날로그 감성자를 중심으로 명맥을 지킬 거란 예측도 있다. ‘지지직’ 소리를 내는 LP 레코드판이 없어지는 듯하더니 다시 팔리는 현상과 유사하다. 그러나 문제는 종이든, 모바일이든, SNS든 신문의 전달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언론의 역할이다. 역할이 살아 있으면, 언론도 생존한다.
우선, 가짜뉴스가 성행하다보니 오히려 언론은 진실을 보도하면 국민의 신뢰를 찾을 수 있다. 교과서는 이런 언론 역할을 ‘진실 확인자’라 했다.
네티즌들은 표현의 자유를 누리며 SNS에서 댓글을 달고 세상을 들었다 놨다 하기도 한다. 최근의 이런 현상을 ‘신 정파 언론(neo-partisan press)’이라고 한다. 그러면 그럴수록 언론은 통찰력 있는 해설과 타당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어야 승산이 있다(‘의미부여자’의 기능).
SNS는 남 얘기 듣고 옮기는 게 대부분이다. 입소문에 근거한 네트워크 세상에서 현장에 갔다 와서 진짜 목소리를 전할 수 있는 조직과 인력은 정규 언론의 강점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현장 목격자’가 언론의 입지를 높일 거라 예측하고 있다.
또한, 정보과잉 시대에 넘치는 정보를 체계화하고 구조화할 수 있는 ‘지적인 정보 수집가’의 역할도 미래 언론이 살 길로 꼽힌다.
한국 신문은 서재필의 애국 혼이 서린 독립신문에 뿌리를 두고 있다. 네티즌들은 표현의 자유를 외친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책임이 없다. 한국 신문은 진실을 찾는 책임이 틈새다. 신문은 서재필이 독립운동하듯 절박하게 책임을 지켜야 역설적으로 자유로워진다. 가짜뉴스와 유사(類似) 언론(para-journalism)의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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