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퍼스 곳곳이 시끌시끌한 점심시간이다. 한 남학생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학교 내 구석진 곳에 자리 잡은 오래된 건물의 화장실로 향한다. 그는 한 곳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변기 뚜껑을 닫고 그 위에 도시락을 올린다. 그리고 식사를 시작한다. 행여나 옆 칸에 누가 있어 눈치 챌까 숨죽이고 냄새를 참으며 꾸역꾸역 식사를 한다.
이렇게 상상만 해도 안타까운 화장실 식사 모습이 실제로 대학가에 나타나고 있다는 글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얼마 전,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 한 네티즌이 ‘너무 슬픈 식사’라는 제목으로 글을 게시했다. 자신을 대학교 1학년생으로 밝힌 그는 혼자 밥을 먹으려니 시선이 부담스러워 화장실에서 남몰래 도시락을 먹었다고 했다. 그는 학기 초부터 최대한 사람들이 없는 건물을 탐색했고 그 곳 화장실에서 점심을 해결한다고 털어놨다.
이 글에는 약 500여 개의 댓글이 달렸다. 안타깝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혼자 먹는 게 어떻냐며 화장실에서 혼자 식사하는 것에 동조하는 댓글들도 있었다. 닉네임이 ‘이재필’인 한 네티즌은 “학교식당 가서 혼자 먹어봤는데, 사람들이 힐끗거리며 쳐다보는 게 느껴지고, 과 새내기들이 왜 혼자 먹냐”고 묻더라며 “(혼자 숨어서 먹는) 저 심정이 이해된다”고 말했다.
대학가에서는 화장실에서 남몰래 식사하는 대학생들이 있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서울 소재 일류대학에 다니는 대학생 권지호(22, 서울시 관악구 신림동) 씨는 “학교 화장실에서 혼자 도시락을 먹는 학생을 봤다는 얘기를 친구한테 들었다”고 말했다. 부산의 한 전문대에 다니는 대학생 이지희(22, 경남 김해시 내동) 씨는 화장실 안 변기 옆 쓰레기통에서 편의점 도시락통을 두어 번 본 적이 있다. 이 씨는 “밖에서 도시락을 먹고 굳이 빈 도시락통을 화장실까지 들고 와서 버릴 까닭이 없으므로, 누군가 화장실에서 도시락을 먹고 빈 도시락통을 화장실 쓰레기통에 버린 것이 분명한 듯하다”고 말했다.
서울의 한 공과대학에 다니는 김주영(24, 서울시 성동구 마장동) 씨는 남자보다도 여자들이 많은 학과에서 화장실에서 몰래 밥 먹는 학생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김 씨는 “남자보다는 여자들이 더욱 시선에 예민해서 몰래 화장실까지 가서 밥을 먹는 것 같다”고 말했다.
화장실 남몰래 식사 문제는 일본에서 먼저 대두됐다. 아사히 신문이 작년 7월 6일자 신문에 도쿄대 화장실에 “화장실에서 밥을 먹지 맙시다”란 안내문이 붙어 있다는 기사를 보도하고 나서 화장실 식사가 일본의 사회 문제가 됐다. 이를 일본의 정신과의사인 마치자와 시즈오 씨가 ‘런치 메이트 증후군’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런치메이트 증후군’이란 점심식사 시간에 동료 없이 혼자서 식사할 경우 주위로부터 왕따 당하고 있는, 혹 가치 없는 외톨이로 보일까 불안해하는 나머지 화장실 같은 곳에서 숨어서 식사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지금 국내 대학생들 사이에서도 나타나게 된 것이다. 대학생 박수민(23, 부산시 금정구 장전동) 씨는 같이 밥 먹을 친구가 없거나 있어도 찾지 못하면 혼자 밥을 먹어야 한다. 그 때마다 아는 사람들한테 자신이 혼자인 게 부끄러웠다. 박 씨는 “혼자 밥 먹는 걸 남한테 보이는 걸 병적으로 꺼리거나 눈치를 보는 보는 사람이라면 화장실에 가서 남몰래 식사할 것 같다”고 말했다.
대학생 한승완(24, 부산시 연제구 연산동) 씨도 남몰래 화장실에서 밥 먹는 아이들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한 씨는 “몰래 밥 먹는 사람들은 실제로 친구가 없기 때문에 자격지심에 그럴 것”이라며 “친구가 있다면, 남이 혼자 먹는 걸 봐도 아무렇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학생 이아름(23, 경남 김해시 장유동) 씨도 학교에서 친구 없이 조용히 다니는 애들이 아는 사람이 없는 건물의 휴게실이나 화장실 등에서 밥을 먹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 씨는 “소위 ‘왕따’나 ‘아싸(아웃사이더)’같은 애들이 화장실이나 도서관에서 혼자 먹는다더라”고 말했다.
동아일보 3월 18일자 기사에서 서울대 심리학과 곽금주 교수는 인간관계가 개인화된 한국 사회에서 '식사는 여럿이 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인식과 충돌을 일으킨 탓에 몰래 밥을 먹는 모습이 한국에서도 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곽 교수는 같은 기사에서 "진화심리학 관점에서 보면 식재료 보관이 어려워 여럿이 함께 밥을 먹었던 과거 습관이 뿌리 깊게 남아 있어 혼자 식사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부산대 심리학과 신현정 교수는 시빅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왕따나 외톨이처럼 보이는 것에 대한 일종의 두려움 때문에 몰래 밥을 먹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을 것으로 진단했다. 신 교수는 “정신적으로 독립하고 당당한 사람이라면 혼자 식사하는 것에 개의치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