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美)~여(女)~문(文)/Amenity, Feminism and Lifeway ⑱ / 칼럼니스트 박기철
밤 아홉시가 다 되어 프랑스 아비뇽역에 도착했다. 아직 완전히 깜깜한 밤은 아니라 약간은 밝다.
역을 빠져 나오는데 깜짝 놀랐다. 역 건물이 너무나 멋졌기 때문이었다. 아비뇽이라는 곳이 인구 10만도 안되는 소도시이기에 허름하면서도 고색창연한 기차역을 생각했는데 막상 눈앞에 나타난 역은 의외로 옆으로 길다란 유선형 모습의 최신식 건물이다. 아마도 유명 건축가가 특별히 설계해서 지은 듯하다. 나중에 알고보니 원래 있던 아비뇽 중앙역(Central Station)은 따로 있고 도심에서 좀 떨어진 곳에 아비뇽 떼제베(TGV) 전용역으로 새로 지은 것같다.
그 유려한 모습이 전혀 기차역같지 않고 마치 우주기지처럼 보인다. 세운(建) 건물이 아니라 눞힌(臥) 건물이다.
유럽의 고색창연한 건물들이 과거에 교황이나 왕들의 권력으로 지어졌다면 요즘의 건물들은 자본의 힘으로 지어질 것이다. 그런데 신기한 점은 이렇게 정성껏 멋지게 지어졌는데도 사람들이 무심하게 그냥 힐끗 보고 지나가며, 정작 멋있다고 감탄하는 곳은 수백년 전에 지어진 고색창연한 오래된 건물이라는 점이다.
아비뇽에 아무리 멋진 역사(驛舍)가 지어졌다고 해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냥 이렇게 최신식으로 지어졌구나 하며 지나친다. 그리고 일부러 여기까지 애써 찾아가서 보지는 않는다.
만일 과거 교황청 건물 등 오래된 건물들이 있는 구도심과 가까운 아비뇽 중앙역이 멀리 떨어진 황량한 곳에 있어서 쌩뚱맞아 하며 괜히 오후 8시 이후에 도착하면 버스도 없고 택시비만 더 든다고 투덜대기 쉽다. 나도 그랬다. 이러한 사실은 도시의 미감을 가꾸는데 어떠한 방향성을 가져야 하는지 통찰을 줄 수 있다. '삐까번쩍'한 무언가를 만들고 세우며 도시를 아름답게 가꾼다고 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오래된 것들을 보존하며 가꾸는 일이 우선될 때 도시의 미감은 살아날 줄로 안다.