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컬러풀 웨딩즈>를 보고
이 영화에는 프랑스인 중년부부가 나온다. 그들은 커다란 정원에 멋진 집도 있고 아름다운 네 딸도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마냥 행복할 것만 같다. 그런데 아내가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우울증의 원인은 다름 아닌 세 명의 사위들이다. 사위들이 사고를 치고 다니느냐고? 천만에. 그들은 딸들과 화목한 가정을 이뤄 아주 잘 살고 있다. 그녀가 우울한 이유는 바로 사위들이 각각 중국인, 유대인, 아랍인이라는 것.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이 프랑스 아주머니가 다른 종교, 다른 외모, 다른 출신을 가진 사위들을 얻다보니 골치 아플 수밖에 없다. 가족 모임은 늘 중국인 사위와 유대인 사위와 아랍인 사위의 싸움에다가 인종차별 폭탄 발언을 마구 던지는 남편 때문에 파토나기 일쑤다. 그런데 믿었던 막내딸이 데려온 사윗감은 무려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이다.
이런 가족이 정말 있을까 싶게도 영화의 설정은 매우 파격적이다. 넷 중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네 딸이 전부 다른 나라 사람과 결혼하다니. <우리가 신에게 무슨 잘못을 했길래?(Qu'est-ce qu'on a fait au bon Dieu?)>라는 이 영화의 프랑스 원제가 이 부부의 심정을 대변해준다. 프랑스의 인종차별은 보수적인 우리나라보다도 더 심하다고 하니 그들에게 유색인종 사위들은 신이 내린 벌 같을 수밖에.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말은 ‘너는 어떻게 너와 똑같은 인간을 피부색만 보고 차별할 수 있니’라는 비난이 섞인 말이다. 거의 욕같이 들리기도 한다. 프랑스인 아버지가 사위들 앞에서 온갖 폭탄 발언을 던지다가도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말에 자기는 아니라며 버럭 화를 낸다. 하지만 딸이 데려온 흑인 사위를 보고 ‘주차요원이냐’라고 묻는 것을 보면 그는 확실히 인종차별주의자 같아 보인다. 어머니는 흑인 아기를 돌보는 상상에 괴로워하지만 인종차별주의자로 보이기 싫어 변명이 길어진다. 사위들도 마찬가지이다. 만나기만 하면 서로를 깎아내리느라 으르렁 거린다. 그러면서도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 동서가 등장하자 공공의 적으로 삼는다.
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낯선 장면이라고 하기에는 실제로 ‘나는 인종차별을 전혀 하지 않는다’라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쉽게도 나는 자신이 없다. 내가 가진 것이 편견임을 알면서도 내 자식들을 중동이나 아프리카, 중국 사람과 거리낌 없이 결혼시킬 수 있느냐 하면 선뜻 대답하기 어렵다. 실은 나도 그들과 그리 다르게 생기지 않았으면서 거부감부터 든다는 게 남들이 들으면 웃을 일이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 겉으로 드러나는 순간 아시안 고객의 컵에 찢어진 눈을 그려 넣은 스타벅스 직원과 동급이 되는 셈이다. 인종차별주의자로 보이는 것이 두려운 사람들은 이 문제를 언급하는 것조차 눈치를 본다.
그래서 이 영화는 흥미롭다. 잘못 건드렸다간 논란에 휩싸이기 쉬운 민감한 문제를 쉬쉬하거나 축소하지 않고 수면 밖으로 끄집어 올린다.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도 대부분 인종차별주의자다. 그들은 인종차별 발언을 마구 터뜨리고, 각 나라에 대한 선입견들도 거리낌 없이 언급한다. 심지어 그런 부분을 더 과장해 보여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쾌하지 않은 것은 무거운 문제에 코미디를 섞어 적당히 무게를 맞췄기 때문이다. 유태인 사위가 다른 사위들을 이름 대신 재키찬, 빈라덴으로 비꼬는 대사는 편견이라고 발끈하기 전에 웃음이 먼저 터진다. 인종차별 문제를 심각하게 들여다 볼 새도 없다. 가볍고, 유쾌하게. 코미디 영화로써의 역할을 잘 해낼 뿐이다.
하지만 영화가 끝날 쯤엔 이 영화가 가벼운 코미디 영화 한 편으로 보고 넘어가는 영화는 아님을 알게 된다. 영화는 확실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지만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에 편견을 가진 이들을 부드럽게 설득한다. 피부색이 어떻든 다 똑같은 한 명의 사람이라고. 초콜릿과 크림치즈. 흑인 사위와 막내딸의 사랑이 뚝뚝 묻어나는 애칭처럼 피부색이란 딱 그 정도일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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