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부터 끈질긴 생명력...서점주들 "외관 환경사업보다 독서문화 진작이 근본대책" /김강산 기자
지난 주말 취재차 보수동 책방골목을 찾았다. 헌책방 골목의 대명사로 불리는 보수동은 70, 80년대만 해도 신학기가 시작되는 3월부터 책을 사고파는 사람들로 넘쳐났다는데, 지금은 옛모습을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한적하다.
서울 청계천을 비롯해서 전국 대도시에서 성업했던 헌책방 골목이 사라지고 지금은 보수동이 유일하게 남았다. 보수동 헌책방 골목의 역사는 1950년대 한국전쟁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존 주택가였던 국제시장 인근이 철거돼 공터가 되면서 책 장수들이 모이기 시작했는데, 그 중 ‘손정린’이란 이북 피난민이 주한미군 부대에서 나온 잡지를 팔던 것이 시초였다고. 6.25 당시 서울의 학교들이 부산에 천막학교를 개설했으니, 책이 아쉬운 피난민 학생들도 이곳을 자주 찾았으리라. 70년대에는 점포수가 70개를 상회할 만큼 전성기를 맞아 잡지 뿐만 아니라 고서, 소설, 참고서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팔았다. 책이 귀하던 시절, 자신이 읽은 책은 팔고 필요한 책은 저렴하게 살 수 있는 보수동은 가난한 이들에겐 지식의 보고였던 것.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책방골목은 빛나던 역사를 뒤로 한 채 점차 한산해지기 시작했다. 전체적으로 국민들의 독서량이 줄어든 데다 알라딘, 예스24 등 중고서적을 취급하는 온라인 대형서점들이 잇따라 개업했기 때문이다. 이들 온라인 서점들은 어디서든 구매 가능한 접근성, 편리한 구매를 강점 삼아 중고책 시장을 점령했다. 이런 시대의 흐름에 맞춰가려고 보수동 책방골목도 한때 인터넷 서점을 개설해 판매를 시도해봤지만 관리 문제로 현재는 유명무실해진 상태다. 보수동 책방골목 번영회 회장 양수성 씨는 “인터넷 서점을 개설해 활로를 모색해 보려고 했지만 서점주인 대부분이 연령대가 높아 인터넷 사이트를 관리하는데 어려움을 느꼈다. 전문가를 고용할 여유도 없어 백지화됐다”고 말했다.
임대료 상승도 책방골목을 위협하는 요인 중의 하나다. <국제시장>, <변호인> 등의 천만 영화를 비롯해 블로그 등에서 고색창연한 보수동 책방골목이 소개되면서 책방골목을 ‘관광지’로서 방문하는 사람은 크게 늘었다. 발길이 늘자 임대료는 크게 올랐으나, 서점주인들의 수입은 제자리걸음이다. ‘책’에 대한 관심이 아닌 ‘명소’로서 책방골목을 찾은 사람들이 예쁜 서점을 배경삼아 그저 사진 몇 장을 찍을 뿐, 책을 사지는 않기 때문이다. 보수동에서 오래 서점을 운영한 김모 씨는 “다양한 매체에서 보수동이 홍보가 되면서 방문자는 조금 늘었어요. 하지만 정말 ‘방문’만 할 뿐 책은 전혀 팔리지가 않아서 궁여지책으로 서점 내부 사진을 찍으려면 책을 구매하셔야 한다고 안내문을 붙여놨습니다”라고 말했다.
여자친구와 데이트 코스로 보수동을 택했다는 이현우(27, 부산시 영도구) 씨는 보수동 책방골목 이곳저곳을 구경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 씨는 "배경이 예쁜 곳이 많아서 사진도 찍고 북카페에서 커피도 마셨다"고 말했다. 이 씨의 여자친구 김민아(25, 부산 해운대구) 씨는 "책 살 생각은 없이 왔는데 둘러 보니 괜찮은 게 많아서 책 사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며 다른 서점으로 발길을 향했다.
부산 중구는 책방골목을 살리고자 5억 원의 예산을 투입해 환경개선사업을 실시할 예정이다. 주요 사업 계획으로는 상인들이 모여 함께 책을 파는 공간인 공공서재 설치, 각 서점 앞에 점포의 개성을 살린 마스코트 조형물 설치, 야간조명을 추가로 설치해 밝고 젊은 느낌의 환경 조성하기 등이 있다. ‘환경개선’이란 이름처럼 책방골목의 외관을 바꾸는데 주력하는 사업이 대부분이다. 책방골목 주인들은 이 공사를 마냥 반기지만은 않는 분위기다. 양수성 회장은 “환경개선 사업은 명칭만을 바꾼 채 자주 시행돼 왔다. 현재 보수동이 맞은 위기는 ‘환경’만이 문제가 아니다. 근본적인 독서문화가 쇠퇴하고 있는 게 가장 큰 문제점인데, 이를 해소할 대책 없이 외관만을 바꾸는 것이 해결책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책방골목에 다시 봄이 찾아오려면 평범한 서점과는 다른 ‘책방골목’만의 장점을 알리는 것이 필요하다. 책방골목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장점은 추억을 파는 서점이라는 점이다. 새 책이 아닌 헌 책을 판다는 특성 덕에 책방골목의 책에는 추억이 담겨 있다.
서점주인이기도 한 양 회장은 여러 에피소드가 기억이 난다며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 “한 손님이 아버지가 젊은 시절 잡지에 투고한 글을 찾으러 왔었어요. 30년간 전국의 서점을 돌았지만 찾지 못하다가 보수동에서 그 잡지를 발견하고 아버지의 추억을 산 것 같다면서 행복해했습니다”. 또 다른 손님의 이야기도 있었다. “오래 전 손님이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엮어 출판했으나, 판매가 저조해서 몇 부를 찍지 못했다고 해요. 게다가 자신이 기념용으로 보관하던 책까지 분실해 안타까워 했는데 우연히 온 보수동에서 자신의 책을 발견하고는 너무 행복하다며 사가셨습니다”.
근처에 약속이 있어 왔다가 옛날 생각이 나서 보수동 책방골목을 찾았다는 김희태(71, 부산시 부산진구) 씨는 이곳이 전보다 서점 수가 줄어들어 휑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김 씨는 "고서점에서 <삼국사기>가 있나 물어 봤더니 일어판 밖에 없다고 한다. 이쉽지만 오늘은 그냥 옛생각하면서 둘러보기만 하고 간다"고 말했다.
70년의 역사를 지닌 국내 유일의 헌책방골목 ‘보수동.’ 단순히 그 역사적 가치뿐만 아니라 디지털 시대, 사라져가는 책들의 얼마 남지 않은 보루로서도 지켜져야 한다는 지적이 높아지고 있다. 이번 보수공사와 더불어 보수동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책방골목에도 봄이 찾아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